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난달 28일 선제공격을 포함해 핵무기를 마치 재래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핵무력정책법’의 기조를 헌법에 명시하는 개헌을 단행했다. 평양은 최근 열린 푸틴과 김정은 간 북·러 정상회담 이후 중국 이외에 또 하나의 후원자를 확보했다는 점에 고무된 듯하다.
일부에서는 다른 대안을 배제한 채 핵무기에만 집착하고 있는 행보와 북·러 밀착, 더 나아가서는 북·중·러 간 3각 연대 강화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고 한 입장이나 북한 핵위협에 대해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통해 억제태세를 강화하려는 정책 방향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북한 핵위협에 대해 우리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자유민주주의나 규범 기반 세계질서와 같은 가치를 타협하고 희생하는 것이 한반도 문제의 해법이라고 보는가, 그런 해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대외정책에서 타방의 관점으로 우리 정책을 판단해보는 ‘내재적 접근’이 때론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가치와 이익을 위한 것이다. 남의 가치를 우리 것처럼 받아들이는 ‘가치의 내면화’를 하는 순간 그건 정체성의 포기로 이어진다. 자신의 전문성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 학문적 아집, 정파적 득실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이러한 함정에 빠지는 현상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일부 전문가 그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북한의 최대 목표가 수령제 결사옹위이고 평양이 주장하는 ‘체제 안전’의 핵심은 한국의 정체성 해체이며 이를 위한 핵심적 수단이 핵위협이라는 사실, 북·미 관계 개선 노력 역시 한국 봉쇄를 겨냥한 포석이라는 것, 많은 전체주의·권위주의의 적은 외부가 아니고 억압과 공포를 상징으로 하는 체제 자체라는 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 외교’는 편 가르기나 무분별한 적대화가 아니고 당면한 현실과 역사적 경험에 충실한 접근일 뿐이다. 6·25라는 일방적 침공과 전쟁의 참화를 당한 역사가 있기에, ‘우리 식’을 앞세운 억압과 통제가 얼마나 반(反)민주적인지를 알기에, 독재를 위해 있지도 않은 국경 너머의 적을 조작하고 핵무기로 우리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상대와 마주하고 있기에 자체 능력을 강화하고, 동맹 및 우방국과 협력하며,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법치 회복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한·미·일 간 한반도와 지역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협력을 다짐한 ‘캠프데이비드 정신’, 북한 핵과 미사일이 모두를 겨눌 수 있음을 강조한 동아시아(EAS) 정상회의에서의 윤석열 대통령 발언, 그리고 자유와 연대라는 유엔의 정신이 대한민국 역사적 발전과정에 그대로 녹아있다는 제78차 유엔총회 대통령 기조연설 등은 모두 이러한 가치 외교의 방향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가치 외교는 북·러 밀착과 북한 핵집착의 원인이 아니라 처방이고, 우리 정체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자신의 중심을 상실하고 타방의 주장에 휘둘리는 그런 줏대로 어떤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고 누굴 지키고자 하는가. 지금은 가치 외교를 되돌아볼 때가 아니고 오히려 더욱 강화할 때이다.
* 본 글은 10월 5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