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만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과연 북한 비핵화는 가능했을지, 한·미동맹의 미래는 어찌 되었을지 정말 아찔하다. 대화만능주의가 가져올 수 있었던 최악의 결과를 피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연극은 끝났다.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고 현실로 돌아가듯 협상 과정에서의 진실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핵을 포기할 의지가 없는 북한의 행보는 당분간 협상을 냉각기로 몰고 갈 전망이다. 하지만 극장에서 또 다른 연극이 공연되는 것처럼 외교 무대에서도 새로운 협상 국면이 찾아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경우 우리의 생존이 다른 이들의 선택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거 없는 희망에 기대서는 안 되며 비핵평화의 정도(正道)를 구현해야 한다. 하노이 이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비핵화 개념’을 확인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개념이 다르다고 했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딴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정부의 비핵화 개념은 북한과 다른가, 미국과 다른가. 우리 비핵화 개념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핵확산방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복귀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개념을 북한에 확인하지 않았다면 직무유기다. 확인하고도 침묵했다면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비핵화 로드맵도 필요하다. 북한이 우리 비핵화 개념에 동의할 때 활용할 제대로 된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북한의 변덕에 따라 변하지 않고 어떤 수준의 비핵화를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 낼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 북한이 비핵화를 거부하면 기다려야 한다. 대화의 창을 열어두고 북한이 핵무기와 경제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면 된다. 이걸 ‘전쟁하자는 거냐’는 식의 흑백논리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긴장을 조성하지 않고 상황을 관리하면 된다.
한·미 공조에 더 힘써야 한다.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하고 대화로 이끌기 위해 미국과의 협력은 불가피하다. 미국을 상대하고자 하는 북한의 의도와 대북제재라는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정세 흐름을 읽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이야기만 꺼내선 안 된다. 발언도 신중해야 한다. 하노이 정상회담 직후 이뤄진 트럼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 전화 내용에 ‘중재’란 표현은 한마디도 없었다고 한다. 북한에 비핵화를 설득해 달라고 했는데 ‘중재’ 요청으로 말을 바꾼다고 중재자가 되는 건 아니다. 신뢰만 손상돼 훗날 정작 일을 해야 할 때 제 역할을 못한다.
비핵화 협상의 장기화에 대비해야 한다. 북핵 문제나 평화체제 논의는 현 정부 임기를 넘어서 이어질 것이다. 의욕이나 양보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감시정찰 능력만을 제한한 군사합의처럼 다음 정부에 짐만 남긴다. 지금은 비핵화 지연에 따른 안보 공백을 걱정하고 군사대비태세 약화를 예방해야 한다. 언제 어떤 조건에서 연합군사훈련을 다시 복원하고, 어떤 방향으로 확장억제를 강화할지 준비해야 한다.
국론을 모아야 한다. 자기편 목소리만 듣는 것은 국론통합이 아니다. 남남갈등을 사실상 방관하는 일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목소리도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대안을 만들 수 있고 정부의 대북정책에 힘이 생긴다.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끈 비스마르크는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경험해야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1년3개월 동안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제는 북한의 과거 협상 전략을 냉철히 분석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 역사의 교훈에서 배우는 정부가 현명한 정부다.
* 본 글은 3월 18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