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브리프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중 경쟁이 심화되면서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의 한가운데에 놓인 아세안 국가들이 아세안중심성 개념을 통해 지역 국제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는 주장이 있다. 아세안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이 모두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역 전략 경쟁 속 아세안의 역할과 전략적 중요성을 크게 강화시킨다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 아세안 내적, 외적 도전에 의해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던 아세안중심성 개념이 최근 크게 약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세안이 아세안 내부의 문제해결에서도, 강대국 사이 조정이나 의미 있는 역할에서도 중심성 주장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강대국 경쟁으로 아세안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는 주장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순되지만 두 가지 모두 현재 아세안 중심성이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강대국을 포함해 아세안을 둘러싼 대부분의 세력들은 아세안 중심성을 주장하는 아세안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양자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 다자협력 관계에서도 아세안 중심성에 관한 의견일치가 보인다. 아세안이 참여하지 않은 회의에서도 아세안 중심성 인정에 관한 언급이 있다(부록 1 참조). 반면 아세안이라는 지역 약소국 모임이 미-중 전략 경쟁 맥락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된다. 이런 아세안이 중심성을 주장하고 강대국이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 실제로 강대국이 아세안을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이 많다. 아세안이 중심적 역할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아세안 내 의견과 행동의 일치도 쉽지 않다.

이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세안 중심성 개념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아세안은 왜 아세안 중심성 개념을 고수하고, 강대국들은 왜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하는가? 최근 제기되는 아세안 중심성 한계론은 무엇이며, 아세안 중심성의 한계는 내재적이고 구조적 한계인가 아니면 외생적이고 현상적인 문제인가? 아세안 중심성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답이 필요하다.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과 깊은 협력관계를 가진 한국의 입장에서도 중요하다. 아세안과 관계 강화를 위해 아세안이 요구하는 중심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아세안과 마찬가지로 강대국의 전략적 압력을 받고 있는 한국이 아세안과 협력을 통해 강대국에 대한 협상력(leverage)을 확보하려 한다면 아세안 중심성의 유지, 강화가 중요할 수도 있다. 특히 다자협력 틀 안에서 의미를 가지는 아세안 중심성 개념 강화를 위해 한국과 아세안이 지역 다자협력 안에서 어떻게 협력해야 하느냐는 질문도 가능하다.

 

아세안 중심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학자들과 정책결정자들이 아세안 중심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정작 아세안 중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아세안의 공식적 정의는 없다. 일부 아세안을 관찰하는 학자들 사이에 아세안 중심성이 실제 아세안 혹은 개별국가의 문서들에 사용된 쓰임새를 보고 이를 역으로 정의하려고 노력할 뿐이다.1 아세안이 실천적으로 아세안 중심성을 사용한 맥락에서 유추되는 아세안 중심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아세안은 지역의 가장 오래된 다자협력체로 지역의 많은 다자협력 제도들을 시작했고 이를 주도하고 있다.2 또한 아세안 안팎의 주요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한 지역 다자제도에서 국가 간 관계, 제도의 운영을 규정하는 원칙과 규범은 아세안 주도로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아세안은 지역 다자협력 및 지역 국가들 간의 관계를 주도하고 있으며, 이런 역할은 아세안이 지역에서 존재 의미를 갖게 하고 아세안의 중요성을 더한다.

아세안 중심성이란 추상적인 개념은 구체적으로 제도의 실행에서도 파악될 수 있다. 아세안 중심성에 근거해 아세안의 방식(ASEAN Way)이라 널리 알려진 아세안의 운영 규칙이 아세안을 넘어 지역 다자협력을 규정하는 원칙으로 통용되고 있다. 아세안 주도로 형성된 아세안안보포럼(ARF, ASEAN Regional Forum), 아세안+3, 그리고 동아시아정상회의(EAS, East Asia Summit)까지 주권존중과 내정불간섭, 협의와 합의로 요약되는 아세안의 방식이 적용되고 의사결정 역시 이 방식을 따른다. 의장국 역시 당해 연도 아세안의장국이 맡도록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의장국은 의장성명 초안을 작성하고, 의장성명 수정안에 대한 거부권도 가진다. 의장국은 당해 연도 지역협력의 중요 아젠다를 선정하는 권한도 가진다.3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의 대외적 메시지다. 아세안과 외부 국가의 관계, 강대국을 포함한 지역 다자협력에서 아세안의 지위를 규정하는 것이 아세안 중심성이다. 아세안의 내적 단결성(ASEAN Unity)이 대외적으로 아세안 중심성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된다.4 아세안 10개국이 하나의 목소리로 단결(unity)해 외부 세력과 상호작용하고 협상할 때 아세안 10개국의 집단적 지지를 얻으려는 외부 세력은 지역에서, 특히 지역 다자협력체에서 아세안이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역할을 한다는 개념을 지지한다. 따라서 내적인 아세안 단결성은 대외적 메시지인 아세안 중심성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림 1. 아세안 단결성과 아세안 중심성: 영역 구분
그림1

 

아세안 중심성은 어떻게 인정되며, 효과는 무엇인가?

 
아세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양자, 다자 회의의 의장성명, 공동성명에는 예외 없이 아세안 중심성을 표현하는 문구가 들어간다. 아세안 중심성에 관한 거의 최초 표현은 1994년 ARF 설립 당시 작성된 concept paper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아세안이 ARF의 중요 추진세력으로 임무를 맡았다(ASEAN has undertaken the obligation to be the primary driving force of the ARF)”라고 표현되어 있다.5 이어 1995년 열린 제2차 ARF 의장성명에도 똑같은 표현이 등장한다.6 마찬가지로 1998년부터 정례화된 ASEAN+3 정상회의에서도 2004년 정상회의 의장성명부터 “중국, 일본, 한국은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중요 추진세력으로 아세안의 역할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이란 표현이 등장한다.7 EAS의 경우 첫 정상회의인 2005년 정상회의 의장성명에서부터 “중요 추진세력으로 아세안(ASEAN as driving force)”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8

초기 아세안이 ‘운전석에 앉아 있다(Driver’s seat)’거나 ‘중요 추진세력(driving force)’이라는 방식으로 아세안의 중심성이 표현되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중심적 역할(central role)’, 그리고 ‘중심성(centrality)’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아세안+3에서는 2010년 처음으로 중심적 역할(central role)이라는 말이 등장한다.9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이라는 표현이 명확히 등장한 것은 이듬해인 2011년 아세안+3 의장성명에서이다.10 EAS 의장성명에서도 2010년 아세안의 중심적 역할(central role)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이후 2018년에는 본격적으로 아세안 중심성이란 표현이 등장했다.11 ARF의 경우 2018년 의장성명에 아세안 중심성이라는 표현이 본격 등장했다.12 이상의 문건들을 놓고 보면 애초 아세안이 핵심 추진세력(driving force)이라는 식으로 아세안 중심성이 표현되기 시작했다가 2010년을 기점으로 점차 중심적 역할, 그리고 이후 아세안 중심성이라는 개념이 아세안 문서에서 명확하게 자리를 잡았다.

아세안의 방식을 미, 중 강대국을 포함하는 지역 다자협력 제도의 기본 원칙으로 함으로써 아세안 국가들은 익숙한 다자협력 운영방식을 유지할 수 있다. 아세안의 방식은 강한 국가에 대한 약한 국가의 비토(veto)를 보장하는 주권존중-내정불간섭, 협의와 합의를 원칙으로 한다. 아세안의 방식은 아세안 국가보다 강한 국가들로 구성된 지역 다자협력 내에서 아세안의 이익을 보장하는 안전판이 된다.13 아세안 국가는 의장국 역할을 독점하고 아젠다 형성에 있어 아세안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역 다자 아키텍처 속에서 가장 약한 세력인 아세안이 지역 국제관계에서 의미 있는 행위자로 취급받을 수 있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아세안 운전자론 혹은 아세안 중심성 때문이었다.

 

왜 아세안 중심성은 쉽게 인정되는가?

 
아세안이 주도하는 지역 다자협력체나 아세안과 관계를 가진 다른 국가 사이 양자관계에서 아세안이 아세안 중심성이라는 개념과 표현을 고집하는 것은 아세안의 자유다. 그러나 이 개념이 양국이 합의한 문서에 표시되고 아세안 주변 강대국이 아세안 중심성을 존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강대국들은 아세안 중심성에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아세안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강대국들도 표면적으로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지지를 표하고 이를 폄훼하지 않는다. 지역 다자회의에 참여하는 크고 작은 국가들도 모두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한다. 왜 훨씬 큰 힘을 가진 강대국들이나 다자협력에 참여하는 많은 지역 국가들은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하고 존중할까?

미국과 중국 같은 강대국을 포함해 지역 다자협력 안에 속해 있는 아세안 보다 큰 국가들이 아세안 중심성에 지지를 표명하는 이유는 반드시 아세안이 중심이라고 인정하거나 아세안이 지역 다자협력을 끌고 갈 만한 리더십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아세안의 지지를 얻고 아세안과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에서 아세안은 최대의 격전지로 흔히 칭해진다.14 미국과 중국이 아세안 10개국 중에서 얼마나 많은 국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가는 아세안에서 미-중 경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척도다. 나아가 집단으로 행동하는 아세안 10개국을 한꺼번에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면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아세안과 아세안 지역 국가를 두고 펼쳐지는 미-중 사이 지정학 경쟁이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고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강대국의 인정을 끌어낸다.15

지역의 중견국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물론이고 호주, 일본, 인도 등 여타 지역 중견국가도 정치, 안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아세안에 접근하고 관계를 강화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아세안이 이들 국가에 요구하는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명시적인 지지 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이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하고 이를 문서에 포함시키기 시작하면 아세안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이를 요구하고, 역내 중견국이나 다른 소국들도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아세안의 대화상대국 입장에서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인정과 지지는 큰 비용을 수반하지 않는다. 여기서 비용은 아세안 중심성의 인정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자신의 대외정책에 대한 제약, 자율성의 제약을 의미한다. 아세안은 아세안주도의 다자협력에 포함되는 국가, 아세안과 협력하려는 대화상대국에 동일하게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중국과 경쟁을 벌이는 미국이 아세안 주도의 다자협력이나 아세안과 양자관계에서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중국도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경쟁하는 조건은 동등하다. 경쟁하는 상대방도 같은 조건으로 구속되고,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세안과 관계 형성의 기본이라면 강대국 입장에서 쉽게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아세안 주도의 지역협력은 아세안의 방식을 기본 원리로 채택하고 그 핵심은 명확한 법적, 제도적 강제장치를 최소로 하는 느슨한 제도다.16 이런 느슨한 강제장치나 제재장치를 가진 제도가 개별 국가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정도는 매우 낮다. 아세안이 아세안 중심성 개념을 통해 지역 다자협력을 좌우하거나, 지역의 전략적 지형을 바꾸거나 대 강대국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방법은 없다. 다시 말해 강대국 입장에서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아세안이 자국과의 양자관계에서, 지역 다자협력에서 자신의 대외전략에 중대한 제약을 가하는 이니셔티브를 취할 능력과 가능성은 크지 않다. 따라서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하는 데 따른 비용은 그리 크지 않다. 반면 아세안과 관계를 맺고 협력하기 위해서 아세안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은 필수다. 그렇다면 강대국 입장에서 비용 대비 효과가 제법 큰 정책 수단이 될 수 있다.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도전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 국가, 아세안과 관계를 가진 아세안 역외 국가 모두에게 쉽게 인정되고 비용 대비 효과가 큰 개념이다. 반면 아세안 중심성은 쉽게 구조적 한계에서 시작되는 도전에 처한다. 이런 도전은 아세안 안팎에서 모두 나타난다. 먼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의 내적 단결을 전제로 한다. 2021년 2월 미얀마에서 발생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어떤 사례보다 명확하게 아세안 내적 단결 유지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2021년 민주화 과정을 뒤엎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아세안은 미얀마의 민주주의 역전, 군부에 의한 자국민 탄압이란 사태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아세안 내에서 개별 국가들이 가진 이해관계, 특히 미얀마와의 개별적인 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미얀마 군부에 대한 강력한 규탄과 제제, 나아가 미얀마의 퇴출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 매우 어려웠다. 미얀마에 대한 강력한 제재라는 조치가 향후 자신에게 향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회원국들은 머뭇거렸다. 아세안이 취한 대응은 2021년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와 연말 정상회의에 미얀마 대표단 참석을 배제하고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한 5개 항의 대책을 내놓는 정도였다. 그나마 이 대책도 미얀마 군부에 의해서 사실상 거부되었다. 5개 항 합의에 명시된 아세안의 대 미얀마 특사 임명도 늦어졌고, 아세안 회원국 간 의사소통 문제로 혼선을 빚기도 했다. 마침내 임명된 미얀마 특사가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군부에 가로막혀 아웅산 수치 등 군부에 반대하는 인사들에 대한 면담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이러는 사이 미얀마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아세안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의 목소리는 높아졌다.17 거의 50년 만에 이룬 미얀마의 민주화를 역전시킨 군부 쿠데타에 대해서 아세안이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가 없자 국제사회는 아세안의 무능력함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비판은 곧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18 아세안 내에서 일어난 미얀마 쿠데타 문제도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아세안이라는 지역협력체가 어떻게 미국, 중국 등 주요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하는 지역 다자협력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며, 어떻게 지역 아키텍처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외적인 도전은 내적인 도전보다 훨씬 강력하다. 아세안 중심성이 지역 다자협력에서 아세안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세안 중심성은 지역 다자협력이 의미 있게 실행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이런 차원에서 아세안 중심성은 2000년대 후반까지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1997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아세안+3와 동아시아정상회의가 지역의 가장 중요한 다자협력 기제로 자리 잡으면서 이 제도들을 제안하고 시작했던 아세안의 중심적 위치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역 다자협력이 실질적 성과를 잘 도출하지 못하면서 미-중 전략 경쟁이 2000년대 후반부터 지역 다자협력을 잠식해 들어갔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이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지역 다자협력의 장은 실질협력보다는 강대국 전략 경쟁의 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19 지역 다자협력이 강대국 경쟁의 장이 되면서 강대국 사이를 조정할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한 아세안의 중심적 위상과 역할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아세안 중심성이 가진 구조적 한계는 강대국의 인정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2010년대를 전후로 강대국 경쟁은 이제 아세안 중심의 지역 다자협력을 벗어나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까지 연결되는 중국 중심의 지역 다자협력인 일대일로(BRI, Belt and Road Initiative)를 제안했다. 미국은 뒤늦게 미국 중심으로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별도의 전략을 마련했다. 미국, 일본, 호주, 인도 등 4자 안보협력 국가들이 중심이 된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지역 및 전략 개념이다. 일대일로와 인태전략이라는 강대국 이니셔티브가 기존의 지역 다자협력 제도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지역 핵심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참여할 때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협력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일대일로라는 자신의 제도로, 미국은 인대-태평양이라는 별도의 구상으로 자신들만의 수단(vehicle)을 가지면 아세안 중심의 지역 다자협력에 투입되는 강대국들의 자원과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강대국들의 자원과 관심이 줄어든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협력은 그만큼 전략적 의미를 잃게 되고 다른 지역국가들의 눈에도 중요성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중요성이 크게 떨어진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협력 틀 내 아세안 중심성이라는 담론이 가지는 전략적 가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세안 중심성과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

 
아세안은 이미 다방면에서 한국의 중요한 파트너다. 아세안은 한국의 무역 2위 상대이며, 제2의 해외 투자처이고, 제2위의 건설시장이다. 한국에게 아세안은 중국만큼이나 중요한 시장이자 생산기지다. 3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아세안 국가에 거주하고 있고, 코로나-19 이전 한-아세안 사이 인적교류는 연간 1천만 명을 넘었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아세안에서 한류는 여전히 확산되고 있다. 최근 많이 논의되는 공급망 문제에서도 아세안은 중요하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세안 국가 내 생산 차질에 따라 특히 전자공업을 중심으로 중간재 조달에 큰 차질을 빚은 적이 있다.20 삼성, LG 등의 대 베트남 투자에서 볼 수 있듯, 전자공업 부문의 중간재는 아세안 국가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2020년 아세안 5개국(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이 글로벌 중간재 시장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6.7%에 달했다. 한국의 아세안 5개국에 대한 중간재 수입 의존도는 9%다.21

경제와 공급망 문제뿐만 아니라 지역 강대국 경쟁의 심화 속에 아세안은 한국의 전략적 이익과도 관련이 있다. 미-중 강대국 경쟁 속에 한국은 안보와 경제 이익을 놓고 미-중 사이 딜레마를 겪으며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아세안의 입장도 유사하다. 아세안은 헤징(hedging) 전략을 통해 개별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미-중 사이 균형전략을 펴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으로 인한 지역 중소국가의 딜레마라는 환경에서 한국과 아세안의 전략적 이익은 유사하다.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을 통해 강대국, 강대국 경쟁이 가져온 부정적 영향을 모두 극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은 아세안과 협력을 강화해 대 강대국 협상력을 어느 정도 제고할 수 있다. 미국, 중국 등 강대국은 물론이고 일본, 호주, 인도 등 지역 중견국까지 적극적 구애를 하고 있는 아세안 10개국 연합에 대해 한국이 신뢰에 기반한 전략적 협력 관계를 견고하게 구축한다면 이는 한국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미, 중 등 강대국, 그리고 지역의 중견국가에 비해서 한국이 아세안 방면에서 가지는 비교 우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한국이 다른 국가와 다르게 아세안에게 호소할 수 있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안보 공공재를 제공할 수도 없고, 엄청난 경제적 자원을 동원한 매력공세를 펼 수도 없다. 반면 한국은 위협적이지 않고 신뢰할 만한 협력 파트너라는 장점이 있다. 강대국과 달리 아세안에 접근할 때 그 뒤에 숨은 전략적 의도가 있는 국가가 아니다. 아세안을 둘러싼 다른 국가와 달리 한국이 가지는 이런 장점은 물론 개별 국가와 양자협력, 아세안과 한국 사이 협력으로 강화될 수 있다. 그러나 아세안과 신뢰를 강화하고 전략적 협력을 배가하기 위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 약화되는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고민 중 하나다. 이 문제의 해결 즉, 양자 차원에서 협력을 넘어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통해 지역에서 아세안의 지위와 위상 강화까지 한국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세안 중심성 강화를 위해 한국이 아세안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협력을 다시 강화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세안 중심성은 ARF, 아세안+3, EAS, ADMM+ 등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협력의 제도에서 가장 잘 구현된다. 실질 성과의 부족, 강대국 전략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약화된 지역 다자협력의 재강화는 아세안 중심성 회복의 지름길이다. 과거 한국은 경제위기 직후인 김대중 정부 시기 아세안+3, 그리고 이후 EAS 등 아세안이 주도하는 지역 다자협력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적극적 역할을 했던 경험도 있다. 한국이 가진 국력, 지역 및 글로벌에서 위상, 대외적 매력으로 볼 때 이런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지역을 둘러싼 환경도 지역 다자협력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늘 지역 질서의 큰 변화, 지역적 위기는 다자협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냉전 종식이란 질서 변화는 아세안 중심의 ARF를 낳았다. 1997년 아시아경제위기는 아세안+3라는 확대된 다자협력을 낳았고 이는 2005년 EAS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유럽에서도 제 2차 세계대전은 현재 유럽연합의 모태가 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를 만들어냈다. 강대국의 경쟁이 가져온 지역질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라는 위기, 코로나-19가 가져온 보건과 인간안보, 경제 위기, 그리고 올해 우크라이나전쟁이 가져온 확대된 강대국 전략 경쟁 속 공급망 불안, 식량 안보 및 에너지 안보 위기, 그리고 전반적인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지역 국가들 사이 실질 협력을 촉진할 만한 위기는 충분하다.

위기의 실체가 구체적인 만큼 지역 국가들 사이 다자협력을 통해 노력해야 하는 이슈도 분명하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을 방지하거나 발생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경험 및 노하우 공유, 방역 물자 비축, 백신 스와프, 개도국의 보건 역량 강화를 위한 지역 포괄적 보건협력 제도가 필요하다. 외부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줄이고 에너지 안보 확보를 위한 역내 에너지 안보 협력체도 논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식량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 한국 주도의 아세안+3 쌀 비축 제도의 품목 확대 및 강화도 생각해볼 수 있다. 기후변화가 가져온 위기 앞에 재해재난 관련 협력 등 사후 대응뿐만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한 선제 대응과 이를 통한 신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협력은 미래를 위한 인간안보, 비전통안보 협력의 측면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함께 달성할 수 있는 협력이다.

보호무역 색채를 더해가는 강대국의 자국 중심 공급망 강화 시도에 대해 지역 중소국가의 이익을 지키고 무역에 의존한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지역 국가들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협력도 있어야 한다. 포괄적지역경제동반자협정(RCEP,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등 기존 합의된 제도의 효과적 활용도 중요하다. 미국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가 지역 국가들에 보다 넓은 시장 접근 등 실질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지역 국가들 공동의 노력도 요구된다. 코로나-19 이후 아세안 지역에서도 크게 활발해진 e-commerce의 경제적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지역 국가의 디지털 전환, 이를 통한 성장 동력 확보, 점차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디지털경제협정에 대한 대비 등에 대한 공동의 노력도 필요하다. 다자협력의 주제로 사이버안보와 데이터안전까지 담아내는 포괄적 디지털 협력의 제도 역시 필요하다.

이런 다양한 요구에 대해 한국과 아세안이 공동의 노력으로 지역 다자협력 차원의 답, 즉 효과적인 제도를 건설하고 지역 국가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긴급한 필요에 대해 실질적 협력의 결과를 도출하고 그 이익이 지역 국가들에게 돌아간다면 개별 국가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지역협력 참여를 이끌어낼 것이다. 보다 많은 국가들이 참여해 실질적 결과를 도출하는 다자협력에 강대국들도 주목할 수밖에 없고 지역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다자협력에 더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자연스럽게 지역 다자협력을 주도하는 아세안의 중심성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로 아세안의 중심성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는 아세안의 한국에 대한 신뢰로 이어질 것이다.

 

(부록 1.) 최근 아세안 주변 국가들의 아세안중심성 수용 및 표현
부록1

출처: 순서대로, The White House. 2022. “ASEAN-U.S. Special Summit 2022, Joint Vision Statement.” May 13.; ASEAN. 2021. “Joint Statement of the ASEAN-China Special Summit to Commemorate the 30th Anniversary of ASEAN-China Dialogue Relations: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 for Peace, Security, Prosperity and Sustainable Development.” November 22.; ASEAN. 2021. “Chairman’s Statement of the 24th ASEAN-Japan Summit.” October 28.; ASEAN. 2021. “Chairman’s Statement of the 18th ASEAN-India Summit.” October 28.; ASEAN. 2021. “Chairman’s Statement of the 1st ASEAN-Australia Summit.” October 27; ASEAN. 2019. “Co-Chairs’ Statement of the 2019 ASEAN-Republic of Korea Commemorative Summit.” November.;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1. “한-호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공동성명(국·영문).”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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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이재현

지역연구센터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아세안-대양주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 오세아니아와 서남아 지역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Transnational Natural Disasters and Environmental Issues in East Asia: Current Situation and the Way Forwards in the perspective of Regional Cooperation" (2011), “전환기 아세안의 생존전략: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층적 적용과 그 한계“ (2012), 『동아시아공동체: 동향과 전망』(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미-중-동남아의 남중국해 삼국지”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