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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1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앨 고어는 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 연설에서 북한에 대해 “창조적인(creative) 외교”를 펼치겠다고 밝혔다. 그해 10월 5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는 “북한에 대한 점진적이고 꾸준한 미국의 제재 해제가 잠정적이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만일 그해 대선에서 초박빙으로 조지 W 부시가 아니라 앨 고어가 당선되었더라면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물려받아 한·미 간의 대북정책 공조가 최소 2년은 더 지속되었을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시간에 쫓겨 마무리 짓지 못한 북·미관계 개선과 수교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북한 핵기술은 아직 초보 단계였다.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 정상국가로 유도하고 경제 지원 등 상호의존의 네트워크로 북한의 행동을 제어해나갔다면, 초기에 핵 개발의 싹을 자를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아무리 잘못되었어도, 최소한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처럼 북한이 핵 개발의 가속 페달을 밟아 실질적 핵보유국으로 치닫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024년 미국 대선은 2000년 대선보다도 한반도의 미래에 훨씬 더 심각한 파장을 미칠 것이다. 미국 언론인 자카리아가 최근 지적했듯이 이 선거의 핵심 쟁점은 외교정책이 될 것이다. 올 3월 퓨 리서치에 의하면 공화당 지지자들 71%가 미국이 이제는 해외문제를 떠나 국내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트럼프 후보뿐만 아니라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매카시 하원의장 등이 공유하면서 공화당 주류 정책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만일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로 갈 것이다. 트럼프의 참모 스티브 배넌은 “나는 우크라이나 같은 것은 신경도 안 쓴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미국의 남쪽 국경이 (멕시코 불법 이민으로) 침공당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트럼프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고 말했으니 당선되자마자 그리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이 애써 규합한 자유주의 서방국가들의 연합전선은 와해될 것이다. 러시아·중국 간의 권위주의 연대가 힘을 얻고 그동안 관망하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상당수가 중·러연대에 참여할 것이다. 푸틴의 말대로 “자유주의는 죽고” 규칙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전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튼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중 대만의 안보도 보장하지 않았다고 자서전에서 말했다. 트럼프 2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후퇴하면, 그것은 대만에 대한 미국의 보호 의지도 약화될 것으로 해석되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 통일 스케줄을 앞당길 수도 있다.

미국 민주주의도 상당히 흔들릴 것이다. 트럼프 재선 준비팀인 AFPI(America First Policy Institute)는 집권 이후 트럼프 1기 때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던 관료세력과 사법부를 확실히 장악할 안을 짜고 있다. 최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국은 폴란드나 헝가리와 같은 비자유주의적(illiberal) 민주주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무엇보다 미군 철수 가능성이 크다. 한국처럼 잘사는 나라에 미군을 파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오랜 생각이었다. 핵 능력도 없는 한국은 아무 대안 없이 안보 공백 상태에 내던져지고 그로 인한 정치, 경제적 파장은 심각할 것이다. 미·북 간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어도 불안하다. 동맹을 불신해 온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정부의 입장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해 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미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한국 정부와는 상의 한마디 없이 (아마도 김정은 위원장의 즉석 요청을 받아들여)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결정한 바 있다.

한국은 지난 70년 동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한국이 이웃 강대국들이나 북한의 횡포를 걱정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경제를 발전시켜온 것은 영토주권 존중, 자결권 존중,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개방적 세계경제질서는 한국의 무역 주도 성장을 도왔다. 그런데 이제 국제 리더십의 공백으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 한국은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광야에 홀로 서게 될 것이다.

1980년대 초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전두환의 광주 학살을 묵인하고 우파독재를 지원한 미국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자국의 국익만 생각하고 동맹국의 민주주의는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 관점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진보진영의 사고 속에 녹아져 있다. 그런데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미국 리더십의 횡포가 아니라 약화가 초래하는 훨씬 더 큰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보수진영의 입장도 당혹스러워졌다. 핵 무장한 북한의 실존적 위협 앞에서 오래 믿고 의지해 왔던 미국이 떠나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는 진보냐 보수냐, 죽기 살기로 싸우고만 있을 상황이 아니다. 정(正), 반(反) 대결을 지양하고 합(合)으로 모아져, 모두가 함께 생존의 묘수를 치열하게 모색해야 할 때다.

 
* 본 글은 7월 22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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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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