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새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Rodrigo Duterte)가 드디어 내일 (6월 30일) 취임한다. 필리핀 대통령 선거 운동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두테르테의 이름이 한국 사람들 입에도 회자 될 정도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두테르테는 필리핀의 트럼프 (Trump)로 알려졌다. 거친 발언,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극단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발언 등으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두테르테는 22년 동안 민다나오 (Minidanao)의 다바오(Davao) 시장을 지냈다. 필리핀에서도 가장 경제적으로 취약한 민다나오 섬, 그리고 그 중에서 범죄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범죄가 많았던 다바오의 시장을 22년동안 지낸 비결은 범죄에 대한 그의 불관용 원칙이다.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는 대통령이 된다면 재임기간 동안 10만명의 범죄자를 처형하겠다는 공약으로 관심을 끌었다.
범죄와의 전쟁과 두테르테
두테르테를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의 이전 동남아 국가 지도자가 연상된다. 우선 범죄와의 전쟁이란 대목에서는 전 태국 총리인 탁신 (Thaksin)이 연상된다. 그 역시 마약을 뿌리 뽑겠다고 선언한 이후 마약 소지 의심만 있어서도 경찰이 발포를 할 수 있게 해서 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2006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에서 쫓겨 날 때까지 탁신의 이런 스타일은 많은 논란을 낳았고, 권위주의적, 강압적 통치를 한다는 평가를 가져왔다. 반면에 질서와 안정을 바라는 사람들이 탁신의 범죄와의 전쟁에 대해 가졌던 평가는 강압적이라는 평가와 달리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범죄를 줄이는 결과만 가져오면 된다는 생각이다.
적법한 절차보다 눈 앞의 결과를 중시하는 이런 통치 스타일은 의외로 생명력이 강하다. 특히 권위주의 시절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명령하는 대로 움직였던데 익숙한 사람들은 민주화 이후의 불확실성, 혼란이 두렵기만 하다. 민주화가 몰고온 바람이 가라 앉고 안정된 국면으로 접어들기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불확실성을 참을 수 없다. 여기서부터 과거 권위주의적 스타일, 절차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통치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피어 오른다. 탁신과 두테르테는 이런 점에서 닮았다.
파퓰리스트 두테르테
두번째로 연상되는 사람은 전 필리핀 대통령은 에스트라다 (Estrada)이다. 필리핀의 정치는 전통적으로 토지와 기업을 독점한 소수 명문가(家)에 의해 지배되어왔다. 대통령, 상원 및 하원의원, 고위 공직의 절대 다수, 그리고 경제적 부를 백 여 개 남짓한 가문이 지배해왔다. 일반 사람들은 정치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에스트라다는 이런 명문가 출신이 아니다. 빈민 출신으로 영화배우로 인기를 얻었고 그 인기에 기반해 마닐라시 시장을 지냈다.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 당해왔던 보통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2001년 엘리트와 명문가가 지배하는 의회에서 불법도박, 공금 유용 혐의로 탄핵을 당해 대통령 궁을 떠날 때도 보통 사람들은 에스트라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두테르테의 경우 빈민 출신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명문가 출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두테르테는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 보다 유사하다. 많은 필리핀의 보통 사람들이 두테르테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에게서 친근감을 느꼈을 법 하다. 두테르테의 인기는 이렇게 설명이 가능하다.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서 배제된 채 엘리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국가에서 두테르테나 에스트라다는 언제나 출현 가능하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국가 지도자로서 적합한가라는 의문이 항상 생긴다. 그러나 막상 선거에서는 이런 파퓰리스트적 지도자들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 모으는 경우가 많다.
친중주의자 두테르테 (?)
마지막으로 두테르테를 따라다니는 묘사 중 하나는 친중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필리핀과 중국간 중재재판소 결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남중국해 이해당사자들의 눈이 필리핀과 판결에 쏠린 가운데 한때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 이 소송을 취하할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있었다. 7월 1일이 애초 판결일이었는데, 6월 30일 두테르테가 취임하자 마자 첫번째 정책으로 소송 취하를 할지 모른다는 예상이다. 보다 현실적 예측으로 두테르테가 취임하면 전임 아키노 (Aquino) 대통령 시절 불편했던 중국과 관계가 개선되는 것을 넘어서 중국과 필리핀 사이 관계가 가까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아키노에 비해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취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두테르테가 중국계 후손이기 때문에 친중 노선을 택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테르테를 친중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남중국해에서 분쟁에도 불구하고 필리핀과 중국 관계가 최근처럼 악화된 것은 아키노 대통령 시절의 특이한 현상이다. 다시 말해 아키노 대통령 시절에는 중국과 대척점에 선 미국과 매우 가까운 방향으로 필리핀의 외교정책이 자리를 잡았었다. 두테르테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지난 정부에서 미국으로 많이 치우친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보다 중립적인 위치로 돌려놓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이 정도 변화를 넘어 전면적 친중으로 한번에 이동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남중국해에 걸린 국가적 자존심이 지난 정부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에서 일반 국민들의 직접 지지에 정치적 생명을 건 파퓰리스트인 두테르테가 친중 노선을 택한다면 이를 국민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두테르테는 중국에 대해서 관계 개선을 시도하되 어떤 선에서 멈출 것이고 그 선은 중국과 미국 사이 중립적인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 본 블로그의 내용은 연구진들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