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은 전쟁을 하는 법에 관한 교과서지만 가장 큰 가르침은 전쟁을 피하라는 것이다. 이기더라도 잃는 것이 많은 만큼 피해를 예방하라는 것이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싸우기 전에 철저히 준비하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다. 오래전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지소미아 종료 과정과 그 결과로써 빚어진 일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정부의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 결정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외교적으로 한국은 한·미·일 안보협력에서 일탈해서 북한과 중국의 집중 공략을 당하는 외톨이가 됐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외국자본 이탈 등으로 환율이나 주식시장이 요동쳐 가뜩이나 힘겨운 경제에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정부의 고육지책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깊은 반성도 필요하다. 이번 지소미아 연장 발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협상의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완패다. 그간 당당하게 주장하던 백색국가 지정 제외 요구는 실무협상을 시작하는 수준으로 끝났고, WTO에 제소하는 우리의 압박카드마저 포기했다. 언제나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그 경우 지난주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부끄럽지 않게 모양새만 갖춘 합의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 이후 지난 90일간 우리는 많은 상처를 입었다.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한 외교적 상처, 국민 여론의 분열로 인한 국내 정치적 상처, 일본에 밀린 듯한 합의로 인한 국격과 자존심의 상처가 그것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몇 년만 일해도 알 만한 초보적인 실수를 90일 전에는 왜 했을까. 먼저 정부의 외교적 시야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었다. 지소미아는 한·미·일 안보협력에 관한 문제고, 본질적으로 미국과의 문제였다. 그런데 정부는 미국과 무관하다며 한·일 간의 문제로 국한시켜 봤다. 그러니 일본은 변하지 않는데, 엉뚱한 곳에서 갈등을 빚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정부 내 외교안보정책 결정 과정의 문제점도 커 보인다. 전문부서인 국방부와 외교부의 의견을 듣지 않고, 청와대 주도로 문제를 풀려다 발생한 참극이기 때문이다. 국방부와 외교부는 지소미아 종료와 관련해 반대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를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사견임을 전제로 지소미아 연장 필요성을 강조했을 정도다. 상황이 이럴진대 청와대의 누군가는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한 것이다.
국내 정치적 고려도 한몫한 것 같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 당시 관련한 여론조사를 꾸준히 했다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중요한 외교안보 사안을 국민여론을 활용해 돌파하겠다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을 자인한 셈이다. 반일감정을 활용한 포퓰리즘이든, 당시 문제가 증폭되고 있던 특정인에 대한 검증 문제든 국내 정치적 목적에서 외교안보 사안을 활용했다면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이제 지소미아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은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더 중요하다.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전문부서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국내 정치가 아닌 국익을 중심으로 한 의사결정을 해나가면 된다. 이제라도 외교안보정책의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면 지소미아 문제는 남은 2년 반 임기를 위한 좋은 보약이 될 것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지 않았는가.
외교에서는 51%의 승리를 거두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이기는 것이 제로섬(zero sum) 게임에서 지속가능한 승리를 거두는 방법이라는 의미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과 조건부 연장 과정은 80%의 승리를 거두려다가 그 반대가 된 사례다.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인 탓이다. 그렇다면 한·일관계의 다양한 이슈를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긴 게임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외교 전략도 중요하지만, 먼저 그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 본 글은 11월 25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