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근래 이뤄지고 있는 세계질서 재편은 다양한 양상과 특성을 지니고 진행되고 있고, 주요국 간 경쟁 속에 드러나고 있는 여러 편린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신(新)냉전(New Cold War)’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혼란(Chaos) 그 자체로 보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공급망 안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탈동조화(decoupling)’ 또는 ‘탈위험화(de-risking)’란 용어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2000년대 이후 국제질서는 다양한 특성이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으며, 그 미래를 예측하기 매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시각에서 현대 국제관계를 바라보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주요국(dominant power)들의 자국 이기주의와 일방주의 강화, 그리고 국제기구의 형해화 등일 것입니다. 이 특성들을 체계적 분석을 통해 설명하는 일은 현 상황의 평가와 미래 예측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그 방향과 속성을 쉽게 가늠하기 힘든 국제질서의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 2015년부터 “아산 국제정세 전망” 보고서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를 설정했습니다. 전략적 불신(2015), 뉴노멀(2016), 리셋(2017), 비(非)자유주의 국제질서(2018), 한국의 선택(2019), 신(新)지정학(2020), 혼돈의 시대(2021), 재건(2022), 복합경쟁(2023)이 지금까지 연구원이 다뤘던 주제들입니다. 이 주제들은 서로 다른 키워드를 내세웠지만, 변화하는 국제질서의 모습과 그 함축성, 그리고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각 국가와 지역의 정세를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려는 고심을 담고 있습니다.
올해 주제로 선정된 ‘연대결성(Coalition Building)’도 이 고려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들은 모두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유지 혹은 창출을 시도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동맹 및 우방국들과 ‘연대’를 결성함으로써 경쟁국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연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NATO와 인도-태평양 동맹국들의 협력과 같이 기존 동맹국 및 우방국들을 지역적으로 연계시키거나, 쿼드(QUAD), 한-미-일 안보협력 등 소다자협력체를 창설하거나,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와 같이 경제 규범과 일정 자격을 강조하는 플랫폼 형태의 경제협력체를 주도하는 등 여러 시도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자신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식 새로운 규칙과 기준에 입각한 연대를 추구하고 있고, ‘미국 우선주의’가 만들어낸 국제질서 공백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역시 구(舊)소련 시절 연방에 속해 있었던 국가들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하는 한편, ‘유라시아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지분을 가지는 다극적 국제질서 창출을 시도하면서 나름의 연대를 모색하는 상황입니다. 자기 중심의 연대결성을 추구하는 주요국 간 경쟁은 2023년에 들어 외형적으로는 숨 고르기를 하는 듯 보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2024년에도 이 추세는 뚜렷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민주주의 대(對) 권위주의’ 가치대립 구도가 극단화되지 않도록 조 정하면서도 자신들 중심의 연대를 심화하고, 확장하기 위해 경쟁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미-일과 북-중-러라는 동북아 지역 연대 각축이 더 부각될 수 있고,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 대한 경쟁적 구애도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요국들은 연대 속에서 자신들의 지도력 약화 문제에 고심할 것이고, 때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대 속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겪게 될 것입니다. 기존에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던 사이버, 기후변화 등 신흥안보 분야 협력 전망은 더 어두워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북한이 북러 밀착을 기초로 한반도 및 지역 그리고 세계 질서 차원에서 위협을 가중시킬 위험도 배제할 수 없음도 고려해야 합니다.
2024년 전략정세는 다양한 의문과 고민을 우리에게 제기합니다. 우리나라가 위치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도 수많은 전략적 계산이 서로 뒤얽히거나 충돌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를 활용해 우리에 대한 핵 위협을 더 높이려 할 북한, 한중 경제관계를 바탕으로 한국의 미국 중심 연대에 대한 참여를 견제하려는 중국, 그리고 한국의 지역적이고 세계적 역할 확대를 바라는 미국의 구상 등이 맞물려 우리의 안보 여건은 더 복잡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2024년 전략정세를 전망하고, 그 속에서 우리나라는 과연 어떠한 통찰력을 가지고,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기 위한 우리 연구원 차원의 노력의 집약입니다. 이 보고서가 2024년 한반도 및 지역, 그리고 국제질서에 대한 분석을 활성화하는 값진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끝으로 보고서 발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연구원 내부 및 외부의 저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윤영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