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6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자민당 신임 총재가 제99대 일본 총리로 선출되며 새 내각이 출범했다. 8월2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갑작스러운 사임을 표명한 지 19일 만이다. 8월 중순부터 불거진 건강 이상설에도 임기 수행 의지를 밝혔던 아베 총리의 사임 표명은 전격적이었다. 사임 의사를 표명한 당일까지 내각 주요 각료들은 물론이고, 측근들까지도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베 총리는 차기 총재에 관한 사항은 당내 지도부에게 일임했고, 자민당 지도부들은 위기 상황에서의 정치적 공백 최소화를 이유로 당 소속 국회의원(394명)과 도도부현 지부연합회(지구당) 대표 각 3인(141명)을 대상으로 한 약식 선거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자민당 내 7개 파벌 중 호소다파, 아소파, 다케시타파, 니카이파, 이시하라파 등 5개 파벌이 스가 관방장관을 차기 총재로 전폭 지지하며 사실상 당선이 확실시됐다. 그리고 이변 없이 스가 관방장관은 자민당 신임 총재, 그리고 일본 총리로 취임했다.
한국의 정치체제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불과 20일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총리가 선출됐기 때문이다.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에 대한 책임 여부도, 7년8개월여간 이어져온 정권에 대한 평가도, 차기 총리에 대한 충분한 검증도 이뤄지지 않은 채 새로운 내각이 들어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베 정권에서 문제가 됐던 ‘벚꽃을 보는 모임’ ‘공문서 위조’ ‘검사장 정년연장’ ‘모리토모·가케학원’ 문제 등에 아베 총리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으며, 이에 대한 진지한 재조사 등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아베 총리는 왜 갑자기 사임했을까? 스가 관방장관은 어떻게 총리가 될 수 있었는가? 지난 20일은 일본 정치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스가 내각은 1년 단임으로 끝날 것인가
스가 신임 총리의 임기는 아베 총리의 잔여 임기인 내년 9월까지로 약 1년 남짓이다. 그래서 스가 내각은 과도기적 성격으로 1년 단임 내각으로 끝날 것이란 시각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 대응, 경제 재건, 올림픽 개최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은 만큼 속단하기는 이르다. 파벌정치가 횡행하는 일본 정치에서 무파벌의 스가가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파벌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 속에서 오히려 파벌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여러 파벌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스가 내각은 아베 내각에서 시행했던 외교, 경제 등 대부분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갈 예정이다. 이를 보여주듯, 9월16일 발표된 새로운 내각 각료 20명 중 11명은 유임(8명 재임, 3명 직책 변경)됐다. 4명은 재입각했으며, 5명만이 첫 입각을 했다. 사실상 ‘아베 내각 2.0’이라 평가해도 무방할 만큼 기존 각료들이 대부분 유임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 정책에 대한 전격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스가 총리 스스로도 뚜렷한 국가관이나 비전을 보여준 적이 없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코로나19 위기 상황 지속과 경제 악화 등 일본의 국내적 상황을 볼 때 국민들의 삶에 와 닿는 실질적인 성과에 기반한 ‘일하는 내각’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즉, 아베 총리가 이데올로기와 명확한 국가관으로 무장했다면 스가 총리는 실용성과 실리적 현실주의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실익지향 성격의 스가 내각은 아베 내각의 기존 정책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기존 아베 내각의 지지율을 흡수하며, 실익의 관점에서 무당파의 새로운 지지율까지 더할 수 있다. 즉,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강하지 않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호불호가 갈리지 않은 만큼, 높은 지지를 획득하지는 못하더라도 일정 성과가 뒷받침된다면 기대 이상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베 내각에 비해 이념적 색채 덜할 듯
스가 총리는 대외적으로 아베 정권의 기조를 이으며, 국내적으로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과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관리형 리더십을 선보일 가능성이 크다. 스가 총리 스스로 강조한 기득권·전례주의 타파, 행정 개혁, 디지털화 등이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 기용된 고노 다로(河野太⇦) 행정개혁규제개혁담당 대신(전 외무대신·방위대신)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관점에서 1년짜리 임기로 시작한 스가 내각이지만 코로나19 대응, 경제부흥, 올림픽 개최 등 다양한 위기 상황을 잘 넘긴다면 이후의 3년을 내다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일본의 국내 정치적 변화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한·일 관계다. 스가 내각의 대(對)한국 외교와 한·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주지하듯이, 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강제동원 문제, 무역분쟁 등 다양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K팝·드라마·영화 등 문화 분야에서의 양국 교류가 활발하지만, 이를 통해 양국 관계를 개선할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양국 갈등의 한가운데 있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인식 차이가 크고, 일본 내에서는 한국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가 총리가 한국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주류 정책결정자들과 국내 여론에 반하는 의견을 표명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더욱이 현재 스가 총리의 정책 우선순위는 코로나19 대응, 경제 살리기 등 국내 문제에 치중돼 있어 외교 문제, 특히 한·일 관계에 역량을 쏟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강제동원 문제에서 현금화가 현실화되면 기존의 기조를 유지함은 물론, 국내적 지지 기반을 획득하기 위해 더욱 강경하게 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임 총리, 신내각에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리적 현실주의자로 알려진 스가 총리는 아베 내각에 비해 이념적 색채가 덜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소한 양국의 국민감정, 민족주의적 대립은 격화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스가 총리가 강조하고 있는 디지털·통신 분야와 코로나19 위기에서 나타난 일본 내 보건 및 방역 시스템 개선, 경제부흥을 위한 협력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한다. 특히 국익의 관점에서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본 글은 9월 21일자 시사저널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