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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제하며 이란 강경파의 후원을 받는 이슬람 급진주의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 민간인 1200여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250여 명을 납치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뿌리 뽑겠다며 대대적인 공습과 지상전을 벌여 가자지구의 사망자 수가 2만5000명을 넘어섰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에게 대피를 권고하고 사전 공습경보를 내보냈다지만 허사였다. 하마스의 군사 시설이 인구 밀집 주거지역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천문학적인 민간인 피해가 나왔다.

넉 달째로 접어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미국도 어수선하다. 조 바이든 정부는 인질과 수감자 맞교환 및 휴전협정을 주도하고 있지만 큰 성과가 없다. 역내 친이란 프록시 조직들은 하마스를 지지한다며 동시다발적 도발로 전선 확대를 노리고 있다. 이들 무장 조직은 이라크와 시리아 내 미군 기지를 드론과 로켓으로 160여 차례 공격하고 홍해를 지나는 상선 15여 척을 피습했다. 결국 1월 말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날린 드론으로 미군 3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다치자 바이든 정부는 강력한 응징을 선언해 이라크·시리아·예멘 내 이란의 프록시 시설 85여 곳을 보복 공습했다. 프록시 조직들은 반격을 예고했다.

대선이 아홉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미국이 중동 분쟁의 수렁에 빠져드는 모양새이니 바이든 정부의 중동 정책 실패가 선거에 악재로 작용하게 될까? 흔히 외교정책의 영향력을 확대 해석해 핏대를 높이는 엘리트와 달리 일반 미국 유권자는 대개 국내 문제로 자신의 지지를 결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다가올 미 대선에서도 나라 밖의 위협보다는 인플레이션과 일자리, 이민자, 낙태권, 기후변화, 정치 양극화가 뜨거운 이슈다. 최근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연거푸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민주당 경선에서 압승한 바이든 대통령 모두 국내 경제나 민주주의 문제에 집중해 승부를 걸 것이다. 2008년 미 대선에서는 이라크전쟁이 핵심 이슈였는데 중동 문제여서가 아닌 자국의 장기 참전에 따른 피로감,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말미암은 심각한 사회문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이든 정부의 초기 친이스라엘 노선을 두고 기존 민주당 지지 연합 내부에서 파열음이 날카롭다. 미국 내 소수인종으로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아랍계 및 무슬림 유권자들이 이번엔 바이든 대통령의 이스라엘 지원을 맹비난하며 ‘#바이든을 버려라’는 낙선운동을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히 벌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 집단은 중도층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러시다 털리브,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일한 오마 같은 민주당 내 신세대 좌파 의원들이 약자인 팔레스타인을 적극 옹호해 PC주의 실천 구호를 외치면서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워싱턴포스트가 하마스 만평을 올렸다가 인종차별 비난을 받고 이틀 만에 삭제했다.

가자지구 여성과 어린이를 인간 방패로 삼은 하마스 지도자를 풍자했으나 과장되게 큰 코와 화가 나 고함치는 모습으로 아랍계의 특징에 대한 편견을 불온하게 묘사했다는 이유였다. 요즘 미 대학가에서는 친팔레스타인 구호를 넘어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유대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급진적이고 고집스러운 PC주의는 중도·무당층을 ‘샤이 트럼프’로 변신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중동의 불행한 전쟁이 미국 내 이념 논쟁에 다시금 불을 지피면서 미 대선은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 본 글은 2월 13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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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