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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도안, 이념적으로 상충되는 민족주의·신오스만주의·유라시아주의 추구
⊙ 건국 초기에는 친서구-중립 정책, 냉전 시기에는 한국전쟁 참전 후 나토 가입
⊙ 에르도안, 집권 초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시리아 내전, 이란 핵 합의 등에서 중재자로 활약
⊙ 튀르키예, 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최근 러시아의 S-400 방공 시스템 도입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정부가 영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그리스 등 연합군의 영토 분할에 속수무책이자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연합군은 케말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에 밀렸고 양측은 1923년에 로잔 조약을 체결해 현재 튀르키예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최종 국경선에 합의했다. 이로써 다민족(多民族)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제국은 아랍과 유럽 영토를 모두 잃은 후 해체되고 세속주의(世俗主義) 튀르키예 국민국가가 새롭게 탄생했다.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의 선포와 함께 케말 장군은 초대(初代) 대통령이 됐다.

튀르키예공화국은 강경 세속주의자 엘리트 주도의 권위주의 일당 체제로 출발했다. 케말 대통령과 군부(軍部)가 설립한 공화인민당 체제에서는 강압적이고 급진적인 세속화 정책이 시행됐다. 1934년 의회는 케말 대통령에게 ‘튀르키예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 칭호를 부여해 신격화(神格化)했다.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한 군부는 케말주의로 대표되는 튀르키예 민족주의와 강경 세속주의를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전통을 대체할 국시(國是)로 제도화했다. 튀르키예 내 쿠르드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을 국가 통합의 적으로 여겼다.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갈등
 
이후 현대 튀르키예 정치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 간의 갈등 속에 발전해왔다. 국가는 쿠르드 민족의 존재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이들에게 ‘산에 거주하는 튀르키예인’이라는 정체성(正體性)을 강제로 부여했다. 함께 박해받던 이슬람주의와 쿠르드 민족주의 세력은 민주화의 구호 아래 종종 연합하기도 했다.

소수(少數)의 서구화된 도시 엘리트인 세속주의자 군부와 관료는 중앙집권화와 민족의 동질화를 강조했다. 구체제의 상징인 이슬람 관련 조직들은 해체됐다. 이슬람 정당의 결성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종교 이용이 법으로 금지됐다. 종교의 공식 활동은 국가의 허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권위주의 국가가 강권기구를 앞세워 행한 이슬람 통제는 지방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1946년 공화인민당 정부가 복수 정당제 시행을 약속하면서 일당 지배 체제는 끝이 났다.

1950년 첫 민주 선거에서 20년 넘게 일당 체제를 지켜온 공화인민당은 이슬람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인 민주당에 크게 패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정권을 잡은 지 10년 만인 1960년 포퓰리즘을 확산해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이유로 군부에 의해 해산됐다.

군부의 정치 개입은 이후 10년 주기로 1971년과 1980년 두 차례 더 나타났다. 1970년에 이슬람 정당 설립이 처음으로 허가되면서 민족질서당이 창당됐으나 1년 후 군부에 의해 불법화됐다. 뒤를 이은 민족구세당은 선거에서 선전해 1974년과 1977년 두 차례 연립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70년대에 등장한 연립정부들은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수습하지 못했다. 결국 1980년 군부는 3차 개입을 단행해 주요 정당을 해산했다.
 
이슬람 정당의 대두
 
3년여 군부 개입이 끝난 1983년부터 튀르키예는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 시기에 들어섰고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조직 간의 불안한 공존이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경제 전문가이자 쿠르드계인 투르구트 외잘이 총리에 당선돼 시장경제 활성화와 이슬람 통제 완화 정책을 펼치면서 튀르키예는 자유화 물결 속 번영기를 맞았다. 그러나 외잘 총리 시대가 끝나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강경 세속주의자 엘리트의 과도한 영향력, 우파의 부정부패, 좌파의 무능으로 튀르키예는 정치 불안정과 경제 침체기에 들어섰다.

이슬람 정당은 1970년 처음 결성된 이래 1971년, 1980년, 1998년, 2001년 군부에 의해 네 차례 해산됐다. 민족구세당이 1980년에 해산된 후 1983년 복지당이 조직됐으나 1998년 다시금 해체됐다. 이슬람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복지당이 해산된 후 결성된 미덕당 내에서는 튀르키예 이슬람 정당의 30여 년 역사상 처음으로 심각한 분열이 생겨났다. 강경 세속주의 국가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온 결속이 전통 보수파와 신진 개혁파 사이의 첨예한 갈등으로 무너진 것이다.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1994~1998)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개혁파를 이끌며 종교 색채가 짙은 당 강령을 수정하고 지금껏 보수파가 불투명한 인선 과정으로 장악한 당 지도부를 민주적 절차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또 20년 넘게 이어진 네지메틴 에르바칸 당대표의 일인 체제, 급진적인 하부 활동가 조직을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미덕당은 당 역사상 최초로 지도부 선거를 치렀고 보수파가 개혁파를 적은 표 차로 간신히 따돌렸다. 보수파의 권위와 지도력이 실추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 미덕당은 군부에 의해 다시 불법화됐다.
 
나토에 가입한 이슬람 국가
 
이슬람 제국의 과거를 철저히 부정하며 출발한 튀르키예공화국은 친서구(親西歐) 정책을 펼치며 서구 블록의 우방국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생 공화국의 엘리트는 아직 국가 기틀을 확립하지 못한 자국의 상황을 고려해 중립 입장을 결정했다.

이후 국경을 접한 소련이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무력(武力)시위를 계속 벌이자 튀르키예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한 후 마셜 플랜의 원조 대상국으로 튀르키예를 지정했다. 미소(美蘇) 갈등 구도에서 자유 진영의 소속임을 명확히 한 튀르키예는 1949년 이스라엘의 건국 직후 무슬림 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를 인정했다. 1950년 한국전쟁에도 참전,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튀르키예는 1952년에는 나토 가입에 성공했다.

1970년대 튀르키예는 튀르키예계와 그리스계가 갈등을 빚어온 독립국 키프로스를 두고 그리스와 전쟁을 벌여 북키프로스튀르키예공화국을 세웠다(북키프로스튀르키예공화국은 튀르키예 외에는 그 어느 나라로부터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와의 갈등은 1959년에 튀르키예가 신청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 가입 협상을 순탄치 않게 했다.

그럼에도 튀르키예는 나토 회원국으로서 서구와의 동맹 관계를 지켜왔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튀르키예는 미국에 자국의 군사기지 사용을 허락했고 이 때문에 이라크는 튀르키예에 선제(先制)공격을 선포해 양국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다. 나토 사무총장은 만약 이라크가 튀르키예를 공격한다면 강력하게 보복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1990년대에 걸쳐 튀르키예는 미국의 대(對)이라크, 대이란 봉쇄 정책에 적극 참여했다.
 
이슬람주의자 에르도안의 부상
 
2001년 친이슬람주의 정당인 미덕당이 군부에 의해 해산되자 이스탄불 민선 시장 출신인 에르도안은 개혁파 성향의 신진 이슬람주의자를 모아 정의개발당을 세웠다. 정의개발당은 에르도안과 경제학자 출신인 압둘라 귈의 연합 리더십 아래 전문직을 다수 충원했고 중도 실용 노선을 내세웠다. 젊은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스탄불 시장 시절 깨끗한 시정(市政)으로 높은 인기를 누린 카리스마 넘치는 에르도안에 열광했다. 새로운 이슬람 정당은 시장경제, 선거 경쟁, 다원주의(多元主義), 법치(法治)를 강조하고 반(反)서구주의 대신 민영화와 세계화를 지지했으며 튀르키예의 유럽연합 가입을 적극 옹호했다. 1980년대 외잘 총리의 보수적 자유주의를 계승해 시장과 전통의 조화를 강조한 이들은 이슬람이 큰 정부와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닮았다고도 할 수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층 세속주의 정당에 지친 유권자는 정의개발당에 매료됐다. 정의개발당은 기성 정당의 대안 정당으로서 입지를 확실히 어필했다. 에르도안 정의개발당 설립자는 이슬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며 화려하게 부상(浮上)했다.

온건 이슬람주의 성향의 정의개발당은 창당 이듬해인 2002년 돌풍을 일으키며 총선에서 압승했고 2003년 단일 정부를 구성했다. 튀르키예 정치권에서 다수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해 단일 정부를 꾸리기는 1987년 이후 처음이었다. 10년 가까이 삐걱거리는 연립정부로 이어가던 불안한 정국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 후로도 10여 년간 정의개발당은 큰 어려움 없이 단일 정부를 구성했다.

정의개발당 정부는 군부의 정치 개입 금지, 쿠르드 소수민족 보호, 사형제 폐지 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국제규범과 다자주의(多者主義)를 앞세운 중견국 외교를 활발히 벌여 튀르키예의 국제적 평판을 끌어올렸다. 이에 더해 에르도안 총리의 재임 10년여간 튀르키예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세 배 이상 늘었고 2010년에는 44년 만에 최저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팔레스타인 정치 조직 파타와 하마스의 갈등, 시리아 내전, 이란 핵 합의 등에서 역내(域內) 중재자로도 뛰었다. 2011년에 일어난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 직후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가 실시한 아랍권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꼽혔다. 2009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튀르키예 국회 연설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끈 에르도안 총리의 리더십을 치하했다. 나토와 G20 회원국이자 유럽연합 후보국인 튀르키예는 2013년 중견국 협의체 믹타(MIKTA)를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창립했다. 이들 중견국 회원국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 중심의 힘의 논리에 반대하고 국제규범과 가치,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도모를 주장했다.

튀르키예는 특히 중동 내 인도주의 확산과 테러리즘 강경 대응을 강조했다. 당시 아흐메트 다부트오울루 외교부 장관(2009~2014)은 ‘이웃과 문제없이 지내기(Zero Problems with Neighbors)’ 원칙을 선언하며 국제사회 공조를 역설했다. 이를 두고 시리아·리비아·예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IS의 발호로 인해 역내 혼란과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자국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도라는 일부 비판이 있었으나 튀르키예의 중견국 외교는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페툴라 귈렌 문제로 미국과 관계 멀어져
 
2003년 총리직에 오른 에르도안은 2007년에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직선제(直選制)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7년 단임(單任) 임기를 5년 연임(連任)으로 바꿨다. 많은 사람이 에르도안 총리의 은퇴 이후 국가 원로 자리쯤을 마련하는 것이라 여겼지, 제왕적 대통령제를 위한 첫 단계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2011년 세 번째 연임에 성공한 후부터 에르도안 총리는 권위주의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3년 이스탄불 게지 공원의 재개발에 항의하는 평화 시위를 진압하고, 이에 반대하는 당내 온건파와 갈등을 벌였다. 이와 함께 정의개발당을 함께 키웠던 옛 동지인 이슬람 은행과 기업 및 수니파 종단 회원들을 축출했다. 그의 권위주의적 의사 결정 방식과 친인척 비리를 비판했다는 게 이유였다. 3회 연임으로 더는 총리직을 맡을 수 없게 된 에르도안은 2014년 실시된 대선(大選)에서 51.7%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6년 7월 자신을 겨냥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강도 높은 공안 정치를 실시했다. 2년간 국가 비상사태가 이어지면서 군(軍)·경찰·검찰·행정 관료는 물론 교사와 언론인을 포함해 16만 명 이상이 해임되거나 투옥됐다. 소신을 피력한 총리와 장관이 줄지어 경질되고 대통령의 40대 사위가 에너지부와 재무부의 수장이 됐다.

쿠데타는 군부 내 페툴라 종단 소속 온건 이슬람주의 성향의 장교단이 주도했다. 세속주의자 군인도 일부 포함된 쿠데타 가담자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향한 사회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나머지 군부와 시민 다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주변 동료의 의중과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는 성숙한 민의(民意)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2000년대 초 이래로 정의개발당 정부가 케말주의의 수호자였던 군부를 길들이면서 군의 응집력이 급격히 약해진 사실도 계산하지 못했다.

쿠데타 진압 직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 3대 종단의 하나인 페툴라 종단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종단의 창시자이자 대표적 이슬람 자본가인 페툴라 귈렌을 국가전복 혐의로 기소했다. 과거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에 머무는 귈렌의 즉각 소환을 미 정부에 요청했으나 미국은 증거 부족으로 거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에 의원내각제 폐지와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 도입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찬성 51.4%로 개헌에 또 성공했다. 이로써 초장기 집권 기반을 마련했다. 2018년 대선에서 52.5%, 2023년 대선에서 52.1%로 3연임에 성공했다. 오스만 제국의 최고 지도자인 술탄이 누린 ‘절대 권력’을 에르도안 대통령의 막강 파워에 비유하는 이유다.
 
상충하는 이념들
 
매년 전 세계 200여 나라의 민주주의 정도를 측정하는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2023년 튀르키예의 민주주의 지수는 32로 역내 왕정 국가인 모로코와 요르단보다 낮고 장기 권위주의 국가인 알제리와 같다. 튀르키예처럼 민주주의 없는 선거제도를 시행하는 ‘하이브리드 정권’은 이란을 비롯해 전 세계에 다수 존재한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G20 회원국인 튀르키예를 우간다, 탄자니아 등이 속한 투자 ‘주의’ 등급으로 구분했다.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체제가 모습을 드러낸 2010년대 중반 이후 튀르키예의 외교 정책도 팽창주의 행보를 보였다. 정책의 기조는 튀르키예 민족주의, 신오스만주의, 유라시아주의로 서로 양립하기 어렵고 상충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포퓰리스트의 단골 메뉴인 배타적 민족주의와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신오스만주의는 튀르키예에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다. 이슬람주의자 에르도안이 다민족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의 향수를 소환하는 건 어색하진 않다. 하지만 튀르키예 민족주의는 국부(國父)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의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세운 세속주의 근대국가의 국시다. 에르도안은 정계에 입문한 1970년대부터 군부의 탄압을 받았으며 소속된 이슬람 정당이 세 차례 해산되고 본인이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에르도안이 집권 10여 년 후 이슬람주의자를 짓밟던 아타튀르크 코스프레에 나서며 자신을 21세기 국부로 묘사했다. 모순되고 당황스러운 돌변이다. 당시 불거진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행보로 유권자가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에르도안이 당내 온건파를 숙청하자 2015년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해 13년 만에 처음으로 단일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반면 쿠르드계 정당은 제4당으로 약진했다. 에르도안은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앞세워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운동당과 연합을 맺고 이들의 도움으로 2017년 제왕적 대통령제 개헌을 51%로 통과시켰다. 민족운동당은 튀르키예 민족 우월주의와 외국인 혐오를 외치는 네오파시즘 정당이다.
 
신오스만주의
 
돌연 골수 민족주의자가 된 에르도안은 인구의 20%에 달하는 쿠르드계를 테러리스트로 몰고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2011년 이래 자국으로 피신해온 시리아 난민 370만 명을 쫓아내겠다고 선언했다. 집권 초기 쿠르드 민족의 권익 보호를 역설하며 선한 무슬림의 덕목을 강조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로써 무슬림 민주주의 구호 아래 시행한 쿠르드 소수민족 보호 제도는 폐기되고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시리아 내전과 ISIS 격퇴전에서 맹활약한 쿠르드계 시리아 민병대가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자 2019년 튀르키예 정부는 이들 민병대가 자국 내 분리주의 테러 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의 연계 조직이라며 시리아 내 쿠르드계 자치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신오스만주의 정책은 과거 발칸반도까지 지배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자며 역내 패권(覇權) 추구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튀르키예는 2019년 장기 내전 중인 리비아의 서부 이슬람주의 정부와 그리스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침범하는 동지중해 협정을 일방적으로 체결해 국제법을 어겼다. 이미 한 해 전부터 동지중해의 에너지 자원 개발 문제로 그리스, 키프로스, 유럽연합과 대립해왔고 같은 문제로 역내 이스라엘, 이집트와도 충돌했다. 2020년에는 리비아에 자국군을 파병해, 동부 투브루크 세속주의 리비아 국민군과 싸우는 서부 트리폴리 이슬람주의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본격화했다.
 
중국·러시아에 접근
 
같은 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전환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교분리 원칙으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와 싸우겠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정신감정이 필요하다며 독설을 쏟아냈다.

더불어 유라시아주의를 앞세워 튀르키예가 나아갈 방향은 서쪽의 유럽이 아닌 동쪽의 유라시아라고 주장하며 러시아, 중국과 빠르게 밀착했다. 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는 러시아제 지대공미사일 S-400 시스템을 인도받아 2020년에 시험 발사까지 마쳤다. S-400 시스템은 미국의 차세대 주력 기종인 F-35 전투기와 같은 스텔스기를 탐지할 수 있다. 나토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튀르키예에는 나토의 탄도미사일 방어 레이더 시스템과 미국의 핵무기가 있다. 미국과 유럽 회원국이 제재를 경고했으나 튀르키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또 튀르키예는 유엔이 아닌 러시아가 주도하는 시리아 종전 협상에 이란과 함께 적극 협력해왔다. 중국이 신장위구르 자치 지역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무슬림의 통제 관리에 협력을 요청하자 대테러 정책의 일환이라며 기꺼이 응했다. 이렇듯 역내외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질서를 주도하는 러시아와 이란, 중국과 밀착하면서 인권·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미국, 유럽과는 멀어졌다.
 
미국의 탈중동 정책
 
나토 회원국 튀르키예의 외교 정책 일탈에는 탈중동 전략 선언 후 미국의 신뢰도 하락, 시리아 내전에서 급부상한 러시아의 영향력, 무슬림 난민 위기와 극우 민족주의 발호에 따른 유럽의 관망으로 요약되는 지정학의 지각 변동이란 배경이 있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중동 내 역할 축소를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장기 참전에 따른 전쟁 피로감과 여론 악화, 셰일 에너지 자원 개발에 따른 중동 의존도 하락, 중국 견제를 목표로 한 아시아 중시 정책의 부상 때문이었다.

오바마 정부는 시리아 내전에서 민간인을 향한 알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 공격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 역시 중동에서 발 빼기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며 시리아 철군(撤軍)을 강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의 친분을 과시했지만 2019년에 이란의 지원을 받은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유시설을 공격했음에도 대응하지 않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거래식 동맹관, 신고립주의는 미국의 입지 약화, 러시아의 틈새 진출, 역내 미 동맹 우방국의 일탈을 부추겼다. 2021년에 출범한 바이든 정부 역시 ‘인도-태평양’을 대외 정책의 중점 지역으로 선언하고 그해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강행하면서 탈중동론에 쐐기를 박았다.

반면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서 역내 후원국 시리아를 끝까지 보호했고 이란도 이를 적극 도왔다. 시리아에 자국 공군과 해군 기지를 둔 러시아는 반군, 민간인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전투병, 용병, 무기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도 대규모 지상군과 민병대를 보냈다. 나아가 러시아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제출한 시리아 정부의 인권유린 및 화학무기 사용 진상 조사 결의안 12건, 시리아 이들리브 지역 휴전 촉구 결의안 1건 모두를 반대하면서 후원국 시리아를 감쌌다. 이후 시리아 재건 복구 시장에 러시아와 이란 기업이 대거 참여했고 중국도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다.

또 튀르키예가 시리아 내 쿠르드계 자치 지역을 기습 공격했을 때 미국 정부는 방관했으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점령 지역을 안전지대로 지정해 공동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중동에서 발을 빼겠다는 미국 대신 러시아에 밀착했다.
 
중동 지정학의 혼란
 
튀르키예의 이런 행동들에 대해 유럽 국가들도 국내 반(反)이민 여론을 의식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유럽행을 원하는 자국 내 시리아 난민에게 문을 활짝 열겠다며 위협했기 때문이다. 2016년 이미 유럽연합(EU)은 튀르키예와 난민 송환 협약을 맺어 그리스에 머물던 시리아 난민을 튀르키예로 보내 튀르키예 정부의 관리하에 두기로 합의했다. 튀르키예는 유럽연합이 제공한 시리아 난민 지원금을 시리아 쿠르드계 자치 지역을 압박하는 국경지대 군사비로 전용(轉用)하더니 유럽연합에 추가 지원까지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럼에도 유럽 국가는 튀르키예의 ‘난민 비즈니스’ 앞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관여 정책이 아닌 관망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에르도안 대통령 같은 권위주의 지도자는 유럽에서 퍼지는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반세계주의를 환영한다. 권위주의 체제를 향한 비판에서 점차 멀어지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여러 나라가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했다. 그런데 미국의 역내 동맹 우방국을 포함한 중동 국가 대다수는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미국이 요청한 제재 참여와 원유(原油) 증산을 거절했다. 튀르키예와 이스라엘도 제재 동참 대신 대화를 강조했다. 중동의 시민들은 7년여 전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가 시리아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했을 때와 사뭇 다른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러시아 비난에 이중 잣대라며 곱지 않은 눈으로 봤다. 러시아가 과거 만행을 저질렀을 당시 즉각 응징했더라면 푸틴 대통령이 지금처럼 기고만장하지 못했을 거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

중동에서도 미중 경쟁은 치열하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려고 중동을 떠나 아시아로 향한다지만 중국은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튀르키예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이란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어 협력을 다져왔다. 현재 중동에서는 트럼프 정부 시기에 굳어진 미국의 신뢰도 추락과 힘의 공백을 틈타 튀르키예와 이란이 제국의 영광을 불러내 패권주의 행보를 드러내며 경쟁과 협력을 오가고 있다. 오늘날 중동 지정학의 혼란에는 이들의 반미(反美) 연대 공고화도 포함된다.
 
최근 이웃 국가들과 관계 개선 모색
 
2019년 이래 튀르키예의 국내 총생산은 줄었지만 공격적인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국방비는 늘어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3년의 선거를 1년여 앞두고 극심한 경제난으로 정권 재창출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대외 관계 회복에 나섰다. 2022년 2월에는 9년여 만에 처음으로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해 투자 유치에 나서며 화해를 모색했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이스탄불에서 일어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반정부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궐석재판을 사우디아라비아 법원에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두 달 후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튀르키예를 방문해 양국 투자 강화 협정에 서명했다. 또 에르도안 대통령은 4년 만에 주이스라엘 대사를 다시 임명해 두 나라 간 대사급 관계를 회복했다. 이에 더해 2013년 쿠데타로 무슬림형제단 정부를 축출한 시시 이집트 대통령과도 관계 회복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2023년 5월 대선에서 승리한 후에도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장기 집권해 ‘21세기 술탄’이라 불리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절대 권력을 유지하는 한 튀르키예의 외교 정책은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의지에 흔들릴 것이다.

 
* 본 글은 월간조선 11월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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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