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이 ‘노딜(no deal)’로 끝났다. 핵문제를 둘러싼 한미간의 입장 차이를 확실히 드러낸 시간이었다. 대화와 협상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미국은 빅딜을 견지할 것이며, 문재인 정부가 중재안으로 생각했던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이나 ‘조기수확(early harvest)’은 적어도 당분간 설 곳이 없게 되었다. 한미 정상회담의 여파는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확인한 후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한국의 중재노력을 오지랖이 넓다며 평가절하 했다. 어설프게 중간에 있지 말고 확실히 북한 편을 들라는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했다. 4.27 판문점정상회담 1주년을 계기로 한 4차 남북정상회담이 목표였을까? 문재인 정부는 준비가 부족했던 한미 정상회담을 서두르다가 결국 한국은 미국과 북한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두 마리 다 놓치는 형국이 된 셈이다. 대화와 협상의 모멘텀을 확보하고 의미있는 비핵화로의 진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왜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났는지에 대한 원인분석을 하고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의 추진방향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미 정상회담 준비 과정: ‘굿 이너프 딜’과 한국 정부의 낙관론
‘굿 이너프 딜’의 탄생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청와대는 북미간 이견을 조율하기 위한 절충안을 마련했다. 그 결과 미국이 제기한 ‘빅딜’ 대신 “’스몰딜’을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히 괜찮은 거래)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며, 빅딜과 스몰딜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굿 이너프 딜’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충분히 좋은 거래’다.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의 최종상태나 로드맵을 포괄적 합의라는 형태로 북한이 받아들이고, 반대로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협상은 포괄적 합의의 단계적 이행으로 포용하려 했다.
하지만 ‘굿 이너프 딜’은 단계적 이행과 ‘조기 수확(early harvest)’에 정책적 방점이 있다. 낮은 단계의 비핵화와 제재완화 조치라도 먼저 교환해 신뢰를 쌓자는 것이다. 일시에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반영되었고, 미국이 주장하고 있는 빅딜 방식의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특히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비핵화의 의미 있는 진전을 위해서는 한두번의 연속적인 ‘얼리 하베스트’(early harvest·조기 수확)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조기 수확을 통해서 상호신뢰를 구축하게 되고, 구축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최종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고 판단한다”고 언급함으로써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굿 이너프 딜’이 미국의 빅딜과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는 미국의 빅딜과 북한의 스몰딜의 절충안을 준비했고 그 이름을 ‘굿 이너프 딜’이라고 말했지만 방점은 스몰딜과 조기 수확에 있었고 이를 정부 고위 관계자가 직접 언급함으로 인해 미국의 불필요한 오해(스몰딜의 다른 버전)를 낳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측이 방미를 앞두고 포괄적 합의에 해당하는 빅딜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북한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이 미국의 동맹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고, 그 결과 당장에 다가온 한미 정상회담에는 부정적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 되었다.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정부의 낙관적 접근
우리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에 이상할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미국의 의도를 읽지 못해서 실수를 한 것인지, 실무 조정과정에서 양측의 입장이 갑자기 틀어진 것인지, 아니면 미측 실무진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방향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정부의 낙관적 접근은 한미 실무진간의 치열한 추가논의의 필요성을 낮게 평가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결과 한미 정상회담은 ‘노딜’로 끝나게 된다.
정상회담 조율의 실무책임은 신임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이 맡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4월 5일 미국과의 한미정상회담의 의제 조율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뒤 “(비핵화 논의의) 최종 목적지, 즉 ‘엔드 스테이트’나 로드맵에 대해서는 우리(한미)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다음주 정상회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1 그는 이어 “안보실 차장으로 첫 번째 방미였고, 제 상대방인 찰스 쿠퍼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부보좌관과 정상 간의 의제 세팅을 논의했다. 대화는 아주 잘됐다”며 정상회담의 전망을 낙관했다. 동시에 미국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그랬는지, 김 차장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는 미국 측과 논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차장의 방미를 둘러싼 최대 관심사는 한미가 북미대화 재개를 위한 비핵화 방식과 상응 조치에 대한 합의를 이뤘는지 여부였다. 문재인 정부가 새롭게 제시한 ‘굿 이너프 딜’을 미국이 지지할 것인지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김 차장이 이처럼 긍정적인 전망을 함으로써 다가올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을 ‘지지(support)’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되었다.
하지만 김 차장의 긍정적 전망과 달리 워싱턴의 정책 서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면서 ‘일괄타결식 빅딜’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해상에서 정유 등 석유제품을 북한 선박에 불법 환적하는 일에 한국 선박 루니스호가 활용되었다며 제재리스트 주의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여론을 잘못 읽고 있었던 것이다.
독특한 정상회담 일정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출발하기에 앞서 언론에 정상회담 일정이 발표되었다. 약 20분간의 단독정상회담, 그 이후 20분 간 소규모 회담, 그리고 오찬을 곁들인 확대정상회담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발표된 정상회담의 일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정상회담 일정이 짧았다. 다자회담 계기 정상회담이 아니고 북핵 협상 조율을 위해 특별히 미국을 방문했는데 오찬을 포함해서 두 시간이 잡힌 것이다. 실질적으로 오찬을 하게 될 경우 의제를 논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에 그 이전에 충분한 논의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발표된 두 시간의 일정은 특히 오찬 이전에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단독 정상회담과 소규모 회담의 시간은 비핵화 로드맵을 논의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시간이었다.
단독회담의 형식도 독특했다. 영부인을 대동한 단독회담이라며 상당히 이례적인 의전적 예우를 미국이 베푼 것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북핵 문제를 논의할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영부인 대동 시간을 갖는 것은 과연 이번 정상회담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전에 합의 내용이 잘 조율되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 정상회담에서 실질적 논의를 이루어 내기는 절대적인 시간부족이 예상되었다.
공동 성명이나 공동 기자회견이 없다는 점도 우려되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이나 미북 정상회담을 다시 견인할 대화의 동력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문서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굿 이너프 딜’에 대해 지지를 확보하는 요식절차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 성명이나 공동 기자회견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인데 일정에 없었다. 만일 공식적인 방식으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기가 제한되었다면 공동 언론 발표를 통해 보다 덜 공식적인 방법으로 지지를 해 줄 수 있었음에도 아예 공동 언론 발표도 없었다.
이러한 독특한 일정 합의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해줄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지할 마음이 있었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로드맵을 들어볼 시간을 배려했을 것이고, 발표형식도 최소한 공동 언론 발표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측이 이러한 조치들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한국 정부의 새로운 접근을 동의해줄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국 정부는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했어야 했다. 의전적 예우를 줄이더라도 실질적 논의의 시간을 확보하거나, 아니면 정상회담을 더 뒤로 미루면서 실무협상을 더 진행했어야 했다. 먼저 어떻게든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지지(support)’ 발언을 이끌어 내야 했다. 미측이 ‘지지’를 못하겠다면 ‘주목(notice)’이라는 말이라도 얻어내야 했다. 이것이 당초 정상회담의 목표였고, 그래야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후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실무협상만으로는 부족해서 정상간 대화로 미국을 설득해야 했다면 영부인 대동 단독회담이라는 의전을 포기해야 했다. 사진촬영을 곁들인 공개행사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었다. 과거 정상회담 관행은 영부인들은 처음에 사진만 촬영하고 다른 방으로 이동해서 영부인간의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트럼프 집무실 내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정상회담 모두발언과 기자 질의응답을 가졌다. 겉으로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실질적인 의제 논의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빅딜’과 ‘제재완화 반대’를 말해버려 미국의 입장은 더더욱 바뀌기 어렵게 되었다.
만일 북한 비핵화 로드맵과 관련하여 한미간 사전 조율이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정상회담 일정을 받았다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뒤로 미뤘어야 했다. 결국 미국도 궁극적으로는 포괄적 합의가 한 번에 이행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한국 정부의 ‘굿 이너프 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기는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미국이 먼저 입장을 낮출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미국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우리 정부가 너무 낙관적으로 접근했고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정상회담이 되었다.
위와 같은 무리를 한 것은 “한국판 톱다운 방식”에 대해 집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실무진 혹은 고위급에서 타결이 안되는 문제를 정상간 회담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톱다운 방식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 화근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설득하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준비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나 이견을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하노이 정상회담을 전후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변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하노이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련 부처간 긴밀한 협의를 통해 입장이 설정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트럼프 대통령도 북핵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북한에 대해 어떠한 입장으로 대할 것인지를 사전에 설정했다.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의 트럼프 대통령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문재인 정부는 이를 간과하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입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고집하였고 그 결과는 참담하였다.
정상회담에서 나타난 한미간 비핵화 로드맵 입장차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된 기자회견을 통해 기존 빅딜 입장을 강조하면서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재개 등과 같은 한국 정부가 생각하고 있었을 복안들을 거의 모두 거부했다. 합의한 것이 있다면 톱다운 방식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뿐이다. 백악관이 발표한 정상회담관련 자료에는 양국 정상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북한의 비핵화(FFVD of the DPRK)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permanent peace)에 관해 논의(discuss)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의견을 같이 했다”는 정의용 안보실장의 설명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대화 재개의 필요성에는 원칙적으로 공감대를 이뤘지만, 비핵화로 가는 과정, 대북 제재나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 그리고 미북 대화 재개를 위한 조건 등에서는 이견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회담에서 포괄적 비핵화 방안에 합의한 뒤 북한이 영변 핵시설 등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미국도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와 같은 제재 완화 조치를 단계적으로 제공하는 ‘굿 이너프 딜’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전히 ‘빅딜’만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재 완화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평가했고, 조기에 신뢰구축을 위한 단계적 이행 방식은 아마도 논의조차 못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기대나 사후 언론 발표 자료의 내용과 달리 북한 비핵화 접근법에서 한미간 이견이 컸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표>와 같다.
<표> 한미간 비핵화 로드맵의 차이
상기 표와 같이 비핵화 로드맵에 있어 상당한 이견을 보였지만, 가장 큰 견해차를 보인 부분은 제재 완화 부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논의를 미국 측과 협의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상회담 중 기자의 질의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현 수준에서의 대북 제재 유지를 강조하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부분적 제재 완화에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2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문제와 관련하여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과 의견이 일치했던 분야는 제재를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이행하는 것에 반대한 것뿐이다.
미국은 하노이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북한이 제재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음을 확실히 감지하고, 제재를 유지해야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견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북한이 지금처럼 부분적 비핵화나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한다면 제재를 풀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미국이 제재 완화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관계로 문재인 정부가 언급한 스몰딜에 미국이 지지를 보낼 이유도 없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몰딜’에 대한 질문에 “여러 스몰딜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현 시점에서는 빅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빅딜이란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아직은 스몰딜을 이야기하면서 제재를 완화해줄 수 없고, 당분간은 빅딜 기조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준비가 덜 된 한미정상회담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현 한반도 정세의 판단
워싱턴 방문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을 시기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미 정상회담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이 남북정상회담과 이를 위한 준비에 호응할 가능성은 낮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예의주시했을 북한은 문재인 정부를 통한 미국 설득은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북미간 연락채널이 구축되어 있는 상황이기에 차라리 자신들이 직접 미국과 접촉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4월 12일 진행된 김정은 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연설은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부정적이다. 김 위원장의 연설 내용을 보면 전반적으로 1월 1일 발표한 육성 신년연설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자력갱생에 중점을 두고 있다. 김 위원장의 대남인식은 변한 것이 없다. 한국에 대해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하며 북한의 편에 설 것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 역할을 하지 말고 북한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대미인식은 이중적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를 강조하며 대화기조를 유지했으나, 북한식 단계적 방식의 해법을 수용할 주장하며 미국의 입장 변경을 요구했다. 특히 올 연말까지 미국의 입장을 기다려보겠다고 언급함으로써 내년에는 미사일 실험과 같은 전략도발을 시사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대화를 함으로써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그 전제를 깰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년에 본격화 될 미국의 대선국면을 활용해 보겠다는 것이다. 이는 올해 내로는 북한에 유리한 협상 구도가 전개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조치로 보인다. 물론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는 북한으로서는 금년 한 해 자력갱생과 대 중러 협력으로 버텨보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도발을 할 경우 제기될 수 있는 유엔 안보리 차원의 새로운 결의를 고려한다면 다른 대안이 없는 북한의 선택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북한의 선택지도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고려해보면 현재 미국이나 북한 어느 누구도 입장을 바꿀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당분간 대치국면 불가피할 것이다. 대화도 도발도 없는 상황이 연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우리 정부의 기대와 달리 대북 특사나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도 상당기간 진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최고인민회의와 그 이후의 행보에서 나타난 김정은 모습도 조기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어둡게 하고 있다. 김정은은 북한 내부 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대결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군부대 방문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미국을 자극할 핵전력은 아직 감추고 있지만 공군 및 미사일부대를 방문하며 자신이 언급했던 새로운 길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화를 재개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김정은이 권력 집중과 대외적 호칭에 관심을 두는 것도 하노이 정상회담의 박탈감이 작용한 모습이다. 최고인민회의에서 ‘공화국 무력 최고사령관’이라는 호칭을 받은 김정은은 그 전일 있었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도 단상에 홀로 올라앉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의 위상강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미 북한을 장악한 상황에서 형식적 호칭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만큼 심리적 박탈감을 만회하려는 모습으로 볼 수 있고, 그 원인은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인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화가 난 모습을 언론에 유출한 것도 당분간 독자 노선을 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유출할 것으로 보이는 조선중앙TV의 김정은 모습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김정은이 내놓은 메시지의 일부는 북한의 관료주의, 부정부패, 패배주의 등 정부 운용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북한이 자력갱생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의 대결구도를 앞두고 북한 내부 문제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는 모습에서 성과가 담보되지 않은 남북 정상회담에 응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상을 고려할 때 당분간 정상회담의 진행도 없고 북한의 전략 도발도 없는 ‘도발 없는 대치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자신들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및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이며, 내부적으로는 경제난을 피하고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자력갱생과 사회통제에 중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새로운 도발을 하게 될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추가적인 제재를 받게 되어 있기에 인공위성 발사나 장거리 미사일 실험은 회피할 것이다. 물론 제재를 받지 않는 수준에서 군사적 활동이나 핵활동 등은 외부로 드러내며 한국과 미국을 압박할 것이다. 그 결과 전략 도발은 없고, 대화 재개도 없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책 건의
서두르는 대신 내실 있는 접근이 필요
문재인 정부는 특사 파견이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다양한 물밑 접촉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에 쫒기는 듯한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이번 워싱턴 방문은 성과가 담보되지 않았을 경우 무리해서 방문할 필요성이 없었다. 워싱턴의 반응을 정확하게 읽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덜 된 정상회담 추진으로 인해 북한마저 등을 돌리는 상황을 자초했다.
우리의 필요보다는 북한의 필요에 의해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형식과 절차를 취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이나 북한 모두 정상회담을 원하고 있고 상대방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기에 일정 기간은 이미 확보된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분간 긴장이나 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시점을 염두에 두고 정상회담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위한 여건을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한미간 신뢰를 바탕으로 북한 문제에 접근
미국의 신뢰와 협력을 받지 못하는 한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된다. 미국과 협력하여 북한의 전략적 결단과 비핵화로의 길을 가야 시점에서 한미공조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미·북,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져가려면 한미 양국간 신뢰가 튼튼하고 공조가 긴밀히 이루어져야 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이를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 한미공조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비핵화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우리의 명확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고 강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용어의 정리가 필요하다. 미국은 “북한 비핵화”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에 반해,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을 쓰고 있다. 북한 비핵화가 더 정확한 말이고 북한에 의한 악용을 방지할 수 있다. 비핵화의 대상에는 물질, 무기, 시설, 인원이 포함돼야 하고, 신고와 검증 역시 명확히 반영되어야 한다. 시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즉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만들고 준수하여 한미간 이견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 이를 근거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시험하고 견인해 가야 한다.
북한에 할 말은 하며 남북관계를 정상화 시켜야
지난 12일 김정은 위원장이 한국 정부의 중재노력을 오지랖이 넓다는 식으로 발언한 것은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국민에 대한 모욕적 언사였다. 북한 뜻대로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그간 북한과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한국 정부의 역할을 무시해 버렸다. 작년에 있었던 ‘냉면 목구멍’ 발언처럼 은연중에 한국 정부를 무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우리 정부가 이러한 북한의 모욕적 행동에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함으로 보이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북핵문제나 북한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결국 남북관계나 북핵문제는 궤를 같이 한다. 북한의 진정성 있는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제멋대로의 발언을 남북관계에서 보인다면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제멋대로의 행동을 할 수 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막된 행동에 침묵하는 것은 대화의 끈을 이어가고자 함이지만, 그럴수록 북한에 끌려만 가게 된다. 정부는 북한에 해야 할 말은 해 가면서 남북관계를 정상화 시켜야 한다. 이번과 같은 경우에도 “남북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는 말부터 상대를 배려해야한다”고 격조 있게 일침을 가했어야 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국격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남북관계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굿 이너프’ 란 말 대신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을 일관되게 가지고 가야
지금 당장은 미국에게 ‘굿 이너프 딜’을 거절당했지만, 그 실체로 볼 수 있는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은 향후 북한 비핵화 해법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거절했다고 또는 북한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바로 버려야 할 잘못된 정책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정부가 일관되게 가지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용어 자체는 보다 차분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굿 이너프’니 ‘조기 수확’이니 하는 말은 자칫하면 다른 형태의 스몰딜로 오해할 수 있다. 따라서 수식의 화려함은 떨어질 수 있지만 그 내용의 담백함을 강조할 수 있는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이라는 말로 통일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의미가 잘 전달되고 선후관계가 분명해서 미국의 지지도 받아낼 수 있다. 형용사에 의존하지 않고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하고 충실히 이행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일 때 국민적 지지가 뒤따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