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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큰 공헌을 한 헨리 A. 키신저 박사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키신저 박사는 한국 국민의 평생 친구였으며 우리는 키신저 박사와 그분의 현명한 조언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키신저 박사는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국제정치학자로 닉슨 행정부에서 대통령 안보보좌관, 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직을 역임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의 냉전시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외교정책 수립 과정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역사와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제관계를 보셨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네 가지 혜안을 제시하셨습니다. 먼저 역사는 적과 동맹을 이해하는 핵심이고, 정책결정자들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으므로 가정에 의존해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 결과는 반드시 예상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으며, 많은 외교정책결정은 최악이 아닌 차악(遮惡)의 대안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고, 지도자들은 도덕성이 결여된 현실주의에 매몰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지만, 194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일본인들의 피해가 있었지만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습니다. 그 이후 6.25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테러와의 전쟁’ 등이 있었고, 1961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세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버팀목 역할을 한 미국의 공로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키신저 박사의 역할은 상당했다고 보여집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기에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진영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소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공산주의 팽창을 시작했고, 북한에게 탱크를 포함한 각종 무기를 제공하여 북한이 6.25전쟁을 일으키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서방 진영은 소련에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고, 냉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공산진영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대립한 냉전시대에는 심각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 말 양 진영 간에는 핵전력에서 ‘공포의 균형’이 달성되었지만 여전히 과도한 군비경쟁과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대리전으로 인해 대규모 충돌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미국과 소련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모두 군사적 충돌을 회피하고, 협력 가능한 분야에서 협력하여 공존하자는 전략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긴장완화” 혹은 “휴식”을 뜻하는 ‘데탕트’(détente)가 탄생하였고, 1960년대 후반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미소 간 결정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닉슨 대통령을 도와 데탕트를 설계하고 실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데탕트 하에서 미소 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과 같은 군비통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미소 간 핵경쟁이 공멸(共滅)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인식하에서 경쟁을 중단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는데, 1985년 레이건-고르바쵸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 성명에 포함된 “핵전쟁은 이길 수도 없고, 절대 싸워서도 안된다”라는 말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방적으로 ‘일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패색이 완연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한반도의 반을 점령했습니다. 4년 후인 1949년에 장제스 총통과 국민당 정권은 대만으로 쫓겨나고 중국은 공산화되었습니다.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공산세력이 확장일로에 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950년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이던 애치슨은 미국은 일본과 필리핀을 중심으로 극동지역을 방어할 것이라는 “애치슨 라인”을 선포하여 한국을 극동지역 방어선에서 제외하였고 이는 북한의 남침을 불러온 결정적인 실수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버드 대학원의 학생이었던 키신저 박사는 1950년 한국을 방문하여 전쟁 발발 과정을 분석하고 윌리엄 엘리엇 (William Elliot) 대통령 정치고문과 폴 니츠 (Paul Nitz) 국무부 정책국장에게 “미국의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보고서에서 모든 지역에서 소련의 도발에 대응하려는 미국의 ‘물리적 봉쇄정책’(policy of physical containment)은 너무 방어적이며 소련의 공격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라 분석하셨습니다.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힘의 우위를 활용하여 주요 지역에 집중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한 그분의 보고서는 향후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정몽준 명예이사장과의 대담에서 키신저 박사는 “한미관계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또 미국 국민들도 한국전쟁 당시 5만 명이 넘는 미군이 한국에서 전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또 오랜 기간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켜 왔습니다. 어떤 나라도 세계 모든 곳을 동시에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방위공약을 믿어도 좋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중국이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사회로 편입하는 문을 연 것입니다. 키신저 박사 구상의 핵심은 소련과 이념 및 국경분쟁 상태에 있던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 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는 연설을 통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하면서 중국은 소련을 정통 공산주의를 벗어나 자본주의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수정주의’로, 소련은 중국을 과거에 얽매여 계급투쟁만을 추구하는 ‘교조주의’로 서로 공격했습니다. 중소 이념분쟁은 1969년에는 국경분쟁으로까지 전개되었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미중 간 ‘핑퐁외교’로 불리는 관계 정상화의 산파로서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성사시켜, 1979년 미중 수교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키신저 박사가 이끈 미국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했고 이는 중국의 빠른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인류 4대 문명 발생지의 하나이고 세계 최대의 인구와 방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는데, 중국의 발전은 미국이 만든 국제질서 안에서 이루어졌고, 중국도 자신의 발전이 미국이 만든 질서와 체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제질서 유지에 책임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021년 7월 1일,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주석은 “전면적인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이라는 두 번째 백 년 (2049년)의 목표를 향한 전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강대국이 되겠다는 의사로 해석되어 불필요하게 미국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 과정에서 중국 자체도 정치사회적으로 변했고, 바깥 세계와의 상호 의존성도 증대되었기 때문에 중국도 기존 국제사회의 규범을 파괴하는 일방적 행동을 하는 것에는 제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중관계에 긴장이 있을 수 있지만, 2021년 9월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전화 통화에서 “경쟁이 분쟁(conflict)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자”라고 한 것은 미중관계가 일정한 선에서 관리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2010년에 정몽준 명예이사장과의 대담에서 키신저 박사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의 충돌은 두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우려하셨는데, “중국과 미국 사이에 충돌이 있다면 중국을 둘러싼 국가들의 입장이 매우 복잡해질 것이므로 미중이 양국 관계를 원만히 풀어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며, 중국의 지도자들 역시 그것을 바란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2014년의 저서 『World Order』를 통해서 대결보다는 ‘공통의 질서’(common order)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나누었던 대담을 소개하며, 트루먼 대통령이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우리가 적들을 패배시켜 국제사회로 복귀시켰다는 점”을 들었다고 회고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에 의하면 트루먼은 미국이 거둔 승리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화해 정책 때문에 기억되기를 원했고, 트루먼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미국식의 규칙과 규범을 지키고 확산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키신저 박사는 오늘날 규칙을 기반으로 한 체계는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이 체계에 속한 국가들이 각자의 몫을 해야 하고, 21세기의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데,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가 되어야 할 非서양권 국가들이 현 체계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규칙을 수정하겠다고 공언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세계질서(Global World Order)’는 존재한 적이 없었고, 우리 시대의 질서는 약 400여 년 전 서유럽에서 구상되었던 베스트팔렌 조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양권의 질서 구축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슬람권의 국가들이나 중국은 이에 공감하지 않고 있으며, 세계질서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스스로를 “떠오르는 국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국의 의견 충돌은 대립 위기로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문화와 역사, 전통적인 질서 이론이 그렇게까지 다른 지역들이 공동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질서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해야 한다”라고 제안하고, 어떤 세계질서 체계든 지속 가능하려면 지도자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그 체제가 공정하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보셨습니다.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질서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셨는데, 평화를 유지하는 질서 체계 없이는 자유를 보장할 수 없고 질서와 자유는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는 1971년 20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중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를 회고하셨습니다. 키신저 박사가 중국은 “미스터리한 나라”라고 말씀하시자, 저우언라이 총리가 “당신은 중국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중국에 익숙해지면 예전만큼 미스터리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전경련 회장이었던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1985년 7월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서울에 들른 키신저 박사를 만나 중국의 현대화 정책과 미래에 관한 의견을 나누셨습니다. 당시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어서 중국의 동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정주영 창업자와 키신저 박사의 대담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키신저 : “… 앞으로 3년만 더 현대화 정책이 지속된다면 중국 공산주의는 결국 하나의 관념으로서만 그 명맥을 유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이 공산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만 시장경제체제로 간다면 그동안의 불만과 갈등으로 인한 사회 불안이 야기되어 좌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 파장은 중국 자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파장이 엄청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경제계도 이런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주영: “키신저 박사님 제 견해는 다릅니다. 나는 미국 사람들이 중국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미국이 태동도 하기 수천 년 전부터 정치와 외교, 특히 장사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경험과 수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과 반세기 정도 공산주의 체제 속에 살았다고 해서 이들 피 속에 뿌리 깊이 수천 년 내려 내려온 최고의 장사꾼 기질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과정에 다소의 혼란과 차질은 겪게 되겠지만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1923년생으로 100세를 바라보는 노년이 되어서도, 학자로서 키신저 박사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미래 기술의 핵심인 인공지능(AI)에 대해서도 분석을 하셨습니다.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 세계적인 바둑 챔피언들을 이기는 것을 본 이후 키신저 박사는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인류에게 편리함과 위험성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는데, 지금부터 인공지능을 관리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역사나 철학에 의존하지 않고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훨씬 큰 실수를 더 빨리 저지를 수도 있고, 인간의 지성이 쌓아온 문명의 역사를 흔들 수 있고, 인류의 역사가 종식될 수 있다고 키신저 박사는 경고하셨습니다.

2010년 아산정책연구원의 초청으로 키신저 박사가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정 명예이사장과 키신저 박사는 장시간에 걸쳐 대담을 나누었는데, 대담 내용은 정 명예이사장의 저서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와의 소통』에 담겨 있습니다. 이 대담에서 정몽준 명예이사장이 “아프가니스탄이 미국에게는 제2의 베트남이 되고 있나요?”라고 질문하자 키신저 박사는 “아프가니스탄이 파키스탄과 인도, 그리고 전 세계의 지하드(성전) 추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납니다. 이슬람 성전주의자들이 승리하면 전 세계 이슬람 성전 운동에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이 테러와 게릴라전의 발원지가 되지 않도록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평가하셨습니다. 2021년 미군 철수와 탈레반의 카불 점령과 관련해서는 이코노미스트誌의 기고를 통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인도 등 아프가니스탄 인접 국가들과의 협력을 끌어내는데 소홀히 하는 전략적 실수를 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2009년 1월 정몽준 명예이사장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키신저 박사는 정 명예이사장을 미국 정재계 유력인사 200인의 모임인 알팔파클럽(Alfalfa Club)에 초청하셨고, 이 자리에서 오바마 당시 대통령 당선인과도 만났습니다. 2014년 8월에는 정몽준 명예이사장이 키신저 박사와 부인 낸시 여사의 초청을 받아 코네티컷에 있는 키신저 박사의 여름 별장을 방문했습니다. 2015년 7월 키신저 박사는 정몽준 명예이사장을 뉴욕 자택으로 초청하여 만찬을 했는데 이 자리에는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 캐런 하우스 전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인이 참석했습니다. 2019년 11월 정 명예이사장과 키신저 박사는 뉴욕의 키신저 박사 자택에서 다시 만남을 가졌는데 키신저 박사는 북핵 비핵화는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이며 미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 질서와 평화에 대한 키신저 박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키신저 박사의 세계질서 유지에 대한 열정과 통찰력은 후학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며,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국제관계의 연구에도 기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