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위해 백인 학교만 찾는
밴쿠버의 한인 유학생 부모
동포들에게도 환영 못 받아
인종 초월한 시민 규범이
이민 사회의 확실한 보호막
캐나다 광역 밴쿠버 지역에는 한국 조기 유학생이 많다. 초등학생 학부모는 아이의 영어 실력을 높이려고 한인 학생이 없는 학교를 찾지만 400여 곳 가운데 한 군데도 없다. 캐나다 한인동포 숫자도 전 세계 재외동포 중 미국, 중국, 일본 다음으로 많고 밴쿠버에선 소수 인종 가운데 네 번째다. 밴쿠버 내 비유럽, 비원주민계 소수 인종은 이제 55%에 달해 더 이상 소수라 말하기도 뭣하다. 조기 유학생 부모가 백인이 많은 학교를 찾아 헤매면 한인동포는 백인 다수가 비영어권 출신 이민자이고 인종 선호도를 공공연히 밝히는 건 이곳 윤리에 어긋난다고 알려준다. 수족관에 볼거리가 없어 한국보다 초라하다고 투덜대면 이곳은 해양동물 구조·재활·방류를 목표로 한다고 말해준다.
한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동포가 유학생 가족을 돕는 건 같은 민족이란 이유보다는 캐나다 시민의 가치와 규범에 따른 행동이다. 이민사회에서 같은 민족, 비슷한 인종의 머릿수가 많으면 든든하겠지만 더 확실한 보호막은 보편가치의 확산이다. 밴쿠버 스카이 트레인에는 ‘문제는 당신이 얼마나 캐나다 사람 같은지가 아니라 캐나다에 사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입니다’란 공영방송 슬로건이 적혀 있다. 전체 인구의 25%, 밴쿠버 인구의 40%가 이민 1·2세대인 이곳에서 ‘캐나다 사람’이란 정의는 모호하다. 민족과 인종이 아닌 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를 따르는 코즈모폴리턴이라고 정의할 때 국민 정체성이 생긴다.
밴쿠버의 한 초등학교 3~4학년 통합반엔 중국, 대만, 홍콩, 한국, 일본, 필리핀, 인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멕시코계 아이 스무 명이 웃고 떠들며 지낸다. 여기서 나고 자랐거나 몇 년 전 이민해 왔다. 한국 학부모가 선호하는 ‘오래전 영국에서 이민 온 코카서스 백인’은 딱 한 명이고 아빠가 코카서스계, 엄마가 아시아계인 아이가 두 명 있다. 전교생은 매일 아침 ‘우리가 사는 이 아름다운 땅은 원주민이 살던 곳이란 걸 알고 있으며 고맙게 생각합니다’라고 외치며 수업을 시작한다. 교실 창문엔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고 신경 다양성(발달장애)을 환영하며 흑인 생명도 중요하고 우크라이나와 함께한다는 아이들 그림으로 가득하다. 짓궂은 대만계 아이가 인도계 친구의 영어 억양을 놀리면 담임선생님이 당장 교실에서 나가라며 교장실로 내쫓는다. 아이들은 교장선생님께 눈물이 쏙 나도록 혼나는 벌을 가장 무서워한다.
얼마 전 장난꾸러기 몇몇이 러시아계와 우크라이나계 아이를 가리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고 숙덕거렸다. 선생님은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라고 따끔히 혼냈다. 며칠 후 부모님 초청 강의에서 국제정치 전공자인 같은 반 학생 엄마가 한 나라의 정부는 때때로 국민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트럼프 미국 정부가 괴상하다고 미국에 사는 친구마저 이상하게 여기지 않듯이 일본 보수 정부가 시대착오적 언행을 한다고 해서 한국 사람이 일본 전체를 반대하진 않는다고 알려줬다. 일본에는 한인동포가 80만명 넘게 살고 있으며 민주주의 국가라서 깨어 있는 시민단체가 많다고 했다. 이제 국가 개념은 너무 좁다고도 가르쳐줬다. 아이들이 열광하는 K팝 그룹 블랙핑크의 로제는 뉴질랜드에서 나고 자랐고 리사는 태국 출신인 점, 부모님이 좋아하는 삼성 스마트폰은 한국 기술에 미국, 일본, 대만산 부품을 가지고 베트남, 인도, 브라질 노동자가 조립해 완성한다고 일깨워줬다.
우리나라에 이민은 생존을 위한 필수라고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보편가치로 삼아야 할 날이 오고 있다. 다르다고 배척하는 건 뒤떨어졌다. 우리 역시 좁은 한반도만 벗어나면 소수가 된다. 이때 기댈 안전망은 글로벌 민주 시민의 가치다.
* 본 글은 7월 25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