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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은 앞으로의 세계가 2차대전 이전의 험한 세상으로 되돌아갈지 아닐지 보여줄 분수령적 사건이다. 러시아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푸틴의 야심을 국제사회가 용인한다면 앞으로 국제정치는 규범이 사라지고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이 될 것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를 위한 노력을 나 몰라라 한다면 명분도 실리도 다 잃을 수 있다. 선봉에는 못 서더라도 입장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미국 하원은 4월 20일 우크라이나에 610억 달러 상당의 군사지원 법안을 311 대 112로 가결했다.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은 상원을 통과한 뒤 6개월 동안 트럼프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하원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민주당 의원들과 101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지원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공화당 출신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이 법안의 통과를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었다. 그는 “세계 도처의 테러리스트들과 폭군과 끔찍한 지도자들이 미국이 과연 동맹국들과 국익을 지켜낼지 아닐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기필코 우크라이나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의장직과 정치적 신념 중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

존슨 하원의장의 그러한 결단은 국제정치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지금까지 8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이 군사력으로 타국 영토를 병합하겠다고 나섰던 전쟁은 없었다. 타국의 영토주권과 자결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국제규범이 대체적으로 지켜져 왔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은 처음부터 우크라이나를 실질적인 러시아 영토로 만들려 했다. 2022년 2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을 때 5시간 대화 중 대부분을 우크라이나가 왜 국가가 아닌지의 역사 강의에 할애했던 이유다. 결국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서방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서둘러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시켰다.

러시아 제국을 부활하겠다는 그의 야심을 국제사회가 용인한다면 앞으로 국제정치는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이 될 것이다. 이는 과장된 우려가 아니다. 간단히 말해 17세기 중엽 근대국가 체제가 등장한 이후 2차대전 이전 수 세기 동안의 정글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대에는 전쟁이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공인되어 왔다. 그래서 강대국이 전쟁을 통해 약소국 영토를 분할하거나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나 오스만터키가 그랬다. 바로 그런 세상에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조선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와 규범이 만들어졌다. 영토주권과 자결권, 자유무역, 다자주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내용의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처음으로 무력을 통한 분쟁 해결 방식이 UN헌장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1950년 6월 김일성이 무력으로 남침했을 때,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을 돕겠다고 군대를 파견해 지켜주었다. 그것은 자유주의 국제규범이 보편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앞으로의 세계가 2차대전 이전의 험한 세상으로 되돌아갈지 아닐지 보여줄 분수령적 사건이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점령지역을 차지하는 형태로라도 승리를 선언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를 주도하는 미국의 리더십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유럽 대륙의 나토 회원국들은 미국 없이 자체적으로 러시아를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은 나토 비회원국인 몰도바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발트 3국이나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러시아제국 부활의 꿈을 밀고 나갈 것이다. 러시아-중국-이란-북한으로 연결되는 권위주의 진영은 더욱 힘을 얻어 과감하고 공세적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미국의 후퇴와 러시아의 승리는 한국의 안보 상황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부 미국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와 달리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기 때문에 사례가 다르다고 설득하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손을 떼게 만든 고립주의가 동맹의 경우는 예외로 삼을 것이라는 말은 믿기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존 켈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시 한국과 일본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지난 2월 12일 CNN과의 회견에서 말했다. 그러니 북한의 도발시 미국이 자국의 희생을 치러가며 한국의 안보를 지켜줄지, 국민들의 의심은 커질 것이다. 반대로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국제규범과 동맹 수호를 위한 미국의 의지와 능력이 약화되었음을 감지하고 더욱 고무될 것이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상황은 결코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이 ‘이념’에 경도되어 ‘실리’를 잃는 외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념’에 경도되어 미국에 기울다 보니 외교가 균형을 잃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최악이라는 우려도 있다.

일견 호소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이 놓치고 있는 것은 국제질서의 성격, 즉 국제정치의 판 자체가 크게 요동치고 있는 글로벌 차원의 변화,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국익에 미칠 심각한 영향에 대한 통찰이다. 국제규범이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져 주변 강대국이 한국의 영토주권과 자율권을 군사력으로 침범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는 세상이 다가오는데, 초음속미사일에 전술핵을 탑재해 한국을 초토화하겠다고 위협하는 북한을 코앞에 두고, 우크라이나 상황을 먼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방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토주권이나 자결권의 국제규범이 지켜져야 한다는 입장을 ‘이념’에 경도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이념’과 ‘실리’가 분리 가능한 세상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가 권위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대결하면서부터 안보와 경제가 맞물려 돌아가고 디커플링, 디리스킹, 공급망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권위주의 진영이 무슨 짓을 하든 못본 체 하겠다고 하면 그 여파는 경제적 실리 차원의 손실로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다. 예를 들어,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으로의 첨단 반도체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 한국, 일본, 대만, 네덜란드 등의 기업들에게 상당한 압력을 행사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고 한다면 과연 미국, 일본, 서방 국가들이 한국을 믿고 경제협력, 기술협력, 공급망 협력에 초대하고 적극 협력해 줄 것인가? 우리는 계속 선진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기술 표준을 만들어 가고, 시장판로를 개척하고, 공급망을 확장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데, 그들은 세계 경제력 10위권의 선진국 한국이 펼치는 그런 외교를 전혀 괘념치 않고 우리에게 협력해 줄지 의문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규범기반 국제질서 운운하는 미국이 위선적이라며 냉소하는 시각도 있다. 글로벌사우스의 상당수 국가들이 그런 입장을 취한다. 물론 미국도 그런 비판을 받을만한 처신을 가끔 했다. 그러나 러시아처럼 대놓고 “자유주의는 죽었다”(푸틴 대통령의 2019.06.27.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면서 기본적인 국제규범을 노골적으로 깔아뭉개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도 영토를 병합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과 관련하여 그러한 글로벌사우스 국가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바로 북한 때문이다. 북한이 우리에게 실존하는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80퍼센트 가까운 국민이 북한 위협에 불안감을 느끼며 핵 개발을 찬성하는 것이 현실이고, 어떻게 미국을 끌어당겨 북한의 도발을 막을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처지다. 그런 상황에서 글로벌사우스의 국가들처럼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를 위한 노력을 나 몰라라 한다면 명분도 실리도 다 잃을 수 있다. 선봉에는 못 서더라도 입장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게는 우리의 입장을 때때로 분명히 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상호 존중과 호혜의 원칙아래 우호관계 유지에 힘써야 할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우리의 모든 고뇌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의 격변을 향한 용암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꿈틀대고 있다. 미국 국내 정치가 문제다. 만일 11월 5일 트럼프 후보가 당선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 세계는 세기적 갈림길 앞에 서 있다.

 
* 본 글은 4월 29일자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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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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