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가 갈수록 난세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미중 대결로 전쟁 위험까지 걱정하고, 북한은 핵미사일로 우리 생존을 위협한다. 이 험난한 국제정치판 속에서 어떻게 생존과 번영을 구가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야 한다. 정확하게 현실을 읽어내지 못하면 의사가 오진으로 환자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큰 재앙을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국제정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1. ‘의도’가 아니라 ‘결과’가 중요
서양 격언에 “지옥에 이르는 길은 수많은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so many good intentions.)” 라는 말이 있다.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말해줘야 한다는 정치 세계의 귀중한 금언이다.
1938년 유럽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제3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주데텐란트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영국 총리 네빌 챔벌린은 1938년 9월 29일 독일 뮌헨으로 날아가 4국 회의에서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히틀러를 달래면 그가 거기서 만족하고 더이상 영토확장을 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선한 의도로 접근한 것이다. 그가 귀국했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공항에 나와 그를 평화의 사도라고 외치며 환영했다.
당시 윈스턴 처칠은 오래전부터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병합을 지켜보며 히틀러의 본심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영국도 군사력을 강화하여 독일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대방을 향한 선한 의도가 아니라 힘만이 힘을 억제하여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인들은 그를 호전적인 전쟁광이라고 비판했다. 과연 누구의 판단이 정확했는지는 그 후에 전개된 역사가 보여주었다. 힘으로 견제받지 않았던 히틀러의 야욕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병합, 그리고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선의를 베풀면 상대도 선의로 대응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접근하는 것은 국제정치에서 금물이다.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기대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전승절 기념일에 참석해 망루에 섰고, 문재인 정부도 중국에 정성을 다했지만, 중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을 방관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전략 경쟁에서 방파제 역할을 해줄 완충지대인 북한의 체제 안정이었다. 우리의 선한 동기에 그들은 철저한 전략적 계산으로 답했다.
2. ‘감성’이 아니라 ‘이익’의 관점
한국 사람들은 친미, 반미, 친일, 반일과 같이 “친”, “반”이라는 접두어를 나라 이름 앞에 붙여 사용하기를 즐긴다. 이는 아직도 외교문제를 호, 불호라는 감성으로 접근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다른 선진국 국민들이 그런 식으로 외교 문제를 접근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국가들 간의 관계는 철저하게 이익을 따져 행동하는 세계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상대 국가가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그 도움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전술 전략을 동원해야 할지를 고심하는 것이 외교의 세계다. 국익의 관점에서 큰 이익이 되면 마음에 안드는 나라와도 가깝게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말이 나온다.
이러한 기본이 무시되고 친미 반미 친일 반일 논쟁이 회자되는 이유는, 사실은 외교를 국가이익이 아니라 당파 이익의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도 보수는 친미고 진보는 친중이라는 감성적이고 이분법적인 단순 논리가 퍼져있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따지기에 앞서 상대 당파가 친(반)미면 우리는 무조건 반(친)미인 것이다. 이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파당적인 관점에서 외교를 바라보는지 드러내 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계 10위 국력에 올라선 지금이나 구한말 때나 외교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3. 감성 외교의 결과는 오판과 잘못 대응
외교를 하는데 의도에 치중하거나 국내정치의 당파적 시각에서 접근하면 국제정치 상황을 잘못 읽고 잘못 대응하게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균형외교”냐, “동맹외교”냐의 논쟁이 그렇다. 애초부터 한국이 북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그래서 안보 때문에 미국과 긴밀한 동맹 관계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을 등치시켜 놓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겠다는 발상은 사실 미국과의 동맹을 공동화하겠다는 시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역 패권의 목표 아래 한국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놓겠다는 중국의 의도에 그대로 부합한다.
여기서 문제는 한국의 입장에서 무엇이 이익이 되느냐 하는 주인의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미국을 따를 것이냐 중국을 따를 것이냐만 남는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북한과 한때 정상회담을 하고 협상을 하던 때는 설령 그랬다 치더라도, 고체연료 추진 초음속 미사일에 전술핵을 탑재해 남쪽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마당에서까지도 균형외교냐 동맹외교냐를 따지는 것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문제의 본질은 바닥에 뿌리 박힌 깊은 당파 의식인 것이다.
진정으로 국익의 관점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생각한다면 우리 외교전략의 첫째는 북한 위협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억제하느냐일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미국뿐 아니라 일본까지도 품어 안아야 할 것이다.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자원도 없고 국내시장도 작은 우리 입장에서 경제발전의 핵심이 되는 미래의 첨단기술력 강화와 공급망 문제 해결을 위해서 미국 중심의 서방 네트워크에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 진영에 설 것이냐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이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자 민주국가로 성장하는 데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제공한 유리한 국제환경의 덕을 크게 보았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는 우리의 국익이다. 이를 위해 미국과 서방 진영과 함께 할 것이냐, 아니면 그런 질서를 약화시키려는 러시아와 중국 편에 설 것이냐를 묻는다면, 답은 분명해진다.
4. 국익 관점의 주인의식 있는 외교
한국의 국익을 앞세워 판단한다면 한미관계를 강화한다고 해서 중국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경제적 상호의존을 통해 한국과 중국은 서로 혜택을 보는 관계에 있고 이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북한 위협 때문에 미국과의 동맹은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러한 전제하에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상호 존중하는 자세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부당하게 경제제재와 같은 억압외교로 나올 경우에 대비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같은 서방의 네트워크에 최대한 많이 참여하여 공급망 압박이나 무역 규제에 대한 대비책들을 마련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경제제재 상황에서 국민들이 단합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런데 국민적 단합이 가능하려면 정부가 국민들을 향해 우리가 어떠어떠한 전략과 정책을 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평소에 잘 되어있어야 적전 분열하여 상대국의 호구가 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국익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협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미국이 잘못 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고 바꾸도록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노력을 조용히 펼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블링컨 국무장관은 작년, 미국의 전략은 “(국내에) 투자하고, (동맹과) 연합하고, (중국과) 경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인플레이션감축법과 반도체와과학법의 시행과정에서 보듯이 동맹들까지 차별대우했다. 미국이 그렇게 나가면 동맹들은 미국이 내거는 명분과 가치 아래 연합할 의지가 약화될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도 보다 더 대국적 입장에서 동맹에 대한 연합전략을 재조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더 이상 구한말 조선이나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 세계 2위 소프트파워의 국가이다. 이에 걸맞게, 주인의식을 가지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계산과 전술 전략으로 난세를 헤쳐나갈 때이다.
* 본 글은 6월 1일자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