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제 4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동안 트럼프에 공공연한 적개감을 내보였던 미국 언론들, 그리고 클린턴이 무난하게 당선 될 거라 예측했던 (필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선거전문가와 여론전문가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어쩌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그리고 향후 미국은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1. Rust Belt의 배신
개표 후 많은 언론에서 오하이오와 플로리다에서 졌기 때문에 클린턴이 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클린턴의 패인은 위스콘신, 펜실바니아에서의 패배, 그리고 아직도 개표가 끝나지 않은 미시간에서의 열세였다. 이 세 주는 민주당 후보로 꼭 지켜야 하는 곳들이다. 2000년과 2004년에는 아주 작은 차이로 겨우 이겼지만, 2008년과 2012년에는 꽤 여유 있게 끌어안았던 곳이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가끔 출렁이면서 박빙으로 갈 때도 있었지만 줄곧 힐러리 클린턴이 우세하게 이끌던 곳이었다. 많은 이들이 클린턴의 낙승을 예측했던 것은, 오하이오나 플로리다때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가져갈 거라 보았던 위스콘신, 펜실바니아, 미시간과 더불어 콜로라도와 네바다에서의 우세가 점쳐졌기 때문에, 오하이오와 플로리다의 도움 없이도 과반인 선거인단 270명을 넘기며 클린턴이 승리하리라 본 것이었다. 즉, 이러한 계산은 러스트 벨트에서의 완패를 계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러스트 벨트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그 다음은 뻔한 결과이다. 대통령 선거는 정당 선거이다. 막판에 가서는 정당표의 결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에는 정당 지지자들이 후보에게도 그 지지를 이어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번에도 출구조사에 따르면 90%의 공화당원이 트럼프를 찍었고, 89%의 민주당원은 클린턴을 찍었다. 자세한 투표율이 나와야 판단이 가능하겠지만, 공화당원들은 결국 맘에 들건 안 들건 트럼프로 ‘헤쳐 모여’를 했다. 여기에 둥지를 떠나 넘어간 Rust Belt 유권자들이 트럼프의 당선에 일조한 것이다. 물론 미적거리는 공화당원들이 모일 수 있게끔 FBI의 Comey 국장이 가교를 놨을 수도 있다. 트럼프를 찍기 민망한 공화당원들에게 클린턴을 찍지 않을 좋은 핑계거리를 준 셈이기도 하니까.
2. 여론 조사는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아직 답은 모른다.
위의 두 주의 경우뿐 아니라 대부분의 여론조사 결과들은 트럼프의 지지를 과소평가했다. 이 말은, 한 두 가지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조사 방법에 있어서 무언가 구조적으로 잘못된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가장 많은 추측은 Shy Trumpers를 간과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1992년 영국의 총선에서 보수당 지지자들이 따돌림 당할까 봐 “보수를 보수라 부르지 못했던” 현상을 두고 Shy Tories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트럼프를 지지하면서도 왠지 부끄러워 말 안하고 있던 이들이 표로 의사를 조용히 행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차이는 있을 지 언정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는 논의와 연구가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백인 여성 유권자층에서 이러한 현상이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것 하나만으로 저렇게 큰 차이를 낳기는 어렵다.
두 번째로 나오는 원인은 여론조사 결과의 가중치 문제이다. 많은 미국 여론 조사에서는 ‘Likely Voter’를 개념을 이용해서 가중치를 준다. 단순히 여론 조사에만 응답하고 실제로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안하여 좀 더 정확한 측정치를 내놓기 위해서이다. 기관마다 가중치를 계산하는 방법은 다른데, 개인이 이전에 투표를 했는지, 어떤 사회 인구학적 그룹에 속하는 지,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있고 투표 과정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으며, 이번에 투표에 참여할 의향이 얼마나 되는 지 등이 가중치를 계산하는 질문들로 쓰인다. 이렇게 모든 여론조사가 일관되게 틀렸다면, 가중치 계산 방법에 큰 오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예를 들어, 가중치가 낮게 지정되는 집단이 이번 선거에 특별히 트럼프를 지지하기 위해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에 트럼프 지지율이 낮게 잡혔을 수도 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려면 꽤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의 실제 투표율도 함께 나와야 정확한 원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이 듀이를 이겼던 선거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 선거 결과는 여론 조사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은 분명해 보인다.
3. Quo Vadis, USA
앞서 언급한대로, 러스트 벨트에서의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는 뼈아팠다. 그런데 이것이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였던 블루컬러 노동자 계층과 유대감을 갖지 못한 클린턴 개인에게 국한되는 단발성 표심 이반인지, 아니면 결국엔 정당재편으로까지 이어질 것인 지가 앞으로의 관심사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스럽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마음에는 민주당을 품고 그에게 표를 준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아예 공화당으로 둥지를 옮겨가기 시작한 것인지 아직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만 상원의원 선거 결과를 함께 놓고 봤을 때, 만만치 않은 반자유무역주의자인 위스콘신의 파인골드 민주당 후보가 패배한 것이나, 펜실바니아에서 맥긴티 민주당 후보가 패배한 것은 예의 주시할 만 하다.
만일 민주당 표가 공화당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라면 민주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당장 출구조사만 보아도, 고학력 유색인종과 젊은 연령층의 민주당 쏠림은 확연했다. 그 옛날 뉴딜 동맹의 기억을 붙들고 민주당 연합을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다양성과 진보가치를 추구하는 엘리트 정당으로 재편할 것인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공화당도 마찬가지이다. 트럼프가 넝쿨째 안고 온 새 유권자 그룹을 이 참에 아예 끌어 안을 것인가. 그렇잖아도 인종구성이 바뀐다며 앞으로는 민주당에 유리한 정치지형이 만들어질 거란 흉흉한 소문에 어지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을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의 공화당 가치나 주장과는 다른 방향으로의 선회가 불가피하다. 거의 멸종상태라 여겨지는 전통 보수 유권자, 티파티 성향의 도덕적 보수 유권자에 이어, 저학력 저소득 백인 노동자 그룹까지 과연 함께 불편한 동거를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미국은 백인의 나라였다는 점이다. White Coalition의 힘을여실히 보았다. 이번 선거를 통해 미국의 백인 유권자는 자신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그들의 나라임을 증명했다. 전체 인구의 62%라 하지만, 여전히 유권자 비율로는 70%에 가까운 이들이다. 히스패닉 표심이 좌우한다 어쩐다 했지만, 결국 마지막 도장을 찍는 것은 백인 유권자였다. 이 사실을 트럼프라는 후보를 통해 확인했을 때, 미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색인종 집단이 셋방살이의 설움을 떠올렸을 것 같아 왠지 짠하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미국 대통령 선거는 결국 예사롭지 않은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다. 선거기간 내내 뚜렷한 무역 문제 외에는 외교정책을 설파하지 않았던 트럼프의 당선으로 인해, 각 국은 과연 자국에 어떤 영향이 있을 지 그의 의중을 읽고 분석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그를 지지한 사람들은 썩은 워싱턴 정가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 기뻐하고 있다. 아웃사이더로 워싱턴을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트럼프는 과연 의회권력, 그리고 촘촘히 얽혀 있는 워싱턴 관료조직을 맞상대하며 그를 찍어준 백인 유권자들이 꿈꾸는 미국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트럼프의 미국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 본 글의 내용은 연구진들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