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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은 성매매와 용병이라고들 한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용병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은 철학자·역사가로 유명하지만, 민병대를 이끌던 용병대장이었다. 14세기 백년전쟁이 끝난 후 존 호크우드는 직업을 잃은 군인들을 모아 ‘화이트 컴퍼니’라는 역사상 최초의 용병 회사를 만들어, 도시국가들이 경합하던 이탈리아 지역에서 용병으로 활동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국민군 체제가 뿌리내리면서 용병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정체성이 바로 선 국가라면 국민은 기꺼이 병역의 의무를 이행했고, 돈에만 좌우되는 용병은 수요도 믿음도 지극히 낮아졌다. 따라서 용병은 국민이 기꺼이 국가를 지킬 수 없는 경우나 영국의 동인도회사처럼 국가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경우에나 쓸모 있었다. 어떤 경우건 용병의 등장은 혼란을 뜻했다.

 
현대적 용병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 후 현대적 세계 질서가 완성된 이후 용병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익집단화되었다. 국가 질서가 바로 서지 못한 중동과 아프리카 신생국가들의 권력자들은 용병을 필요로 했다. 일례로 특수부대의 효시인 SAS의 창시자였던 데이비드 스털링은 1965년 와치가드 인터내셔널이라는 용병 회사를 만들어 아랍과 아프리카의 독재자들과 거래하면서 돈도 벌고 영국의 이권을 지켰다.

영화처럼 수많은 용병이 등장했다가 신생국가들과 독재자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용병들은 퇴장해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냉전 종식과 민족 분열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용병들이 되살아났다. 냉전 종식 후 병력 부족을 겪고 있는 각 군을 지원하는 업무에서 시작하여 아주 일부의 경우에는 평시 경호와 경비의 수준을 넘어 전투까지 대신 수행했다. 이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PMC(Private Military Company·민간 군사 기업)로 불리게 됐다. 특히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시작하면서 PMC의 수요는 급증했다. 특히 2003년 이라크 자유 작전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군정청이 이라크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충분하지 못한 지상군 병력을 대신하여 PMC의 활약이 늘어났다. 특히 당대 최대의 PMC ‘블랙워터’는 팔루자 지역에서 소수 정예 요원들로 반군의 공격에서 미국 영사관을 지켜냄으로써 최강의 무장 집단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소말리아 근해에서 해적이 창궐하면서 상선을 지키는 해상 보안이 PMC의 새로운 비즈니스로 떠올랐다.

 
서구 PMC의 하락과 중·러 PMC의 부상
 
서구 PMC의 직접적인 무장 활동은 현재는 지극히 줄어들었다. 이라크는 이미 미군이 철수하고 현지 정부가 구축되면서 해외 PMC들의 라이선스를 회수했고, 아덴만 해적들은 2011년 리비아 사태 해결 후 다시 투입된 서구의 연합해군 활동으로 줄어들었다. 202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 더 이상 전쟁이 없어지면서, PMC의 무장 활동은 대대적으로 축소된 것이다. 게다가 2007년 블랙워터의 이라크 시민 학살사건 이후 PMC의 무장 활동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면서 제도적 제약도 늘어났다.

서구의 PMC들이 주춤하는 사이, 중국과 러시아의 PMC들이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약진했다. 약 20~40개 중국 사설업체들이 약 40여 개국에서 활동하면서, 해당 지역에 존재하는 일대일로(一带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관련 사업에서 이권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국 업체들은 아직 민간 경비 기업(Private Security Company)으로 군사적 요소는 부족하지만, 점차 PMC의 모습으로 변환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공격적인 활동을 해 온 것은 바로 러시아 PMC들이었다.

 
바그너그룹의 약진
 
러시아에는 PMC라는 존재를 인정할 법적 근거가 없다. 국방부와 외교부가 모두 PMC의 정식 인가를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30~40개의 PMC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 PMC는 서구처럼 민간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더욱 정확히는 GRU(정보총국으로 러시아의 군 정보기관)의 필요에 따라서 생겨난 조직들이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GRU가 해외 공작을 수행해 왔으나 소련 해체 후 활동에 제약이 생겼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의 국방개혁 과정에서 GRU는 축소 대상으로 지목되면서 활동 범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2008년 조지아 전쟁 등을 겪으면서 해외 공작의 필요성은 더욱 강화되었고, 2012년 새롭게 임명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은 GRU의 역량 강화로 노선을 바꿨다. GRU 예하의 특수부대를 당장 늘리는 것은 어려웠고, 특히 서구의 PMC 활용 사례를 연구한 러시아는 자신들도 PMC를 만들어 GRU의 일선 부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2013년 바그너그룹을 포함한 여러 PMC가 생겨났고, 이들의 첫 작전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의 하이브리드전이었다. PMC들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선봉이 되어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돈바스 지역에서 반군들을 모아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항하도록 했다. 크림반도 복속 이후 러시아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돕기로 하면서, 부족한 해외파병 전력을 바그너가 충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시리아 정부를 지키는 과정에서 정부 측 유전을 지켜내면서 이권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는 시추 개발 권리까지 받으면서 크게 성장한다.

바그너는 2017년에는 아프리카에 진출하면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리비아 등에서 정부를 지켜주고 이권을 받는 사업을 확대했다. 바그너 같은 PMC는 GRU에 있어서는 매우 유용한 정책 수단으로, 러시아 정부의 개입을 부정할 수 있는 카드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PMC가 벌어들이는 이익은 예브게니 프리고진처럼 PMC 사업권을 따낸 푸틴 측근들에게 돈벌이 수단이자, 궁극적으로 푸틴의 이익이 되었다.

 
바그너의 반란과 그 막후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하면서 바그너는 다시 우크라이나로 소환된다. 러시아 정규군의 졸전이 계속되자 이제 대규모의 병력을 모아 주요 지역을 책임져야 했다. 바그너의 실소유주인 프리고진이 표면에 나선 것도 이 시점부터였다. 프리고진은 푸틴으로부터 사면권을 받아내어 감옥을 돌면서 죄수들을 지원병으로 모집했다.

이렇게 ‘수인(囚人)부대’를 구성한 바그너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2023년 초 솔레다르와 바크무트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침공 이후 승리에 목말라 있던 러시아 대중에게 프리고진과 바그너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쟁 속에서 바그너는 무려 5만 명 규모로 덩치가 커졌지만 더 이상 PMC라기보다 군대에 가까워졌다. 결국 병력이 부족한 러시아군은 전쟁에서 활동 중인 모든 PMC를 7월 1일까지 러시아군에 편입할 것을 지시했다.

바그너의 러시아군 편입은 PMC로서의 소멸을 의미했다. 프리고진은 이를 뒤집고자 푸틴과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지만, 푸틴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러시아군 편입까지 일주일 앞둔 6월 24일, 프리고진은 바그너의 정예 병력 약 8000여 명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는 PMC의 생존을 위한 무력시위였지만, 러시아 정부에는 쿠데타였다. 결국 양측은 ‘협상’으로 프리고진이 벨라루스에서 바그너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고, 수인부대를 포함한 나머지 대원들은 러시아군에 편입하도록 했다. 그러나 푸틴이 자신에게 반항한 프리고진을 살려둘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렇듯 러시아는 PMC를 국가이익의 확보 수단으로 활용해 왔지만, 한계가 드러났다. PMC는 기업일 뿐 충성심을 가진 군대가 아니다. “보수에 매달려 군인이 된 이들을 전장에 붙잡아 둘 방법은 없다. 이들이 국가를 위해 전선에서 죽어주길 바란다면 큰 실수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용병을 평가한 말이다.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PMC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겠지만, 그 한계를 보여준 것이 이번 바그너 반란이다.

 
* 본 글은 이코노미조선 500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About Experts

양욱
양욱

외교안보센터

양욱 박사는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전문가로서 20여년간 방산업계와 민간군사기업 등에서 활동해왔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군사기업 중 하나였던 인텔엣지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운용했다. 회사를 떠난 이후에는 TV와 방송을 통해 다양한 군사이슈와 국제분쟁 등을 해설해왔으며, 무기체계와 군사사에 관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국방대학교에서 군사전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안보포럼의 연구위원이자 WMD 센터장으로 북한의 군사전략과 WMD 무기체계를 분석해왔고,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국방부, 합참, 방사청, 육/해/공군 등의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해왔다. 현재는 한남대학교 국방전략대학원,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군사혁신론과 현대전쟁연구 등을 강의하며 각 군과 정부에 자문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