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초 일련의 연말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그리고 연이어 개최된 G20 회의와 아태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정상회의가 막을 내렸다. 11월 8일부터 시작해 19일까지 아세안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와 G20, APEC 정상회의가 연이어 동남아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매년 아세안이 주관하는 하반기 아세안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 EAS는 한자리에서 잇따라 개최되었고, 한 해의 지역 다자외교를 마감하는 역할을 해왔다.1
올해는 아세안 의장국인 캄보디아에서 이 세 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우연히 G20 정상회의를 인도네시아가, 그리고 APEC 정상회의를 태국이 유치하게 되어 중요한 5개의 지역 및 글로벌 차원 정상회의가 한꺼번에 10일의 연속 일정으로 동남아에서 개최되었다. 올해 아세안 지역 정상회의는 COVID-19 직전이었던 2019년 말 회의 이후 3년 만에 처음 대면으로 개최되는 회의였다. 2020년, 2021년 정상회의는 화상회의로 개최된 바 있다. 그 사이 한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정상이 교체되었다.
이 글에서는 3년 만에 다시 대면으로 열린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의 내용을 정리하려 한다. 먼저 아세안 정상회의 등에 나타난 아세안의 내부 동학과 아세안의 정세 인식 등을 살펴본다. 이후 지역 정상회의에서 가장 주목이 되는 동남아 국가와 아세안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이번 연말 정상회의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미국과 중국이 서로에 대해서 한 발언보다 아세안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지다. 마지막으로 이번 정상회의에서 대강이 발표된 한국의 인태 전략과 대아세안 정책의 방향을 언급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할 것이다.
미얀마 문제와 아세안 분리하기?
2022년 아세안정상회의는 예년과 달리 두 번의 정상회의를 11월에 몰아서 개최했다. 아세안은 매년 두 번의 정상회의를 개최하는데 전반기에는 4월 경에, 후반기에는 아세안+3, EAS와 함께 10월 혹은 11월에 개최하고는 했다. 캄보디아가 의장국인 올해는 11월에 제40차, 41차 정상회의를 한번에 개최하는 다소 기형적인 형태로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올해 아세안정상회의에서 가장 중요했던 이슈는 아세안의 단결, 아세안중심성 약화,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미얀마의 정치상황 이슈다.
미얀마는 2011년 군부 통치하에서 정치개혁을 시작한 후 2015년 총선을 거쳐 민간정부로 권력이 이양되었다.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미얀마 민간 정부는 그 이후 미얀마 정치 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아세안도 회원국 중 가장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이런 미얀마의 정치적 자유화, 민주화 이행을 적극 반겼다. 1997년 미얀마의 회원국 포함, 2006년 미얀마의 의장국 수임 차례를 놓고 겪었던 국제사회의 비난, 아세안 내부의 내홍을 이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2021년 2월 미얀마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쏟아지는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 아세안도 미얀마 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응을 했다. 2021년 임시 아세안 정상회동에서 미얀마를 제외한 나머지 9개국은 미얀마 군부에 대해 5개항의 조건을 내걸었다.2
2022년 아세안정상회의에서는 미얀마에 대한 아세안의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2021년 만들어진 미얀마에 대한 5개항 합의에 대한 지지를 다시 선언했다. 단순히 이를 재천명한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세안 정상들은 미얀마에 대한 5개항 합의를 이행할 구체적인 계획과 시간표를 작성하라고 외교장관들에게 지시했다. 또한 아세안 정상들은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미얀마의 아세안 관련회의 참가 금지를 유지했다. 20 21년 하반기 아세안정상회의부터 적용된 이 조치는 아세안 관련 회의에 참여하는 미얀마 대표의 경우 “비정치적” 대표 혹은 관료의 참가 만을 허용하고 군부와 연관된 사람의 참가를 금지하는 것이었다.3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미얀마 국기만 테이블에 놓였을 뿐 의자는 빈 채로 남아 있었다.
한편 아세안 정상들은 아세안이 미얀마 문제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함께 강조했다. 예를 들어 2023년 아세안의장국을 맡을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Joko Widodo) 대통령은 “미얀마의 상황이 아세안을 규정하게 놔둬서는 안된다”라고 했고,4 싱가포르의 리셴룽(Lee Hsien Loong) 총리는 “[미얀마의] 악화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우리 입장을 완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금 입장을 견지한다고 해도 상황의 엄중함을 다 대변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발언하면서도 그렇다고 “지체해서는 안되며 한 회원국이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된다”고 했다.5 미얀마 문제는 미얀마 문제고 그와 별개로 아세안의 협력을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얀마 문제가 아세안 전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합의, 아세안의 단합(ASEAN Unity)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합의라고 볼 수 있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성공
두 번째로 흥미로운 사항은 동티모르의 가입이 “원칙적(in principle)”으로 승인되었다는 점이다.6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서 2002년에 독립했고 그 후로 계속 아세안 가입을 준비했다. 초기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은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불편한 관계로 좌절되었다. 2011년 처음 공식 가입 신청을 한 후 10년이 넘어 이번에 원칙적으로 가입이 승인된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문제에서 인도네시아의 반대는 누그러졌지만 경제적으로 취약한 동티모르의 가입에 따라 역내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기존 회원국의 우려가 있었다. 이번 결정으로 동티모르는 아세안의 옵저버(observer)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정상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세안은 동티모르가 회원국 자격을 가지는가에 관해 검증을 거친 후 정식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동티모르가 회원국 자격을 갖추기 위해 아세안 국가들의 능력 배양 프로그램이 제공될 예정이다.
2023년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리더십: 헤징 전략의 강화
두 번의 연속된 정상회의를 끝으로 2022년 캄보디아 의장국 역할이 막을 내렸다. 당초 2022년 캄보디아의 아세안 의장국 역할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중국에 상당히 의존적인 캄보디아의 의장국 역할이 내부 분열을 더 크게 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망과 달리 캄보디아의 아세안 의장국 역할은 상당히 균형을 잡았다는 평가를 할 수 있고 전반적으로 아세안 회원국의 의사를 골고루 반영해 무난한 한 해를 보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7
2023년에는 인도네시아가 아세안 의장국을 맡는다. 인도네시아는 2022년 아세안의 과제 즉, 아세안 내부 단결의 확보, 미얀마 문제의 처리, 대외적으로 아세안 중심성의 강화와 같은 문제를 그대로 떠안았다. 캄보디아의 무난한 2022 의장국 역할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한두 해 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포함해 2023년 인도네시아 역할이 주목된다. 역내에서 가장 크기가 큰 국가이고 아세안을 만든 회원국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는 역대 아세안 의장국을 맡을 때마다 중요한 아세안의 진전을 가져온 결정과 합의를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8
이미 몇 가지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발언과 마르수디(Retno Marsudi) 외교장관의 발언을 통해 2023년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운영의 방향성을 엿볼 수 있다.9 이전 정상회의에서 조코위 대통령은 2023년 아세안의 슬로건인 “ASEAN Matters: Epicentrum of Growth”를 공개했다.10 아세안을 성장의 핵심, 원천으로 규정한 이 슬로건만 놓고 보면 아세안의 2023년 핵심 가치는 성장에 놓여 있는 듯하다. 물론 COVID-19의 영향을 벗어나 디지털 전환을 통해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는 아세안 지역에 어울리는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뒤집어 보면 강대국 경쟁과 미국발 이자율 상승, 보호무역주의 등 다양한 위기 앞에 아세안의 경제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제성장에 대한 의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강대국 경쟁 사이에 끼인 아세안을 2023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여기에 대한 암시도 이미 나와 있다. 조코위 대통령은 2022년 인도네시아가 의장국을 맡은 G20 정상회의 발언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조각으로 분열시켜서는 안된다…세계를 또 다른 냉전으로 빠뜨려서는 안된다”고 했다.11 이보다 며칠 전에 있었던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조코위의 발언은 보다 직설적이다. 여기서 조코위 대통령은 “아세안은 평화의 지역이 되어야 하고, 글로벌 안정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꾸준히 국제법을 견지해야 하고, 어떤 특정 강대국의 대리인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12 인도네시아의 적극적이고 독립적(aktif dan bebas, active and independent)인 외교전통을 상기시키는 발언이다.
강대국 전략경쟁으로 지역 질서가 불안정해지고, 지역 국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강대국 경쟁이 아세안을 놓고 펼쳐지는 가운데, 조코위는 아세안이 어느 특정 강대국을 지지해 그 편으로 편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코위의 발언은 동남아 국가들이 강대국 경쟁에서 취하고 있는 중립적 입장 혹은 헤징 전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강대국 경쟁의 구도 속에 약소국 모임이자 양쪽 강대국으로 구애를 받고 있는 아세안 국가는 강대국 힘이 균형을 이룬 틈바구니에서 양쪽에 일정한 레버리지를 행사하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 즉 헤징 전략을 취해왔다. 인도네시아가 이끄는 2023년 아세안은 강대국 경쟁 사이에서 헤징 전략을 더욱 강력하게 실시하는 동시에 경쟁하는 강대국에 대한 독립적 발언, 비판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세안을 둘러싼 미중 경쟁: 안보의 미국, 경제의 중국
매년 열리는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는 미국이 EAS에 가입한 이후부터 미국과 중국이 아세안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을 벌이는 장이 되었다. 이런 양상이 올해도 반복되었다. 미국과 중국 모두 이번 정상회의를 맞이하며 남다른 중요성을 부여할 만한 계기가 있었다. 모든 정상들에게 이번 정상회의는 COVID-19 이후 첫 대면 정상회의였다. 더욱이 미국의 경우 2017년 이후 처음으로 정상이 제대로 참여하는 회의였다. 2016년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EAS에 참여한 이후 미국 정상이 대면으로 EAS에 참여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 시기인 2017년부터 미국 정상은 EAS에 참여하지 않았다. 2021년 집권한 바이든 대통령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정상회의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상황은 중국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COVID-19로 인해 2020, 2021년 모두 온라인 정상회의만 개최되어 화상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시진핑(习近平, Xi Jinping) 주석은 이번 정상회의를 앞두고 3연임에 성공해 국내 입지를 다진 후이고 이런 여세를 몰아 동남아 방면에서 잃어버린 입지를 회복하고자 했다.13 특히 COVID-19 이후 초기 방역, 백신 외교에서 나름 우위를 가졌던 중국은 미국의 공세 앞에 점차 동남아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2022년 국내적으로 당대회를 앞두고 제로코로나(zero-Covid) 정책을 실시한 중국의 대외활동도 줄어들었다. 고위급의 동남아 방문도 잦아들었고, 중국이 앞세운 일대일로를 통한 동남아 경제 지원도 마찬가지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2년 만에 다시 열린 대면회의를 통해 동남아에서 입지를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미국과 중국은 자신의 장점을 살린 전략을 가지고 동남아 국가에 접근했다. 미국은 남중국해 문제를 적극 부각시켰다. 미국은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에 오기 전에 이미 몇몇 중요한 행동을 취했다. 5월 미-아세안 정상회의를 개최해 동남아 지역에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인프라, 안보, 팬데믹 관련 협력을 제안했다.14 이어 동남아 7개국을 미국 주도의 경제 이니셔티브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IPEF)에 끌어넣는 데 성공했다.15 이런 여세를 몰아 이번 일련의 정상회의 중에 열린 미-아세안 정상회의 계기에 미국과 아세안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반자(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 CSP)로 격상했다.16 이미 중국과 호주는 2021년 기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2022년에는 미국과 인도가 아세안과 포괄적 전략동반자 협정에 서명했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직접 행동은 정상회의가 아닌 정상회의 직후에 나왔다. 이번 일련의 정상회의는 11월 18~19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까지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방콕 APEC 정상회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정상회의가 끝난 직후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부통령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해리스 부통령은 APEC 정상회의 직후 필리핀을 방문했다. 중국과 필리핀의 해양 영토 주장이 충돌하는 남중국해 팔라완(Palawan) 섬을 방문한 해리스 부통령은 연설을 통해 201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내린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미국과 국제사회는 이 지역의 미래에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 후 “동맹으로서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위협과 억압에 맞서 필리핀과 함께 한다”라고 못박았다.17
이 즈음해서 미국이 필리핀 수빅만(Subic Bay)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뉴스도 함께 흘러 나왔다. 미국은 냉전이 끝나면서 1992년 필리핀 수빅만에서 철수했다.18 이는 탈냉전 시기 미국이 동남아에서 발을 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미국과 필리핀간 방위협력확대협정(Enhanced Defence Cooperation Agreement, EDCA)에 근거해 미국은 향후 필리핀에 추가로 5개 소의 군사 시설과 화력배치를 계획하고 있다.19 이 계획에서 미국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수빅만이 유력한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빅만에 미국이 돌아오는 것은 미국의 대 동남아 군사적 관여 확대의 상징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 또한 남중국해 문제 관련해서 미국이 중국의 남중국해 활동에 대해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공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도 된다. 두테르테(Duterte) 정부에 이어 등장한 마르코스(Marcos) 정부의 친미적 태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동맹으로 필리핀에 전략적 확신을 줄 수도 있는 방안이다.
미국이 안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면 중국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일대일로와 경제 지원을 꺼내들었다. 시진핑 주석은 G20과 APEC에 참가했고,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인 아세안+3, EAS에 참여한 것은 리커창(李克强, Li Keqiang) 총리였다. 리커창 총리는 회의 참석 차 방문한 캄보디아에서 아세안 의장국인 캄보디아에 선물 보따리를 안겼다. 캄보디아 언론 보도에 따르면 리 총리의 방문을 계기로 캄보디아와 중국은 인프라 건설, 차관도입, 농산물 무역, 농촌개발 프로젝트, 청년교류, 과학기술 교류, 동물 백신, 범죄협정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18개의 상호협정에 서명했다.20 여기에 추가로 중국은 캄보디아에 2천 7백만 달러에 달하는 추가 경제 지원 패키지를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리커창 총리는 중국의 지원으로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Phnom Penh)과 남부의 시하누크빌(Sihanoukville)을 잇는 총 연장 190km에 달하는 고속철도 사업의 착공식에도 참여했다.21
G20과 APEC에 참가한 시진핑 주석은 리커창 총리와 달리 구체적인 경제 지원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G20에 참여해 올해 G20을 개최한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재확인했다.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은 3연임을 확인한 당대회 이후 처음 해외방문을 한 국가가 인도네시아라는 점을 들며 “이것이 두 국가 외교정책에서 중-인도네시아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또한 시진핑 주석은 “경쟁력 있는 인도네시아 상품이 더 많이 중국에 들어오도록 하고 중국의 뛰어난 기업들이 인도네시아 인프라 건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디지털 경제와 녹색성장 등 부문에서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22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디지털 경제 부문이다. 코로나 국면 이후 동남아에서도 디지털 경제가 크게 확대되었고 아세안 차원에서 디지털 전환을 코로나 이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기존 인프라 건설뿐만 아니라 동남아의 디지털 분야를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미리 선보인 한국의 인태 전략과 아세안 전략
이번 일련의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는 한국의 입장에서도 제법 의미가 있는 정상회의였다. 한국의 신정부가 처음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지역 다자외교 무대에 데뷔하는 계기였다. 지난 5월 출범한 신정부는 2022년 연말까지 한국의 독자적 인태 전략과 대아세안 전략을 발표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연말에 있을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자리에서 인태 전략과 아세안 전략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한국에서 새로운 정부가 등장할 것이고 그에 따라 지난 정부에서 실시했던 신남방정책이 지속될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 2021년 하반기부터 아세안 국가들로부터 꾸준하게 제기되던 터였다. 신남방정책이라는 브랜드가 5년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아세안 국가에게 크게 각인된 만큼 당연한 질문이었다.
이런 예상에 맞추어 한국 정부는 인태 전략과 대아세안 전략을 이번 정상회의 계기에 선보였다. 이번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에서 한국 정부는 “포용, 신뢰, 호혜”라는 3대 기조에 맞춘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인도-태평양” 비전을 제시했다.23 미국, 일본의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비전과 일정한 차별성을 제목에서 가지려 노력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 자유는 그대로 유지하되 지역의 개발도상국들이 보다 관심있을 만한 ‘번영’을, 그리고 미-중 갈등 속에 한국의 포지셔닝을 위해 ‘평화’를 넣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이런 인태 전략 구상이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가지지 못했던 지역에 관한 관점과 전략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슬로건에 덧붙여 정상의 발언을 통해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덧붙여졌다.24 중국에 의한 일방적인 지역질서의 변경 혹은 작은 국가에 대한 위협을 견제하는 동시에 미국 등 기존 인태 전략을 채용한 국가와 보조를 맞추는 방향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인태 전략의 전반에 걸쳐 가치와 원칙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정권 초기부터 미국과 동맹을 강조했던 현 정부의 대외전략과 인태 전략이 미국 주도의 지역질서 내에서 움직인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번영에 대한 강조는 공급망의 안정, 경제안보를 위한 역내 국가와의 협력 강화라는 설명을 통해 미국의 인태 전략, 보다 구체적으로는 IPEF와 보조를 같이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편, 이런 미국과의 공조가 지역에 어떻게 받아들여 질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흔적도 보인다. 미국과 함께 가는 한국의 인태 전략이라는 인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미중 사이에서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아세안의 전략적 방향, 즉 “중립성이 강한 아세안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관점(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AOIP)을 확고하게 지지”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25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인태 전략이 전반적으로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과 공조를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중국에 대한 경계를 드러냈다는 평가에 대해서 가치에 대한 강조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를 배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라는 설명도 덧붙여 한국의 인태 전략이 중국을 경계하는 내용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26
한국 정부는 아세안 국가에 대해서 신남방정책을 대체하는 한-아세안 연대구상(Korea-ASEAN Solidarity Initiative, KASI)을 제시했다. KASI는 인태 전략이라는 지역 전반에 대한 구상하에 아세안 방면에 대해서 어떻게 협력을 전개할 것인가를 담았다. KASI는 신남방정책이 동남아에서 몇몇 국가에 집중되고, 경제협력에 집중되었다는 자체 평가를 바탕으로 동남아 10개 국가로 골고루 협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경제협력을 넘어 안보와 전략 분야 협력을 강화하려는 구상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신남방정책과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신남방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새로운 프레임워크라는 점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신정부는 KASI하에서 아세안과 협력하는 데 있어 중요한 아이디어 몇 가지를 이번 정상회의에서 제시했다. 우선 정부는 기존 2천 4백만 달러에 달하는 한-아세안협력기금의 규모를 2027년까지 두 배인 4천 8백만 달러까지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국방, 안보, 전략적 협력 강화를 위해 한-아세안 정부 간 전략 대화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2024년까지 다른 주요 국가들이 아세안과 맺은 포괄적 협력동반자 관계 형성을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추가로 국방분야에서 신남방정책에서부터 추진되어 온 한-아세안 국방장관회의를 정례화하겠다는 의제도 포함되었다. 경제 부문에서는 한-아세안 자유무역협정을 상황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디지털 무역으로까지 확장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아세안의 신성장동력 확보는 물론이고 한국의 공급망 안정과도 관련된 전기차, 배터리 등의 분야에서 필요한 소재의 확보 및 현지 생산을 통한 기술 전수도 포함되었다.27
한국의 인태 전략이나 대아세안 전략으로 제시된 KASI 모두 아직은 구체적인 사항을 좀 결여하고 있다. 지금의 대강으로 일단 한국의 목소리를 기대하는 인태 국가나 아세안의 일차적 호기심은 맞추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있을 인태 전략, 한국의 대아세안 전략의 구체안 발표는 종합적일 필요가 있으며 주어진 전략 상황을 고려해 신중하게 방향을 정해야 한다. 특히 아세안에 대한 메시지에서는 한국의 대아세안 협력 의지가 정책의 이름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다는 내용을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미중 사이 균형 전략을 택하는 아세안의 전략적 태도를 감안해 적어도 아세안 정책에 관한 인태지역에서 한미 간 전략적 협력을 대아세안 정책에 크게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일련의 아세안 관련 연말 정상회의는 크게 세 가지 회의로 구성된다. 먼저 연 2회 개최되는 동남아 지역 10개국의 아세안 정상회의가 있다. 이 회의를 계기로 아세안이 모인 자리에 아세안+3 정상회의가 함께 개최된다. 아세안+3 정상회의는 아세안 10개국에 한국, 일본, 중국의 동북아 3개국을 더한 형태로 1997년 첫 비공식회의 시작 이후 1998년부터 정례화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정상회의까지 한꺼번에 개최된다. 동아시아정상회의는 2005년부터 시작되어 기존 아세안+3 국가 외에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추가된 형태로 진행되다가 2010년 가입이 된 미국과 러시아가 2011년 부터 참여해 아세안+8의 형태가 되었다.
- 2. ASEAN. 2021. “Chairman’s Statement on the ASEAN Leaders’ Meeting, 24 April 2021 and Five-Point Consensus.” April 24 (https://asean.org/wp-content/uploads/Chairmans-Statement-on-ALM-Five-Point-Consensus-24-April-2021-FINAL-a-1.pdf). 이 5개항 합의 내용은 1) 미얀마 군부와 반대파 양측 모두의 폭력 중단과 자제, 2)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관련 세력의 건설적 대화, 3) 아세안 특사 파견과 아세안 특사의 대화 중재, 4) 아세안 인도적 지원 센터(ASEAN Humanitarian Assistance Centre, AHA Centre)를 통한 인도적 지원 제공, 5) 아세안 특사와 대표단의 미얀마 방문 및 관련 세력과 대화 등이다.
- 3. Dewey Sim. 2022. “Asean ‘deeply disappointed’ with Myanmar over peace plan, Indonesia’s Jokowi wants junta banned from summits.” South China Morning Post. November 11.
- 4. Ibid.
- 5. Tan Hui Yee. 2022. “Asean to review Myanmar representation at meetings, develop concrete steps for peace plan.” The Strait Times. November 11.
- 6. Hariz Baharudin. 2022. “Timor-Leste to be admitted to Asean in principle, can participate in all meetings.” The Strait Times. November 11.
- 7. 캄보디아는 2022년 의장국을 수임한 초기 미얀마 군부와 대화를 시도하는 등 아세안 국가의 일반적인 정서와 다르게 독자 노선을 가는 듯했다. 이런 독자적인 움직임에 대한 다른 국가의 반발이 있은 이후 비교적 아세안 내부의 합의를 만들고 이에 기반해 아세안을 운영하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미중 등 강대국 관련된 사항에서도 비록 기계적 중립이기는 하지만 IPEF에는 참여하지 않고 미국이 주도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UN 결의안에는 찬성표를 던지는 등 중립을 지키려는 모습도 보였다. 무엇보다 2019년 이후 처음 대면으로 치러진 아세안, 아세안+3, EAS를 큰 탈 없이 치러낸 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 8. 인도네시아의 이런 주도적 역할은 세 번의 발리 합의(Bali Concords)에 나타난다. 1976년의 Bali Concord I은 아세안의 기본 운영원칙을 만들고, 아세안 사무국 창설을 가져왔다. 2003년 Bali Concord II는 아세안공동체(ASEAN Community)의 청사진을 정치안보공동체, 경제공동체, 사회문화공동체 등 세 부문에 걸쳐 제시했다. 2011년 Bali Concord III은 글로벌 차원에서 아세안의 역할과 아세안중심성을 천명했다.
- 9. 2023년 아세안 의장국 수임을 맞아 인도네시아 외교장관 마르수디는 유엔에서 한 연설을 통해 “인태 지역 질서 형성에 있어서 아세안중심성 강화가 인도네시아의 목표”라는 것을 밝혔다. 나아가 마르수디는 “[지역 아키텍처를 봉쇄와 따돌림의 도구로 쓰는 행태]가 오늘날도 소다자 협력에서 지속되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강대국 간 경쟁에서 대리자가 되었다. 지역 아키텍처가 이래서는 안된다…[아세안]은 신냉전 상황에서 [강대국]의 노리개가 되기를 거부한다. 반대로 아세안은 모든 국가와 적극적인 협력의 패러다임을 추구할 것이다”라고 했다. Antara News Agency. “Collaboration paradigm to guide RI’s ASEAN chairmanship: Marsudi.” Antara News Agency. September 27.
- 10. Hariz Baharudin. 2022. “Asean must become peaceful region and not be proxy for any powers: Jokowi.” The Strait Times. November 13.
- 11. Resty Woro Yuniar. 2022. “Indonesia’s Jokowi tells G20 ‘it cannot fail’ as ‘another cold war’ looms in a world divided.” The Strait Times. November 15.
- 12. Hariz Baharudin. 2022. “Asean must become peaceful region and not be proxy for any powers: Jokowi.” The Strait Times. November 13.
- 13. Richard Heydarian. 2022. “How China can reset its ‘peripheral diplomacy’ to win over Southeast Asia.” South China Morning Post. November 10.
- 14. Maria Siow. 2022. “Biden eyes boosting US-Asean ties, countering China’s influence in first post-pandemic ‘summit season’.” South China Morning Post. November 9.
- 15. 동남아 국가 중에서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그리고 브루나이가 IPEF 협상 참여를 선언했다.
- 16. U.S. MISSION TO ASEAN. 2022. “FACT SHEET: PRESIDENT BIDEN AND ASEAN LEADERS LAUNCH THE U.S.-ASEAN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 U.S. MISSION TO ASEAN. November 12 (https://asean.usmission.gov/fact-sheet-president-biden-and-asean-leaders-launch-the-u-s-asean-comprehensive-strategic-partnership/).
- 17. Agence France-Presse. 2022. “South China Sea: Kamala Harris vows US-Philippines will stand together ‘in the face of intimidation and coercion’.” South China Morning Post. November 22.
- 18. 미군의 수빅만 철수는 단순히 미국의 철수라고 보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수빅만 기지와 같이 운영되던 클라크(Clark) 공군기지와 수빅만 기지가 화산 폭발로 손상을 입으면서 잠정 폐쇄되었던 연장선상에 있다. 수빅만 기지는 다시 가동을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기지 임차료를 둘러싸고 필리핀 상원과 미국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냉전이 끝난 시점에서 필리핀도 적은 임대료로 수빅만을 내주기 싫었고, 미국 역시 임대료를 올려주면서까지 필리핀에 주둔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이해 관계로 인해 필리핀 상원은 미국의 수빅만 사용을 거절했고, 미국 역시 미련 없이 수빅만에서 떠났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재현. 2020. “필리핀-미국 방문군협정(VFA) 폐기: 양자 군사동맹에 대한 함의와 미래.”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No. 2020-06 참조.
- 19. Ibid.
- 20. Fresh News. 2022. “Cambodia, China Sign 18 Bilateral Cooperative Documents.” Fresh News. November 9.
- 21. Maria Siow. 2022. “Why Biden’s latest Asean overtures won’t weaken Cambodia’s China embrace.” South China Morning Post. November 11.
- 22. Amber Wang. 2022. “G20: China and Indonesia to strengthen ‘strategic coordination’ in Southeast Asia.” South China Morning Post. November 17.
- 23. 김지현. 2022. “尹 ‘한국판 인태 전략’, 美와 보조 맞추며 文정부 신남방정책 차별화.” 한국일보. 11월 12일.
- 24. Ibid.
- 25. Ibid.
- 26. 김남균. 2022. “대통령실 “인태 전략, 최초의 포괄적 지역 전략” …중국 겨냥 해석엔 거듭 선그어.” 서울경제. 11월 13일.
- 27. 대통령실. 2022. “제23차 한-아세안 정상회의 결과.” 11월 11일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908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