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국제안보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미·중 패권경쟁에 전쟁까지 더해지면서 점차 진영 대립구도가 굳어지고 있지만 냉전과는 전개양상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리더십이 예전과 같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기에 경제이익과 일방주의가 편견과 결합되면서 미국우선주의가 국제 리더십을 집어삼켰다. 조 바이든 집권 후 국제 리더십의 회복과 동맹 강화를 선언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중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 위주의 국제 구도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미·중 대립이 심화하면서 과거 미·중 간 공통 해결문제로 인식됐던 북핵문제도 미·중 대립의 연장선에 서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한반도 이슈가 미국 외교안보의 최우선 순위가 되었던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미·중 데탕트, 냉전 종식 등 국제질서의 변곡점에서 한반도 정세도 요동을 쳤다. 의외로 트럼프 집권 시 북한 문제가 미국 외교안보의 우선순위로 떠올랐지만, 국내정치의 치적 성향이 강했던 북미대화는 비핵화는커녕 오히려 북한에게 중·러 협력의 길을 열어주었다.
2021년 들어선 바이든 정부는 다급히 미국 리더십의 부활을 예고했으나, 모든 노력은 중국 저지에 집중되었다. 중동에서 아시아로 외교의 무게중심을 옮기려 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중동 분쟁으로 더욱 다른 곳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최근 미국은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3자 안보동맹)의 필러2(제2단계 방산협력국)로 일본을 받아들이는 한편, 미·일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방산협력의 선물보따리를 풀면서 미·일 지휘통제체계의 연계를 강조했다. 일본을 활용하면서 주일미군을 대중저지 핵심전력으로 삼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한반도 문제에 갇힌 동안 일본은 미국의 글로벌 구상에서 충실한 지역 파트너로 등장한 것이다.
미국에게 북한은 더욱 보이지 않는 문제일 뿐이다. 북한은 2국가체제를 선언하고 핵무기 개발에 집중하면서 최근 러시아라는 활로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미사일 수출과 유엔 제재망 와해 등이 대표적 사례다. 최근 이란·이스라엘의 공방전에서 양측을 적극 만류하는 미국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대선을 앞둔 미국의 관심은 분쟁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데 있어 보인다.
다가올 미 대선의 유력주자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위험하다. 미국의 보수집권 정책서에서는 동맹과 협력국에게 재래식 억제를 맡기라고 추천하면서 대표적인 국가로 한국을 들었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 1기에서 성공하지 못한 방위비분담금의 급격한 인상이나 주한미군 감축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트럼프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차관보는 4월 말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핵무장을 스스로 검토해야 할 수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핵무장을 미국이 지원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워싱턴선언에서 구체화된 한미일체형 확장억제를 트럼프 정부에서는 제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도 벅차며 한국이 북한을 알아서 맡는 데 더하여, 필요하면 동북아 역내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라는 속내이다. 이런 접근은 동맹을 가치가 아니라 비즈니스로 보는 트럼프다운 시각을 반영한다.
우리는 지난해 한미동맹 70주년을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내년에는 동맹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반도가 점차 관심에서 멀어지고 한미동맹을 부담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닌지, 이번 대선 속에서 미국 리더십의 속내를 읽어내고 대응해야 한다. 한국의 가치를 미국이 절실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패전국이었던 일본처럼 미국이 좋아할 일만 하라는 의미가 아니며, 자주·실리외교랍시고 박쥐처럼 자기이익만 챙기라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동북아 안보를 견인하는 과감한 역할을 맡아야 하고,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기술 분야에서도 미국 등 민주국가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현 정부는 그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이제 우리 외교와 안보는 더욱 강하게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만 할 것이다.
* 본 글은 5월 9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