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는 말이 있다. 최고지도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회담 결과를 포장해 내는 외교적 수사(rhetoric)다. 하노이 미·북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북한의 영변 핵시설 동결과 미국의 연락사무소, 종전선언, 인도적 지원 등이 합의될 것이다.
양 정상은 엄청난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겠지만, 이런 속도라면 미공개 농축우라늄시설, 핵물질과 핵무기의 신고·검증·폐기에 10년도 더 걸린다. 그사이 미국과 한국의 국내 정치적 변화가 있다면 협상은 또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수사적 수준을 넘어 진정한 평화의 초석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변 핵시설에 대한 철저한 신고·검증·폐기가 합의되어야 한다. 현재 비핵화 협상은 꼬인 상태다. 당초 핵능력의 동결 및 신고, 의심시설 방문 및 시료 채취를 포함한 과학적 검증, 핵능력 폐기의 3단계로 협상을 진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러한 방식을 거절했다. 그 대신 핵능력을 각각 따로 떼어 협상하는 단계적 방식을 주장했고 특유의 버티기를 통해 관철해냈다. 그 결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영변 플러스알파`를 강조했다. 영변 핵시설의 폐기를 먼저 논의하고 진전이 있으면 그 이상을 풀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의 출발점은 영변 핵시설이다.
과거 6자회담 당시 북한은 영변에 있는 플루토늄 생산시설의 동결 및 불능화를 수용한 바 있다.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은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가 아니다. 그간 고도화된 북한의 핵능력을 고려할 때 새로운 진전이 필요하다. 그것은 영변 농축우라늄 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 전체의 신고·검증·폐기이며, 특히 의심시설 방문 및 시료 채취를 포함한 검증이 핵심 관건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단순 참관을 수용한다면 핵물질을 추적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 합의문에 `과학적으로 검증된` 영변 핵시설의 폐기가 담겨야 한다. 상응조치로서는 금강산 관광이 추가될 수 있다.
당초의 낮은 기대를 깨고 미·북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을 넘어서는 `플러스알파`까지 합의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다만 이 역시 우리의 국익이 반영되는 방향이어야 한다. 만일 북한이 핵무기를 끝내 보유하고자 한다면 핵능력은 동결 수준으로 합의하는 대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협상을 타결하려 들 수 있다. 본토 안전을 중시하는 미국이 이러한 제안을 수용하고 상응조치로 개성공단 재가동을 합의해 준다면 비핵화는 사실상 물 건너간다. 개성공단이 재가동되면 북·중 간 합작사업도 재가동된다. 동북 3성 주민들의 빗발치는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중국이 북·중 간 합작사업 단속을 점차 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재 이행에 큰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개성공단이 열리면 북한은 사실상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고, 추가적인 비핵화 조치를 얻어내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플러스알파`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아닌 전체 핵 활동의 동결이나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의 신고·검증, 또는 비핵화 로드맵 합의와 같은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여야 한다. 이 정도면 북한 비핵화의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고 상응조치로서 개성공단 재가동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다. 거란의 침입에 맞선 고려의 외교관 서희가 강동 6주를 돌려받은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던 일도 교섭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만큼 미·북 양측의 창의적 협상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모두 우리에게 득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의 신기원을 이룰 역사적 합의를 기대하지만, 혹여나 우리의 국익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한미 공조 원칙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 본 글은 2월 25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