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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저명한 문필가였던 노만 에인절(Norman Angell)은 1910년 그의 저서 “위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에서 유럽 국가들은 강한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로 엮여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책이 나온 지 4년 후에 1차대전이 터졌고 1000만 명의 군인과 70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경제적으로 교류하고 그래서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경제사상가 아담 스미스의 자유무역 이론에 그 뿌리가 있다. 각 국가가 분업 논리에 따라 스스로 비교우위가 있는 상품에 특화하고 생산품을 자유롭게 교역하면 그 무역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가 이득을 보게 된다. 그 이득을 포기하는 것을 각국 지도자들은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상대국과의 분쟁도 쉽게 해결하고 평화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담 스미스의 후예들을 통해 국제정치학에 ‘상업적 자유주의(commercial liberalism)’라는 흐름으로 이어져 왔다.

그 같은 생각은 2차대전 후 미국의 중요 외교정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1972년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50년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미중 양국이 적대관계로 진입한 지 22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닉슨-키신저 팀의 대중국 포용 정책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1979년 정식 수교가 이루어지고 1980년대부터 중국은 더 이상 안보에 대한 걱정 없이 경제발전에만 매진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국제무대에 끌어내 소련과 경쟁시킴으로써 어부지리를 얻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베트남전으로 손상된 미국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려 했다.

그러한 대중국 포용전략의 기저에는 경제적 상호의존의 정치적 효과에 대한 미국 지도자들의 희망적인 기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중국이 아무리 공산당이 이끄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오랜기간 활발한 무역 교류와 투자를 통해 포용하면 서방세계처럼 민주화되고 자유주의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일원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의 기대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1980년에 미국 명목GDP의 6%에 불과하던 중국의 경제력은 2001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WTO에 가입한 후 2010년에 41%, 2020년에는 70%까지 따라잡았다. 중국은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전까지는 덩샤오핑의 전략지침인 도광양회를 따르며 미국과 협조했다. 그러나 중국 경제 도약으로 자신감이 생기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미국이 흔들리는 모습을 목도한 뒤,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공세 외교로 전환했다. 이제 떨쳐 일어나 미국과 경쟁하고,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2012년 말 집권한 시진핑 주석은 권위주의 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특히 2018년에는 헌법을 바꾸어 시진핑 주석의 무한 연임의 길을 트며 절대적 지배체제를 굳혔다. 이러한 중국의 행로를 목도한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중국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초당적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대중 포용정책을 버리고 대결 정책으로 전환했다.

상업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포용 정책의 또 하나의 사례가 1970년대 초 동방정책을 시작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사민당 연립정부였다. 냉전의 와중 속에서 브란트 총리는 동독과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관계를 포용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는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간의 동독에 대한 초당적 포용 정책은 동서독 간의 통합을 향한 모멘텀을 강화했고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문제는 러시아와의 관계였다. 사민당이 주도했던 동방정책을 헬무트 콜, 앙겔라 메르켈과 같은 기민당 연립정부도 계승했고, 그 결과 통일 이후에도 대러시아 포용 정책이 지속되었다. 특히 러시아로부터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은 독일 경제 운용에 필수 요건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경제적 상호의존의 네트워크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 안으로 끌어들여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독일 정치지도자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를 크게 배신한 것이 2023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독일을 비롯해 수많은 서방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의 침략 행위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강력한 대러시아 제재가 시작되었고 독일도 이에 적극 참여했다. 독일은 2021년 총 원유 수입의 34%에 달하던 러시아산의 원유 수입을 전면 중단했고, 55%에 달하던 천연가스 수입을 35%까지 감축했다.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포용 정책의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한국이다. 1998년 임기를 시작한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의 냉전 종결을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대결이 아닌 포용으로 남북 간에 경제 및 인적 교류를 지속하면 북한 체제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 장기적인 평화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대북 포용 정책이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었던 절정기는 1998-2000년의 3년간이었는데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와의 대북정책 공조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정부도 대북 포용 정책을 추구했지만, 북한의 본격적 핵 개발과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외교 노선 때문에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서방세계가 시도한 중국, 러시아, 북한에 대한 포용 정책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시간이 더 흐른 다음 전문가들이 본격적으로 분석해야 할 세계사적인 거대 질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해 볼 점은 있다.

무엇보다, 이 세 권위주의 국가 지도자들은 서방측의 포용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 추구의 노력을 정반대의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스티븐 코트킨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공산당 1당독재에 대한 대안적 선택은 점진적인 자유민주주의로의 변화가 아니라, 혼란과 무정부상태이고 그에 따른 국가 붕괴였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당 독재의 길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면서 과거 제국의 영광을 부흥시키는 것을 국가 목표로 삼았고, 서방과의 경제적 상호의존은 이를 위한 전술적 방편이었다.

실제로 2005년 국정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가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심중에 과거 소련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시진핑 주석의 생각을 꾸준히 지배해온 최대의 악몽은 중국이 소련의 붕괴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강고히 하고, 중국몽, 즉 과거 중화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1990년대 냉전 종결 직후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로의 본격적인 전환을 시도하지 않았다. 경제문제 해결보다 공산당 일당 독재 지배체제의 약화에 대한 권력자의 우려가 더 앞섰던 것이다. 일당 독재체제의 와해는 곧 체제 붕괴로 직결된다는 강박관념이 3대에 걸친 지도자의 생각을 지배했다. 특히 2000년 조지 W. 부시의 당선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180도 바뀐 것도 권력자의 위기의식을 더욱 강화했다.

닉슨 전 대통령은 1994년 작고하기 전 자신의 연설보좌관이었던 윌리엄 사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포용 정책에 대해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부터 이미 중국에 대한 의구심이 대중 포용정책의 당사자의 머릿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 때문에 역사는 감히 인간이 기대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계속 전개되어 나간다. 그러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따진다는 것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미국 패권의 상대적 쇠퇴, 그 와중에 제국 부활의 허망한 꿈을 꾸는 중국과 러시아, 그들 독재국가와의 국제연대에 본격 진입한 북한이 완전히 변해버린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같은 새로운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 상호의존을 통한 평화 창출은 노먼 에인절의 책 제목처럼 “위대한 환상”같이 보인다.

 
* 본 글은 11월 30일자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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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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