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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순 미국이 시리아 병력 철수를 발표한 지 사흘 만에 터키군이 시리아 쿠르드계 민병대 인민수비대(YPG)를 공격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를 마친 뒤 터키군은 시리아 북동부의 YPG 거점 도시들을 기습 점령했다. 터키는 YPG를 자국 내 분리주의 테러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분파로 본다. 시리아 쿠르드계를 쫓아낸 지역에 안전지대를 설치한 뒤 터키에 정착한 시리아 난민 360만여 명 가운데 100만명 이상을 이주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시리아 YPG는 미국 주도의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IS 격퇴전에서 핵심 지상군으로 활약했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에 맞선 반군 연합인 시리아민주군(SDF)의 주축이기도 하다. 내전 발발 직후 전국의 정부군이 수도 다마스쿠스로 집결하자 북동부의 쿠르드계는 민병대를 조직해 자치를 누려왔다. 2014년 ISIS의 급부상 이후 시리아 내전이 정부군-반군-ISIS의 3파전으로 변하자 YPG는 반ISIS 국제연합전선의 전투병으로 싸웠고 1만여 명이 사망했다. 미국과 여타 30여 국제연합전선 소속 국가의 역할은 공습 지원과 무기·훈련 제공에 그쳤다.

터키의 이번 공격으로 시리아 쿠르드계 500여 명이 사망했고 30만여 명이 피난길에 나섰다. 이 와중에 YPG가 구금시설에서 관리하던 ISIS 포로 1000여 명이 탈출하기도 했다. 미군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YPG 사령관은 러시아와 시리아에 도움을 구했다. 도움을 주지 않는 미국에 다른 대안이나마 허용해 달라고 요구한 뒤였다.

터키의 쿠르드 학살을 방조한 미국과 달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알아사드 시리아 정권은 즉각 화답했다. 터키군에 맞선다는 명목하에 시리아 정부군은 7년여 만에 처음으로 북동부 지역에 들어왔고 러시아군은 미군이 남기고 간 기지들을 접수했다. 러시아는 중재력도 발휘했다. 푸틴 대통령은 에르도안 대통령과 소치에서 만나 안전지대의 러시아·터키 공동관리와 나머지 국경지대의 시리아 관리에 합의했다. YPG는 자치권 포기와 미군이 제공한 무기 반납을 공식화했고 쿠르드인은 떠나는 미군 탱크를 향해 토마토와 감자를 던졌다. 민주국가가 토사구팽한 시리아 쿠르드계를 비민주국가가 거둬준 순간이었다.

민주평화론에 따르면 민주주의 체제는 전쟁에서 높은 승률을 자랑하며 평화를 도모한다. 유권자의 여론, 견제와 균형 제도 때문에 오랜 논의와 검증을 거쳐 도덕적 우위와 승리의 확신이 섰을 경우 참전을 결정한다. 따라서 민주국가는 독재자와 소수 엘리트의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참전하는 독재국가보다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다. 그리고 민주국가끼리 전쟁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민주평화론이 중동에서는 이상하게 작동한다. 물론 중동에는 민주국가가 별로 없다. 대신 중동 여러 나라의 동맹·우방국이 민주 대 비민주 국가로 갈린다. 그런데 민주국가를 동맹·우방으로 두면 쓸모가 없어졌다고 버림받는다. 현 미국 대통령은 자국 우선주의 슬로건하에 동맹의 중요도는 지불능력 순이라고 큰소리친다.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미국이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러시아의 발 빠른 주도로 군사적·외교적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은 대터키 무기금수와 제재를 발표했으나 터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NATO 회원국인 터키의 시리아 침공과 러시아의 밀착 행보에 전통적 친미국가인 카타르가 공식 지지를 발표했다. 카타르에는 미군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미 중부사령부 현지 본부가 있다. 터키와 카타르는 미국과 날 선 대결을 벌이는 이란과도 부쩍 가까워졌다.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민주국가는 중동에서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 본 글은 11월 19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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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