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심점 잃은 日보수, 당분간 혼란 불가피
양국 현안 해결, 실무적 차원서 접근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한·일관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참의원 선거 이후 강제징용 문제 해결 등을 논의하며 한·일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일본 국내적 혼란으로 한·일관계가 우선순위에서 미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선거의 얼굴’로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내세운 자민당이 압승을 거뒀다. 중의원을 해산하지 않는다면, 향후 3년간은 큰 선거가 없는 이른바 ‘황금의 3년’이 찾아온다. 이 기간 총리는 선거에 대한 부담 없이 국정과제에 임할 수 있다. 자민당에서도 온건파에 속하며 한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기시다 총리가 이번 참의원 선거를 통해 정권 장악력을 높이면, 한·일관계 개선도 기대해 볼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이 예상했다. 그런데 자민당은 승리했으나 선거 이틀 전 갑작스러운 아베 전 총리의 사망으로 당분간 자민당 내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예단하기는 이르나, 자민당 내 가장 큰 파벌인 아베파 수장이자 보수의 상징이며, 당 내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베 전 총리의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은 보수세력이 새롭게 결집하는 과정에서 주도권 다툼과 세력 재편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여당 당수, 즉 자민당 총재가 곧 일본의 총리인 정치 시스템에서 기시다 총리의 자민당 총재 임기(3년)는 2024년 9월까지이다. ‘황금의 3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기시다 총리의 연임과 중의원 해산이 없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인데, 아베 전 총리 사망으로 이조차 불확실해졌다. 따라서 기시다 총리는 2년 후 자신의 연임을 염두에 둔 전략을, 그 외 유력 정치인들도 차기 자민당 총재에 오르기 위한 전략을 각각 세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의원 해산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중의원 해산 없이 4년 임기를 마친다고 했을 때, 2025년은 중의원(2025년 10월 임기만료) 선거와 참의원(〃 7월 〃) 선거가 동시에 치러진다. 따라서 중·참의원 동시 선거의 부담을 덜고 총재 연임과 장기집권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중의원 해산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대한 선거 없는 ‘황금의 3년’은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새로운 선거와 정권 유지 혹은 탈환을 위한 일본 내 정치 셈법이 시작되었을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한·일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한·일 갈등 현안에 대한 일본의 입장이 달라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기시다 총리가 영향력을 확장한다는 것은 이전 정부보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일 것이라는 의미이지, 일본이 입장을 바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한·일 간 역사문제는 일본에게도 민감하며, 그동안 일본의 대한국 강경책은 여론의 지지를 받아왔다. 따라서 2년 후 재임을 노리는 기시다 총리가 여론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고, 설득의 리더십을 보여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 정상이 정치적 의지를 확인하고 추진력을 발휘하는 하향식(톱다운) 해법을 기대해 왔는데, 일본 정치의 혼란 속에 당분간 이러한 방식은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한·일 갈등의 해결을 위해 기시다 내각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조바심을 갖기보다는 보다 실무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본 정치 상황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동시에, 상향식(보텀업) 접근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외교부는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협의회’를 발족하는 등 갈등 현안에 대한 국내의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통해 사회적 콘센서스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정부 간 접촉과 실무 논의를 지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양국의 의지가 확인된 만큼 보다 진정성 있고,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대일외교에 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 본 글은 7월 12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