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은 지난 1월 29일 조태용 외교부 1차관을 만나 “대북 정책에 있어서 한미 관계는 빛 샐 틈이 없다“고 말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도 그 이틀 전인 27일 외교부 기자단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 대화의 속도와 범위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한미간에 엇박자가 나고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미국이 남북관계의 장애물로 비칠까 경계하는 발언들이다. 과연 한미간 대북 공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가?
최근 워싱턴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1월 31일자 워싱턴 포스트는‘대북정책의 좋은 경찰, 나쁜 경찰? 워싱턴이 악역 담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미국과 한국의 대북정책차이가 갈수록 드러나고 있으며, 서울이 사이 나쁜 공산주의자 형제와 다시 교류를 시도하는 것은 오바마 정부의 강경노선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고 했다.“미국과 한국 사이가 벌어질 위험은 아직 없다”고 했지만 그러면서도 “동상이몽이라는 한국말은 현재 상황을 완벽하게 묘사한다”고 했다.
전략적 인내의 끝…강경 조짐 보이는 미국의 대북정책
작년 말부터 한국은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을 강조했지만 미국은 압박과 제재에 무게를 두고 있다. 가장 큰 충격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북한 붕괴’ 발언이었다. ‘악의 축(axis of evil)’,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와 같은 표현으로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혐북’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냈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북한을 겨냥해 ‘붕괴(collapse)’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22일 오바마 대통령은 유튜브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결국 무너질 것(North Korea is bound to collapse)”이라고 언급했다. 불과 닷새 전인 12월 17일, 보수진영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반세기 넘게 계속된 대 쿠바 봉쇄를 일방적으로 해제하면서 관계 정상화를 전격 발표한 오바마였다. 이어 1월 20일 미 의회 연두교서 연설에서는 “의회가 이란에 대한 추가 제제안을 통과시키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진행중인 이란과의 핵 협상을 결렬시킬 수 있는 조치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외교안보 정책에서는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 않게 진보적인 오바마였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강하게 직설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흔히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고 한다. 북한이 비핵화 결단을 할 때까지 대화하지 않으며 다른 6자 회담 참가국들과의 공조를 통해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끌어낸다는 일종의 ’방관 정책’이다. 이 정책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각에선 임기 2년을 남긴 오바마 대통령이 ‘외교적 성과(diplomatic legacy)’를 의식해 대북 협상에 나설 것으로 관측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미국의 대북정책은 오히려 강경으로 선회하고 있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의 ‘북한 붕괴 발언’ 이전에도 워싱턴에서는 대북 강경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공화당이 다수가 된 의회에서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고,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북제재에 대한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었다. 또 UN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의 발표를 계기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자 인권을 매개로 북한을 압박하는 방법도 적극 검토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런 가운데 돌출한 북한의 소니사 해킹 사건은 ‘미국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간주되며 미국 조야의 공분을 자아냈다. 이어 소니사를 해킹한 해커들이 영화 ‘인터뷰’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폭파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긴 사실이 밝혀지고, 미 영화 배급사들이 ‘인터뷰’ 상영 철회를 선언하자 사건은 ‘미국인들이 신성시하는 표현의 자유와 미국 시민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바마의 ‘북한 붕괴론’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북한 비핵화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북한에 유입•확산시킴으로써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촉진시키고 궁극적으론 김정은 정권을 교체하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있음을 뜻한다. 미국이 북한 정권 교체 없이는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음을 드러낸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이며, 포린 어페어스 (Foreign Affairs)를 발행하는 외교협회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의 리처드 하스 원장은 지난 12월 23일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에서 ‘북한 정권교체’를 주장해 미국 내에 격론을 일으켰다. ‘북한의 위협을 제거할 때가 됐다’는 제목의 글에서 하스는 “북한 위협이 제기하는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북한을 제거하고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파격인 동시에 미국의 대북 여론이 얼마나 강경하게 변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은 하스 원장이 한국과 중국을 방문, 외교안보 전문가들을 만난 직후 나와 더욱 의미심장하다. 한국은 물론 중국 최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도발→대화•협상→합의→파기’의 악순환이 거듭되며 쌓인 ‘북한 피로감과 불신’을 고려할 때 이런 기조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근본적 방향전환이며 민주, 공화 어느 당이 집권해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향후 대북 정책은 핵∙미사일에 집중했던 과거와 달리 인권과 사이버(Cyber)를 포함한 3개 축을 중심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이들 축을 중심으로 포괄적 압박과 제재를 가동해 근본 해법을 추구하는 방식이 예상된다.
남북관계 서두르는 박근혜 정부, 미국과 엇박자 초래 가능성
미국의 대북 정책이 강경해지고 있는 것과 달리 박근혜 정부는 금년 초부터 2015년을 ‘남북관계 개선의 골든 타임’으로 정하고 북한과의 대화와 남북 관계 개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비핵화가 반드시 (남북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비핵화를 모든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던 그 동안의 입장과 크게 다르다.
정부는 2014년과 별 차이 없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신년사에도 ‘북한이 남북대화에 적극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데 따라 최고위급 회담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회담 조건으로 ‘한미군사훈련을 포함한 전쟁 책동과 제도통일 논의 중지’를 요구했다. 남한이 변해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최고위급회담을 언급했다는 점에 주목해 ‘전향적 ‘이라고 평가했다.
통일부는 1월 19일 외교•통일•국방•보훈처 합동 업무보고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 개최, 한반도 종단 및 대륙철도 시범 운행, 개성공단 국제화 추진, 육상•해상 복합물류통로 개설 등을 주요 사업으로 제시했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언급도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이유는 ‘남북 대화와 협상이 계속 중단되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이 고도화되는 상황을 방치하게 된다. 대화를 해서 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남북 대화와 관계 진전이 북핵 문제 해결과 안보 상황의 화를 막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햇볕정책과 평화번영 정책을 추진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험을 통해 이점은 이미 충분히 입증됐다. 더구나 북한은 ‘핵 문제를 비롯한 안보 문제는 미국과, 교류와 협력은 남한과 한다’는 분리 대응 전략을 견지해 왔음을 고려할 때, 비핵화와 교류•협력이 상호 연계되는 것은 물론 선순환 관계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이를 깨닫고 있는 미국이 한국의 대북 유화 정책을 수용하기는 어려우며 결국 한미 엇박자는 물론 불신과 갈등마저 초래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박 대통령이 ‘드레스덴 선언’에서 밝혔듯 인도적 접근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상황을 개선함으로써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촉진하겠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의도라면 오바마 대통령이 말한 ‘정보 유입을 통한 북한 변화’ 정책과 일맥상통해 한미 엇박자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통일부가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제시한 사업들은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에게 미칠 영향도 모호한 전시성 사업들이다.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목표에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에 안보 착시 현상을 초래할 위험성마저 있다.
대규모 전시성 사업보다 북한 주민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인도적 지원 사업을 다양화하고 국제 사회와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북한 사회의 변화를 촉진•확산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한미공조를 강화해 ‘대북정책 엇박자’에 대한 우려도 불식시킨다.
결론
속담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정부가 서두를수록 우리의 대북협상력은 저하되고 한미공조도 어려워진다.
북한은 한미 공조를 흔들거나 와해시키기 위해 민족공조를 내세우며, 도발과 대화를 섞은 ‘화전 양면전략’을 구사해 왔다. 북한이 한미공조를 껄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전략적 결단을 하게 만들려면 어느 때보다 확고한 한미 공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상황 관리나 단기 성과를 얻어내는 수준의 공조를 넘어 양국이 근본적인 전략을 함께 마련하고 이를 위해 임무도 적절히 분장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북한과의 대화와 접근을 서두르기보다 이를 위한 여건 확보에 보다 노력해 북한 스스로 대화의 장으로 나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섣부른 대화보다 강한 압박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