올 여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장을 다녀왔다. 먼저 팔레스타인의 라말라에 들러 ‘한-팔레스타인 협력’에 대한 양측 싱크탱크 세미나에 참가했다. 공식 행사 전후로 좀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팔레스타인 정부 인사, 사업가, 종교인, NGO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의 속 얘기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크게 변한 건 없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점령과 식민지배’에 대해 여전히 격하게 분노했다. 다만 분노를 조직하고 알리는 무대를 세계로 넓히고 있었다.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against Israel, BDS)에 한국도 적극 동참해달라는 당부를 받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직간접으로 돕는 기업에 대해 불매, 투자회수, 제재를 하자는 운동이다. 헐리우드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이스라엘에서 만든 가정용 탄산수 제조기 소다스트림의 광고모델로 나섰다가 국제적으로 거센 비난을 받아 유명해지기도 했다. 소다스트림 공장이 팔레스타인 영토인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소다스트림이 한국의 홈쇼핑에선 불티나게 팔리지만 국제사회에선 불법 정착촌에서 생산된 이스라엘 기업 제품이라고 불매 운동의 대상이다. 또한 팔레스타인은 올해 4월 가입한 국제형사재판소의 회원국 지위를 활용해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와 작년 가자지구 공습에 대한 제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올해 2월 아산정책연구원을 방문해 세련된 언사와 유머 감각을 뽐내던 말키 팔레스타인 외무장관이 진두지휘 한다고 했다. 만약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고통이 갈수록 커진다면 UN과 국제사회가 이 모든 비용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나왔다. 정확히 어떤 비용을 뜻하는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의 절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만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정부, 싱크탱크, 언론 할 것 없이 억울함과 답답함을 토로했다. 정부 측 사람들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이집트와 요르단의 경제에도 도움을 주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는 담수화와 생태농업의 고급 기술을 무상으로 전수하고, 이집트와 요르단엔 이스라엘 자본으로 봉제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제공하며 지역 경제 안정에 이바지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에 대한 이 나라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이팔 평화협상에 열심인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면 보이콧 운동이 확산될 수 있다’고 하자 네타냐후 총리와 주요 관료들은 ‘국제사회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며 강력히 반발했다는 일화는 놀랍지 않다. 친분이 있는 중도좌파 학자들도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이 학계까지 퍼져나가는 상황에 대해 꽤 불편해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격의 없는 자리에선 국제사회의 편파적 태도에 불만을 터트렸다. 작년 여름 가자 공습과 관련해 하마스가 유엔 보호소 지하에다 로켓포와 무기들을 갖다 놓고 어린이들을 인간 방패로 삼은 일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부당하게 침묵했다고 꼬집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대대적인 로켓 공격을 첨단 요격 기술로 막아내 인명 피해가 적었지만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반격을 위해 쏜 로켓들을 무력화할 역량이 없었을 뿐더러 민간인 대피 명령마저 제대로 내리지 못했기에 피해가 더 컸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국제사회는 대체로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 팔레스타인이 군사력, 경제력, 로비력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세이고 약자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나치 치하에서 겪은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아픈 과거이고 인류 역사의 큰 퇴보였지만 그 대가를 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치르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에서 쫓겨나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단골로 등장한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를 아직도 이행하지 않고 있어 국제사회의 권위를 조롱한다는 비난 역시 받고 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평화와 영토의 맞교환’을 약속해놓고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 유대인 정착촌을 여전히 짓고 있는 건 너무 하다는 비판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에 비해 더 민주적이고 개방된 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작년 가자 공습에서 보듯이 유엔 보호소와 학교까지 공격해 어린이 500여 명을 희생시킨 건 보편적 가치에 크게 어긋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태도를 두고 일각에서 힘센 자의 탐욕과 오만으로 해석한다.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에 정착했고, 전쟁을 통해 그 땅을 더 넓혔으며, 미국계 유대인의 로비력으로 패권국의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할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정보국 모사드를 자랑하며, 창조경제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힘없는 팔레스타인을 좀 봐줄 수는 없는 걸까. 그것도 모자라서 유대인 정착촌을 야금야금 확장해 예루살렘, 서안, 가자 지구의 20% 이상을 잠식했다던데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은 틀린 걸까. 길을 지나다 싸움을 목격할 경우 자초지종을 못 듣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힘이 더 센 사람이 잘못이라는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아마도 힘이 더 센 쪽이 그렇지 못한 쪽을 괴롭히면서 다툼이 벌어지는 게 보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제 분쟁에서 제 3자의 판단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합리적 선택 이론에 따르면 행위자가 게임에서 이기고 있다고 판단할 경우 위험을 굳이 감수하지 않고 안전한 쪽을 택한다던데 왜 모든 상황에서 우세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무리수를 두는 걸까? 이는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자신만의 준거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주관적 준거에 따르면 현재 이팔 분쟁에서 이스라엘은 결코 점령자가 아니다. 게임에서 우세하기는커녕 겨우 찾은 권리를 다시 박탈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상황으로 인식한다.
이스라엘의 준거점은 ‘반유대주의와 나치즘의 광기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조상의 땅을 되찾은 후 그 일부를 마지못해 양보한 상황’이다. 유대인들은 힘들게 되찾은 영토인 만큼 이전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고 나라 없이 핍박 받던 전 세계의 유대인을 불러모을 기대에 부풀었다. 상황이 일관되게 나쁘면 체념하기 마련이지만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해 땅을 되찾고 나라를 지키면서 겪은 변화는 큰 기대를 동반했다. 그러니 잃은 것을 어렵게 찾았는데 또 잃게 된다면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상승하는 기대수준과는 정반대로 현실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며 이익을 얻기보다 현재 갖고 있는 것을 잃지 않고 지키려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득을 볼 경우 효용 함수의 기울기는 완만하게 오르지만 손해가 날 때 기울기는 아주 가파르게 된다. 같은 크기의 땅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 훨씬 큰 이유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오슬로 협정이란 자기 소유를 잃고 손실을 본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일 수 있다. 물론 주관적 준거점의 논리는 팔레스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분쟁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분쟁 당사자의 주관적 준거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당사자 모두 철저히 자신의 준거에 기준해 행동하고 전략을 세우기 때문이다. 요즘 동북아의 갈등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처럼 상대가 생각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자신의 것을 지키고 손해를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