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혹은 아태 지역에서 오랫동안 전개되어온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201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수면위로 부상한 명백한 전략적 경쟁의 모습을 갖췄다. 2009년 즈음해 중국은 성장한 경제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남중국해 분쟁에서 자기 이익을 분명히 드러냈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 안에 중국의 연착륙을 바랬던 미국은 중국의 부상, 영향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재균형 (rebalancing) 정책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대해 일대일로 (Belt and Road Initiative) 구상으로 맞섰다. 이때부터 미국과 중국간 전략경쟁, 그리고 그 부산물로 지역의 전략적 불안정성, 불확실성도 같이 증가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는 경제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며 미-중 경제 전쟁이란 요소를 추가했다. 이런 미-중간의 전략 경쟁도 이제 10년이 넘어가고 있다.
2020년 접어들며 갑자기 확산된 코로나 19 (COVID-19)는 미-중 경쟁의 양상도 바꿨다. 미국은 코로나 확산 초기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를 파고 들었다. 3월을 넘어 가면서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가 점차 통제되면서 이번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에 역공을 펼치는 동시에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에 마스크, 방역물품, 의료진을 보내며 적극적 방역 외교를 하고 있다. 전략경쟁, 경제전쟁, 그리고 이제 감염병을 놓고 벌어지는 미-중 경쟁은 코로나 19 이후 더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역 중소국가 입장에서 코로나 19가 가져온 사회경제적 충격에 더해 미-중 경쟁이 더 강화된다면 전략적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이런 복합적인 위기와 전략적 부담을 줄이고 미-중 경쟁 사이에서 활로를 모색할 방법을 아세안은 물론 지역 중소국가들의 공동 노력으로 찾아야 한다.
그간 지역 국가들은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미-중 전략경쟁의 성격을 파악하고 미-중 전략경쟁에서 오는 전략적 압박을 피하고 완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왔다. 강대국에 대한 편승 (bandwagon), 균형 (balancing), 전략적 모호성 (strategic ambiguity), 헤징 (hedging) 등 다양한 전략에 관한 단어들이 난무했다.1 이런 대안의 하나로 아세안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약소국이지만 10개국으로 이루어진 아세안이 가지는 협상력 (bargaining power) 혹은 대 강대국 레버리지 (leverage), 나아가 아세안이 주도하는 (ASEAN centred) 지역 다자 협력체의 잠재력에 주목한 주장들이다.2 글로벌, 지역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미국과 중국은 10개국 연합체인 아세안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을 하고 아세안 국가들은 이를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다. 강대국을 아세안 주도의 다자제도에 끌어들여 다자제도의 규칙을 통해 강대국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한 반박도 많다.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약소국 모임인 아세안의 한계를 강조하는 현실주의 입장이다.3
아세안의 잠재력을 강조하는 전자의 주장은 행동과 결과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잠재력 까지만 논의한다. 반면 현실주의적 아세안 한계론은 아세안의 행동 부족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지만, 이런 한계를 들어 아세안의 잠재력까지 한 묶음으로 폐기 처분한다. 다시 말해 전자는 현실적 결과를, 현실주의적 후자는 아세안의 잠재력을 인정하지 않는 부분적 설명에 그친다. 더 건설적이고 현실 적용 가능한 정책적 접근이라면 아세안이 가진 잠재력을 어떻게 행동으로 연결시켜 강대국 전략경쟁을 완화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에 관심을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강대국 사이에서 아세안의 전략, 영향력 강화를 위한 정책 대안은 마찬가지 딜레마를 겪고 있는 한국, 아세안 국가와 관계 심화를 추구하는 한국의 신남방정책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다.
아세안과 아세안 중심 다자제도의 잠재력
1967년 형성된 아세안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 Nations, ASEAN)은 지난 50여년간 내적단결을 바탕으로 외형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지난 시간 동안 협력을 바탕으로 2015년에는 아세안공동체 (ASEAN Community) 형성을 천명했다. 외적으로 아세안이 중심이 된 아세안안보포럼 (ASEAN Regional Forum, ARF), 아세안+3 (ASEAN+3), 동아시아정상회의 (East Asia Summit, EAS) 등 많은 다자제도도 출범시켰다. 반면 서로간 신뢰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동남아 국가들을 한자리에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던 아세안의 방식 (ASEAN Way)은 제도에 기반한 구속력 있는 아세안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주권존중-내정불간섭, 협의와 합의라는 항목으로 구성된 아세안의 방식은 형성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아세안을 연성협력 (soft cooperation), 연성제도화 (soft institutionalisation)에 머무르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세안이 지역 국제관계 동학 안에서, 보다 좁게는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아세안의 잠재력은 두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먼저 아세안이라는 동남아 10개국의 연합체 혹은 아세안이라는 이름으로 동남아 10개국이 함께 움직이는 집합체 (collective unit)가 가진 잠재력이 있을 수 있다. 두번째로는 아세안의 방식이 적용되는 아세안 중심(ASEAN centred)의 지역 다자협력체 혹은 아세안중심성 (ASEAN Centrality)이 적용되는 지역 다자협력체가 미-중 전략 경쟁을 완화하고 미-중 전략경쟁에서 오는 부정적 영향을 줄일 수 있는 기제가 될 수 있다는 잠재력도 있다.
아세안: 숫자와 지정학의 힘
아세안에 포함된 동남아 10개국은 글로벌, 지역 국제관계에서 개별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기 쉽지 않은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10개국이 하나의 집합체로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집합적으로 아세안이 지역 국제관계에서 가지는 의미와 힘은 작지 않다. 아세안의 집합적 행동을 통한 국제사회에서 발언권 강화는 아세안 형성 이후 동남아 국가들이 성취한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4 특히 강대국 대 개발도상국 혹은 강대국 대 약소국이라는 이분법적인 사안, 아세안 국가 사이 이해관계가 크게 상충하지 않는 사안에서 아세안 10개국은 어렵지 않게 단합해 하나의 목소리를 내왔다.
대표적인 예로 아세안 국가들은 1973년 합성고무 생산량을 놓고 집단적으로 일본에 압력을 가해 동남아 국가들의 천연고무 생산, 수출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었다. 개별적으로는 어려웠던 협상이지만 아세안과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에 집단적으로 대응해 협상력을 극대화한 사례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이미 개발도상국 지위를 벗어났던 싱가포르는 아세안이 유럽과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을 통해 관세혜택을 누릴 때 아세안의 일원으로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5 뿐만 아니라 정치안보 차원에서도 아세안의 집단적 협상력과 레버리지는 효력을 발휘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동남아 지역에서 무력 사용을 금지한 아세안우호협력조약 (ASEAN 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TAC)을 강대국과 대화상대국에 제시하고 이들 국가들이 이 조약에 서명하게 한 경우다. 물론 다른 아세안의 조약들과 마찬가지로 TAC가 강제력은 약하지만 조약상으로 미국, 중국 등 강대국은 동남아 국가와 갈등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이유로 인한 무력 사용을 동남아에서는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6
아세안 10개국이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 대한 레버리지로 작동하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많기 때문은 아니다. 강대국들이 아세안을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고 이 단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놓고 경쟁하는 미국과 중국은 아세안 10개국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할 경우 상대방과의 전략 경쟁에서 큰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마치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 국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처럼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에 특히 동남아 지역의 국가들을 놓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는 일종의 ‘입찰 전쟁’ (bidding war)이 벌어지고 있다.7 이에 따라 동남아 국가들의 호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며 이런 몸값이 나가는 국가들 10개의 모임은 강대국에 대해 일정한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아세안의 집합적 힘은 아세안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한층 더 강해진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은 각각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Free and Open Indo-Pacific, FOIP)과 일대일로 (Belt and Road Initiative, BRI)라는 두개의 거대 전략이 충돌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중국의 BRI는 대륙과 해양의 두 루트를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멀게는 아프리카로 서진 하는 양상을 보인다. 해양 쪽 루트의 출발점은 동남아에서 시작한다. 미국의 FOIP 역시 해양을 따라서 서진 하며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막으려 한다. 이런 미국의 전략이 시작되는 지역이 동남아이고 동남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차단, 중국의 남중국해 지배 저지가 대 중국 봉쇄의 핵심 과제다. 비단 FOIP 만이 아니라 오바마 정부 당시 아시아 전략인 피봇 (Pivot) 역시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장을 최우선적 과제로 하고 있었다.8
결국 미국과 중국 모두 현재 일어나고 있는 FOIP과 BRI의 경쟁에서 동남아에 대한 영향력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경쟁자의 동남아에 대한 영향력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여기서 동남아를 하나로 묶는 아세안의 지정학적, 지전략적 (geostrategic) 중요성이 크게 올라간다. 이런 아세안 국가들의 지정학적, 지전략적 중요성, 하나의 단위로 움직이는 10개국의 모임이라는 아세안의 특성이 더해지면 아세안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으로부터 구애를 받는 구도가 형성된다. 이런 지정학적 특성은 다시 아세안이 집합적으로 그리고 개별 국가 차원에서 강대국에 대해서 행사할 수 있는 레버리지를 강화한다.
아세안 중심 다자 제도의 활용 가능성
아시아-태평양, 동아시아 혹은 인도-태평양 등 동남아 국가들을 포함한 넓은 지역 범위에서 다자제도가 등장하고 다자협력이 나타난 것은 냉전이 끝난 이후였다. 1994년 형성된 아세안안보포럼 (ASEAN Regional forum, ARF)을 시작으로 1998년 경제위기 이후 아세안+3 (ASEAN+3)와 동아시아정상회의 (East Asia Summit, EAS)가 만들어졌다. 이 제도들은 대부분 아세안 중심의 다자제도라는 특징을 보인다. 아세안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협력체로 가장 많은 다자협력의 운영 경험을 축적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아세안은 지역의 다자협력은 아세안을 중심에 놓고 형성되고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협의와 합의라는 만장일치의 의사결정, 점진적 (building bloc) 방식, 주권존중과 내정불간섭으로 구성되는 아세안의 방식 (ASEAN Way)이 지역 다자제도의 기본적 운영 방식, 질서가 된다는 의미다.9 10개 국가가 하나의 단위로 움직이는 아세안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자신의 의사와 질서를 지역의 다자협력에 반영하고 있다.
이 지역 다자협력체들 대부분은 사실상 아세안에서 출발해 확장된 형태로 아세안 중심의 다자협력이라는 특징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1994년 창설된 ARF는 아세안의 주도로 탈냉전 시기 소련의 붕괴, 미국의 철수라는 힘의 공백 상태에서 어떻게 지역 안보 문제를 다룰 것인가라는 고민을 안고 만들어졌다. 아세안이 주도로 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초기 아젠다에서 운영방식까지 아세안의 방식이 그대로 적용된다.10 미, 중을 포함한 총 18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EAS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아세안이 동북아 쪽으로 확장된 버전인 아세안+3에서 더 많은 지역 국가를 포함하기 위한 더 확장된 버전으로 2005년 출범했다. 아세안에 동북아 3국 (한국, 중국, 일본)을 초청해 별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세안+3이고, 아세안+3에 더 외곽의 인도,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2010년에는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했다. 아세안국방장관회의플러스 (ASEAN Defence Ministers’ Meeting Plus, ADMM+)는 2006년 만들어진 아세안국방장관회의 (ADMM)의 확장된 제도이다. 2006년 처음 소집된 ADMM은 이듬해 EAS 회원국을 모두 포함한 ADMM+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2010년 처음으로 ADMM+가 소집되었다.
미-중 전략경쟁 속에 이런 아세안 중심 다자제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다자제도의 멤버십에 있다. 앞서 언급한 ARF, EAS, ADMM+는 모두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11 UN과 경제협력 중심의 APEC 정도를 제외하고 안보 문제를 다루는 지역 다자제도에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제도는 이 세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이 세 아세안 중심의 제도는 전략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다자 맥락 속에서 안보 문제 관련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도다. 이 제도를 통해서 미국과 중국이 안보, 전략 문제에 관한 양자 대화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12 이 제도들은 단순하게 정상회의 (EAS), 외교, 국방장관 회의 (ARF, ADMM+)를 넘어 다양한 수준의 관료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ARF의 경우 고위급회의 (Senior Official Meeting, SOM), 회기간회의 (Inter-Sessional Meeting, ISM), 회기간 그룹(Inter-Sessional Support Group, ISG)과 다양한 워크숍을, ADMM+는 5개의 실무반회의 (working group)를 설치하고 있다.13
미국과 중국 입장에서 지역 주요국가가 모두 참여하는 이런 다자 제도는 한편으로 지역국가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대국의 행동이 지역 국가에 의해서 평가되고 나아가 지역 국가들이 강대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은 미-중의 상호 작용, 미-중 전략 경쟁에 대해서 지역 국가들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제도가 된다. 반대로 이런 다자제도가 지역 국가들 입장에서는 미-중 상호작용과 전략 경쟁에 대한 지역 국가들의 입장과 인식을 미국과 중국에 알릴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이 다자 무대에서 논의되면 미국과 중국은 양자관계, 그리고 전략경쟁에 대해서 지역 국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잠재적으로 지역 국가들은 강대국의 행동, 강대국 간 전략 경쟁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 제어하는 도구로 지역 다자제도를 활용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 제도의 중심에 있는 아세안은 미-중 사이 조정자 (moderator), 미-중을 한자리에 모으는 역할 (convenor), 그리고 미-중 사이의 가교 (bridge)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 모두 표면적으로는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제도에 대한 협력을 약속하고, 이런 제도를 이끄는 아세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책임 있는 강대국의 자세를 언급한다. 백악관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 지역 다자제도가 협력, 공동행동, 국제규범의 강화를 위해 중요한 요소이며 오바마 대통령이 APEC, ASEAN, EAS, ADMM+ 등 지역 다자기구를 강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평가한다.14 오바마 대통령 스스로도 “이제 미국은 확고하게 EAS의 한 부분이며, EAS가 정치, 안보 도전을 다루는 지역의 중요 포럼이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밝혔다.15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 나온 인도-태평양 전략도 다자적 관여를 통한 지역 제도들과 관계 강화를 하나의 전략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아세안을 지역 다자협력의 핵심으로 보면서 EAS, ARF, ADMM+를 중요한 협력 대상인 다자제도로 명시하면서 EAS를 지역의 정치, 안보 도전을 다루는 주요 포럼으로, ARF는 전통-비전통 안보 해결을 위한 기능적 다자협력 포럼으로 언급하고 있다.16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지역 다자 제도를 강조하고 있다. 2019년 제 14차 EAS에 참석한 중국 리커창 (Li Keqiang)은 EAS가 정상들 간의 전략적 포럼이라는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면서 EAS는 아세안을 핵심에 놓아야 하고 동아시아와 아태 지역에 초점을 두고 협력이 온전히 진행될 수 있도록 지역협력의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17 마찬가지로 왕이 (Wang Yi) 중국 외교부장도 2017년 ARF에 참석한 자리에서 지역 모든 국가들이 아세안을 중심에 놓고 ARF, EAS, ADMM+와 같은 지역 다자안보 제도들 사이 조정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18 나아가 왕이 외교부장은 “다자주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주요 국가간 협조가 필수적이다. 국제 관계, 특히 다자협력에서 주요 국가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고 중요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19
아세안과 아세안 중심 다자제도의 현실
반면 이런 아세안, 아세안 중심의 다자제도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실제로 이런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사이에서 아세안의 역할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잠재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한계 역시 아세안이라는 10개국 모임 자체에 적용되는 한계와 아세안 중심의 지역 다자협력체에 가해지는 한계라는 두가지 형태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역시 느슨한 아세안 10개국의 협력이 사안에 따라 강대국의 압력과 회유 앞에서 약해지는 문제다. 후자의 경우 강대국에 전략대화를 제공하는 아세안 중심의 다자제도들이 역으로 강대국의 전략 경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문제이다.
아세안 단결성 약화와 강대국의 분리-포섭
아세안으로 묶인 동남아 국가들을 한마디로 묘사하면 다양성 속의 통일성 (unity in diversity)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동남아가 하나의 지역 단위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만큼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 그리고 종족적으로 다양한 국가와 민족들로 구성된 지역이 동남아다. 보다 현실적인 정치, 경제, 안보적 이해관계 역시 이 10개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안은 그리 많지 않다. 정치적으로 아세안은 거의 절대왕정에 가까운 브루나이로부터 공산당 1당 통치의 라오스와 베트남, 그리고 민주주의도 권위주의도 아닌 애매한 국가부터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인도네시아까지 다양한다. 경제적으로도 1인당 GDP가 6만 달러를 넘는 싱가포르부터 1천 달러가 겨우 넘은 미얀마, 캄보디아까지 다양하다. 지정학적으로도 남중국해 분쟁지역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해양 국가로부터 중국과 국경을 면해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적인 국가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아세안을 규정하는 연성 제도 (soft institution)는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을 하나로 묶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967년 아세안이 형성되기 직전 아세안을 처음 만든 5개 국가 사이에 큰 신뢰는 없었다. 역내 갈등 앞에 국가간 신뢰 형성이 어려웠다. 이런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기 위해서는 강한 제도 보다는 느슨한 제도, 보다 구체적으로 협의와 합의에 기반한 만장일치제, 주권존중-내정불간섭과 같은 아세안의 방식이 적합했다. 이런 최소 공통 분모 (least common denominator)에 기반한 연성 제도는 포함된 국가들의 행동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기반을 결여한다. 특히 아세안 국가들 사이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에서는 구심력과 단결성 (unity)에 대한 호소가 원심력과 분열성 (disunity)을 이기기 어려운 것이 아세안의 현실이다.
아세안에서 회원국들 간 구심력 보다는 원심력이 작용하는 대표적인 예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다. 중국과 남중국해에서 잠재적 혹은 실질적 갈등에 놓인 동남아 국가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와 강대국 압력에 민감한 몇몇 국가들은 남중국해 문제를 아세안의 아젠다로 만들어 아세안 대 중국의 협상 구도를 만들고자 한다.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꺼려해 남중국해 문제를 아세안 아젠다화 하는데 반대하는 입장이다. 중국은 물론 남중국해 문제를 동남아 개별국가와 중국 사이 양자 관계로 만들어 협상을 유리하게 하고자 한다. 다른 사안에서 협력에도 불구하고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한 아세안은 내적 분열을 자주 노정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있었던 제45차 아세안외교장관회의 (ASEAN Ministers’ Meeting, AMM)이다. 흔히 프놈펜의 재앙 (Phnom Penh Fiasco)으로 불리는 이 사안은 AMM 개최 사상 처음으로 외교장관들이 합의된 의장성명을 발표하지 못하고 해산한 사건이다. 의장성명에 남중국해 문제를 명시하려 했던 나머지 국가들과 달리 친중적 태도를 가진 의장국 캄보디아는 인도네시아가 중심이 되어 준비한 다양한 수위의 의장성명 초안을 모두 거부했다.20 의장성명에 남중국해 문제를 반영하고 싶지 않았던 캄보디아의 의도가 반영된 것인데 그 이면에는 캄보디아에 대한 중국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회원국 중 어느 하나라도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아세안의 방식에 따라 결국 2012년 AMM은 45년 만에 처음으로 의장성명 없이 종료되었다.
이런 아세안 분열의 틈은 강대국 입장에서는 아세안 회원국을 개별적으로 분리-포섭 (divide and co-opt)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으로 아세안 국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강대국은 분리-포섭의 전략으로 인해 아세안 국가들 사이 단결성은 더욱 약해지기도 한다. 분리-포섭의 강대국 전략과 아세안 내부의 분열은 지속적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낸다. 아세안을 둘러싼 강대국 중 이런 전략을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은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국가에는 당근을, 그렇지 않은 국가에는 채찍을 차별적으로 사용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며 이로 인해 아세안 국가들 사이 이해관계와 입장이 갈리고 아세안의 분열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중국이 아세안 국가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유화정책은 물론 경제적인 지원이고 이는 일대일로 전략을 통한 인프라 지원, 경제지원의 형태로 나타난다. 동남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낙후된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와 같은 국가들이 일차적인 수혜 대상이다. 이들 국가들은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과 직접적 갈등 관계가 없는 것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기대로 인해 아세안에서 중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한다. 앞서 언급한 프놈펜의 재앙이 발생한 원인인 캄보디아의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세 개 국가 외에도 대부분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의 경제적 지원, 인프라 건설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며, 따라서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란 당근 앞에 아세안 차원에서 남중국해 문제 등 중국이 불편한 사안에 대해서 앞장서 아세안 단일 입장을 만드는 노력을 하기는 쉽지 않다.
중국은 일부 동남아 국가에 대해 채찍을 동원하기도 한다. 필리핀은 남중국해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겪는 대표적 국가다. 2012년 필리핀과 중국이 남중국해 스카보로 쇼올 (Scarborough Shoal)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중국은 필리핀 산 바나나 수입을 금지했다.21 2016년에는 검역 문제로 다시 필리핀산 바나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22 동남아에서 강대국간 세력균형을 꾸준히 주장해 온 싱가포르도 중국의 표적이 되었다. 2016년 대만과 합동군사훈련을 마치고 싱가포르로 수송되던 장갑차 9대가 중국 당국에 의해 홍콩에 억류되었다. 세관은 신고되지 않은 물품을 이유로 억류했지만 중국 외교부는 싱가포르에 하나의 중국 (One China Policy)를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중국의 싱가포르 군사장비 억류는 대만과 군사훈련을 하는 싱가포르에 대한 경고였다.23 이듬해 2017년 싱가포르의 리시엔룽 (Lee Hsien Loong) 총리는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 정상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24
강대국 경쟁으로 훼손된 다자 제도
아세안이 주도하는 제도들의 잠재력에 대한 기대, 그리고 강대국들의 다자제도 존중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 다자 제도들이 강대국 경쟁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거나 강대국 간 대화의 장을 마련해 긴장을 낮추는데 공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강대국 전략경쟁이 이 제도를 약화시켰다. 강대국에 의한 아세안 주도 다자제도의 훼손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번째는 특정 강대국이 다자제도를 자신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중국의 아세안 주도 다자제도 활용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형태는 양자 간 경쟁이 아세안 주도의 다제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형태이다. 이런 경우 미-중이 어떤 레토릭과 전략을 펼칠것인가에 관심이 쏠리기 때문에 제도 자체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지만 반대로 이 다제제도들을 실제로 미-중 강대국 사이 전략적 대화를 이끌어 내고 이를 통해 강대국 경쟁을 완화하는 효과는 사라진다.
냉전 후 동남아 지역에서 철수했던 미국과 달리 중국은 냉전이 끝나기 직전에 비로소 지역 다자제도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아세안에 접근한 중국은 1990년대 아세안과 함께 APEC의 법적, 제도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노력, 비엔나 세계 인권회의 (Vienna World Conference on Human Rights)를 위한 아시아 지역준비회의 (Bangkok Regional Preparatory Meeting) 계기 아시아 예외주의 주장 등에서 보조를 맞추었다. 나아가 1991년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가 제안한 동아시아경제그룹 (East Asia Economic Group), 아세안이 제안한 ARF 등에 동조하며 지역 다자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까지 아직 G2라고 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중국 입장에서 약자의 무기인 다자제도에 적극성을 보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중국은 1997-9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만들어진 아세안+3에서부터 주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04년 아세안 주도의 아세안+3를 동아시아정상회의 체제로 개편해 아세안 주도를 약화시키고 일본을 소외시켜 중국 중심의 지역 다자 제도를 건설하려 했다.25
나아가 이 다자제도를 활용해 중국에 우호적 세력을 만들 필요도 있었다. 냉전이 끝난 이후 시기만 놓고 볼 때 장기적으로 동맹 체제 혹은 허브와 스포크 체제 (hub and spoke system)를 발전시켜온 미국과 달리 중국은 역내 동맹 세력이 없었다. 중국은 지역에서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우호적 세력을 확장해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세력권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은 아세안이 주도하는 지역 다자제도에 적극 참여했다. 이를 통해 아세안을 우군화 하고 지역 다자제도를 중국의 세력권을 형성하는 무기로 이용하고자 했다.26 결국 중국이 1990년대, 2000년대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제도에 적극 참여하고, 힘을 보태고 후일 주도적으로 움직인 것은 다자제도에 대한 존중이라기 보다는 다자제도를 중국의 강대국 지위를 강화하고 강대국 경쟁의 도구화 하려는 목적이었다.
중국이 아세안 주도의 다자제도를 중국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이용해 왔다면, 미국은 아세안 주도의 다자제도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아세안 주도 다자제도의 힘을 약화시켜왔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의 회의 참석은 매우 중요하다. 아세안 국가, 그리고 아세안이 주도하는 지역 다자제도의 입장에서는 강대국들의 참여가 다자 제도의 위상을 높이는데 중요하다. 이런 국가들의 참여를 통해 다자 제도의 위상이 높아질 때 이 제도가 강대국 행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커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제도를 주도하는 아세안의 위상과 영향력도 함께 제고된다. 무엇보다 강대국들의 참여가 있을 때 아세안 주도의 다자 제도를 통해 강대국 간 전략적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취지도 살아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아세안 주도의 다자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아세안 주도의 다자제도를 무시하는 인상을 남겼고 다자제도의 힘과 위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7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 (Donald Trump)는 그해 EAS에 참석하기 위해 아시아 순방을 겸한 출장길에 올랐으나 정작 EAS 정상회의가 개최되기 직전 일정을 바꾸어 귀국했다.28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과 2019년 EAS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2018년에는 EAS와 연이어 열린 APEC에 모두 펜스 (Mike Pence) 부통령이 참석했다. 2019년에는 참석자의 위상이 더욱 낮아져 국가 안보 보좌관인 로버트 오브라이언 (Robert O’Brien)이 참석했다. EAS에 참석한 아세안 국가 정상들은 오브라이언과 만남을 대부분 거절했다. 아세안 국가 정상들은 이를 아세안 국가들과 아세안 주도 EAS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였다.29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을 놓고 볼 때 이는 아세안 방면에서 큰 실수였다. 더 나아가 아세안 주도의 다자제도 입장에서 보면 이 다자제도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 내지는 무시를 아세안 주도 다자 제도의 위상을 크게 악화시키는 행위였다.
아세안 주도의 다자제도를 무력화시키는 강대국 행태의 두번째 유형은 더 직접적이다. 제도가 가진 잠재력에서 언급했듯이 실제로 EAS는 종종 미-중 정상간의 직접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는데 까지는 진전을 보았다. 예를 들어 2012년 EAS에서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중국 총리 웬쟈바오 (Wen Jiabao)는 별도의 만남을 가졌다.30 그해 초에 있었던 아세안 외교장관 회의에서 이슈가 된 남중국해 문제가 양 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제기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태 지역 해양안보 문제, 남중국해 문제는 다자적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중국을 압박했다. 남중국해 문제의 다자적 해결은 중국이 아닌 아세안 국가들이 선호하는 방향이다. 이에 대해 웬 총리는 남중국해 분쟁은 국가 주권의 문제이며 원칙적으로 문제를 가진 국가 양자간 해결해야 한다는 중국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31 2013년 EAS에서는 오바마 대통령 대신 참석한 케리 (John Kerry) 국무장관과 새로 중국의 총리가 된 리커창 (Li Keqiang) 사이에 똑같은 내용의 대립이 반복됐다.32
오바마 행정부를 넘어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EAS에서 상호 비판과 대립은 반복된다. 2018년 11월에 연이어 개최된 ASEAN+3, EAS, APEC에서도 다자 무대를 활용한 상호 공격과 대립은 지속되었다. 중국과 무역전쟁이 한참일 때 열린 이 정상회의들을 앞두고 10월에 펜스 부통령은 미국은 무역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은] 중국과 건설적 관계를 원한다. 중국이 이런 비전에서 멀어져왔는데, 중국 지도자들은 이 경로를 변경할 수 있다”고 했다.33 이어 펜스는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EAS에서 중국을 겨냥해 “인도-태평양에서 제국과 침략이 설자리는 없다”고 하면서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항행의 자유 작전은 지속될 것이고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화와 영토 확장 (territorial expansion)은 불법적이고 위험하다. [이런 행위]는 많은 국가의 주권을 위협하고 세계번영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중국에 경고했다.34 이런 펜스 부통령의 중국에 대한 비판에 시진핑 주석은 APEC에서 “냉전이든, 열전이든 혹은 무역전쟁이든 대결은 누구도 승자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고 하면서 “우리는 오만함과 편견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고 포용해야 하며 세상의 다양성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미국의 비판에 대해 응수했다.35
EAS 뿐만 아니라 미-중간의 경쟁은 ARF를 무대로도 펼쳐진다. 2010년 ARF에 참석한 당시 미 국무장관 클린턴은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아시아의 해양에 대한 접근, 그리고 국제법 존중 등 사안에 대해 국가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했다. 미국의 남중국해 문제 관여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발언이다. 이에 중국의 외교부장 양제츠 (Yang Jiechi)는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사안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클린턴의 중국에 대한 공격을 일축했다. 클린턴은 그해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EAS에서도 남중국해 문제가 미국의 국가적 이해 문제라는 점을 명확하게 했고, 그 이듬해 2011년 ARF에서도 중국을 겨냥해 “국제법에 따라 남중국해의 모든 영토를 주장하는 국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해야 하고…남중국해에서 해양 영토 (maritime territory) 주장은 적법한 육지 영토 (land feature)에 대한 주장에 근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중국의 역사적 소유권 권원 주장을 부정했다.36
1990년대부터 중국은 아세안 국가와의 관계, 아세안 주도의 다자제도를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꾸준히 활용해왔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EAS 가입은 역시 EAS를 중심으로 해서 지역 다자제도 안에서 커지는 중국의 영향력 견제를 위한 방편이었고 미국 역시 EAS를 중국 견제를 위해 활용했다. 다자 제도의 활용을 넘어서 미국과 중국은 꾸준히 EAS, ARF와 같은 아세안 주도 다자제도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다자회의를 계기로 자신의 입장을 알리고 지역 국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을 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 다자제도는 점점 강대국 간 전략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는 사이 이런 다자제도를 통한 강대국 간의 대화, 지역 국가들의 이익을 위한 실질협력의 추진은 점차 뒤편으로 사라졌다.
아세안 잠재력 현실화의 방안
미-중 경쟁의 현실, 더 일반적으로 강대국 경쟁의 국면에서 아세안은 강대국에 레버리지를 행사해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 10개국의 모임인 아세안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대국은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이 숫자의 힘으로 아세안은 강대국에 레버리지를 행사할 수 있다. 아세안이 주도하는 다자 제도 역시 강대국 사이 전략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한편 강대국을 다자 틀에 넣어 제어하는 기능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아세안, 아세안 주도 다자제도의 잠재력을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10개국 사이 단결이 강하지 않을 경우 강대국의 분할-포섭 앞에 무력화되고 레버리지를 상실한다. 아세안 주도의 다자 제도 역시 강대국에 의해서 오용되고 오히려 강대국 경쟁의 장으로 훼손된 경우가 많다.
아세안과 아세안 주도의 다자 제도가 가진 잠재력을 현실화하여 실질적으로 강대국 행동을 제어하고 강대국 경쟁으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영향을 차단하며 지역 중소국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아세안 내적 단결을 보다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보다 강한 내적 단결을 바탕으로 강대국 레버리지를 행사하는 동시에 지역의 이익이 비슷한 국가와 연대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강대국 경쟁이 지역 국가들을 두고 일어나는 것이라면 더 많은 지역 국가들의 연대를 통해 강대국에 대한 레버리지를 강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런 아세안 중심의 지역 국가들의 연대는 지역 질서에 대해서 강대국의 비전이 아닌 지역 중소국가들의 자체 비전을 발전시켜야 한다. 내용과 대안이 없는 레버리지는 강대국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세안의 내적 응집력 강화
아세안의 내적 응집력, 단결성을 강화하려 할 때 가장 큰 전제조건은 각자 도생보다 집합적 행동이 개별국가들에게도 이익이라는 인식의 공이다. 강대국 경쟁으로부터 오는 압력 앞에서 개별 국가들은 집합적 행동을 통해서 강대국 행동을 제어하기 보다는 자신의 좁은 이익을 찾아 움직이는 각자 도생의 방식을 택하고자 하는 유혹이 크다. 예를 들어 한 국가가 이웃 국가보다 먼저 중국 혹은 미국 쪽에 줄을 서 다른 아세안 국가에 비해서 초기에 보다 큰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의 과거 경험이 스스로 증명하듯이 중소국가 혹은 개발도상국이라고 할 수 있는 개별 아세안 국가의 대 강대국 레버리지는 크지 않다. 한 약소국이 개별적으로 강대국과 협상을 할 때 협상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개별적인 레버리지들이 모였을 때야 비로소 강대국에 대해서 보다 큰 협상력을 가진다. 더 나아가 개별 약소국이 중립적 상태를 떠나 특정 세력권에 편입되고 나면 자신이 가진 레버리지는 크게 약화되게 마련이다. 집단 행동이 아닌 개별 행동은 개별 국가의 힘을 크게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아세안의 집단 행동을 전제로 하고 아세안 내적 단결 강화를 위해 필요한 구체적 전략들은 아세안의 입장과 대안 마련, 아세안 내적 리더십, 제도의 강화 등이다. 아세안은 먼저 아세안 국가들의 집합적 방향,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아세안 역내 다양한 이익을 조율하는 일은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좀 더 낮은 수준, 그리고 개별 국가에 직접 이익이 되는 사안부터 아세안의 공통 입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강대국 경쟁, 강대국이 제시하는 지역 질서에 대한 대안을 스스로 마련하고 이를 고수하는 것이 아세안의 내적 단합을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최근 아세안이 발표한 인도-퍼시픽에 관한 아세안의 관점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과 같은 시도는 아세안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아세안의 대안을 강대국에 명확히 인식시키는데 바람직하다.37 느슨하더라도 이런 공동의 입장이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 유리하다. 이런 틀이 없다면 주요 사안에서 아세안 국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쫓아 각자 도생의 길로 가기 쉽다.
이런 아세안 집합적 입장의 도출, 아세안 내적 응집력 유지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한가지 조건은 아세안 역내 리더십의 존재다. 개별 주권 국가로 구성된 지역협력체는 어디나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겪는다. 구성원을 한데로 모으고 주도할 국가가 없을 경우 개별 국가들은 큰 불확실성 속에 누구도 먼저 나서 아세안 국가들을 하나로 모으고 논의를 주도하고 공통의 입장을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집단행동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단합된 행동으로 나서게 만드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과거 아세안에서는 국가차원으로는 인도네시아가, 개인 차원에서는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이와 비슷한 구심점을 제공한 적이 있다. 현재 아세안에서는 이런 구심점이 보이지 않는다.
세번째로는 아세안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 아세안의 법적-제도적 기반 강화 혹은 아세안의 방식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아세안의 방식 혹은 연성제도는 아세안 국가들이 선의로 공동 행동에 나선다는 가정이 있을 때 아세안을 유지하는 질서가 될 수 있다.38 아세안을 둘러싼 환경이 유리하거나 중요한 논란이 없을 때는 개별 국가의 선의에 의존할 수 있고 아세안 단결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강대국의 큰 압박 혹은 강대국 경쟁이라는 큰 변수를 만났을 때 이런 개별 국가의 선의에 기댄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소간의 법적, 제도적 강제성이 필요하다. 아세안의 대외적 역할이 늘어나고 아세안이 더 큰 지역 동학의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면 아세안의 내적 단결, 아세안의 제도적 강화를 위한 이행 강제, 분쟁해결 제도 등의 강화는 더욱 더 필요하다. 아세안 내에서도 아세안의 방식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199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39
지난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익숙해진 아세안의 방식을 수정하는 작업은 쉬운 일은 아니다. 아세안의 방식을 통해서 개별 아세안 국가들은 크지 않은 비용을 치르면서 상당한 이익을 얻어왔다. 개별 국가에 부과되는 의무나 정치적 부담은 크지 않은데, 아세안이라는 지역협력체를 통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지역 내 안정을 가져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며, 아세안을 통해서 대 강대국 레버리지도 어느 정도 행사해 이익을 얻어왔다.40 그러나 언제까지 아세안이 아세안의 방식에 안주할 수는 없다. 아세안은 2015년에 아세안 공동체를 건설하고 역내 협력과 통합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아세안공동체 건설의 과정에서 법적-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노력이 함께 진행되어야 아세안의 내적 단결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세안 주도의 중소국가 연대
앞서 언급한 아세안 내적 단결 강화는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먼저 아세안 내적 단결 강화를 통해서 아세안이 직접 강대국에 대해서 레버리지를 행사하고 강대국 경쟁을 완화할 수 있으며,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제도를 강화하는 기초 체력이 된다. 두번째로는 아세안의 내적 단결 강화는 아세안을 넘어서 지역 차원에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국가들의 연대를 만들어 내고 그 구심으로 아세안이 역할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미-중 사이 전략 경쟁이 지역 국가들에게 가져오는 부정적인 영향을 차단하고, 지역질서를 지역 국가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하기 위해서 아세안을 넘어 보다 많은 국가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많은 국가들이 참여한 전략적 연대는 아세안의 연대 보다 더 큰 협상력과 레버리지를 확보하고 강대국의 행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아세안이 이런 지역 중소국가의 연대를 만들어 내고 그 구심점 역할을 한다면 이는 아세안의 위상과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제도를 강화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최근 미-중 전략 경쟁과 이 경쟁의 부정적 영향이 확산되면서 지역 중소국가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자주 등장한다.41 지역 국가들의 연대를 통한 강대국 경쟁 완화, 바람직한 지역 질서 형성이란 주장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대외전략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자유주의 지역질서를 선호하는 지역 중소국가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중소국가 연대를 통해 지역질서를 중소국가의 이익에 맞게 보완하고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주장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Rory Medcalf와 Raja Mohan은 지역 중견국 (middle powers)들이 현재 미국, 중국과 양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과 중국을 포함하지 않는 중견국 연합 (middle-power coalitions)을 새로운 안보 제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2 이런 지역 중견국으로 일본, 인도, 호주, 한국, 그리고 아세안 국가 중 일정한 군사력과 외교력을 보유한 인도네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을 꼽는다.
지역 중소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거나 특정한 그룹을 형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별 국가들은 기존 강대국과 양자 관계에서 오는 방기 (abandoning)의 두려움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미국의 동맹국 등 안보적으로 미국에 의존한 국가들은 중소국가 연대에 참여할 때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공공재 상실을 두려워할 수 있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적인 경우 강대국을 견제하는 중소국가 연대에 참여할 때 놓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에 대해 우려할 수 있다. 부상하는 강대국에 대항한 중소국가 연대에 대해 강대국들은 힘을 앞세워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중소국가들이 연대할 경우 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이런 두려움으로 인해 형성되는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개별 국가가 이런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행동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중소국가 중에서 누군가 나서 다른 국가들을 설득하고 방향성을 보여줄 때만 다른 중소국가들의 참여를 확보할 수 있다. 중소 국가 연대를 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두번째로는 집단 행동을 망설이게 하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정도의 위기 의식이다. 1997-98년 경제위기때 만들어진 아세안+3는 미국이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지역 국가들 간 공통의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중 전략 경쟁이 지역 중소국가들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가, 미-중 전략 경쟁으로 인해 약화된 지역 질서는 지역 중소국가들의 이익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지역 중소국가들 사이 위기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위기 의식 공유가 중소국가들의 행동을 촉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소국가 연대가 제시하는 지역 질서에 대한 대안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대안은 중소국가 연대를 더욱 확장하게 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잠재적인 참여국가들에게 명확한 목표를 보여주어 이들 국가들이 강대국을 배제한, 혹은 강대국 질서로부터 자율성을 추구하는 연대에 나설 수 있게 한다. 중소국가 연대가 스스로의 대안을 가질 경우 참여국가들에게 명확한 목표를 보여주어 연대를 강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미-중 경쟁이 악화되든 지속되든 혹은 미-중이 타협을 보든 그 결과로 나오는 지역 질서는 중소국가의 이익을 반영하기 보다는 강대국의 이익을 반영할 가능성이 보다 크다. 지역의 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이든 아니면 중소국가의 이익을 반영해 현 질서를 수정, 보안한 것이든, 지역 중소국가 연대를 지역 질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중소국가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 앞서 지역 국가들 간의 위기 의식 공유를 통한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지역 중소국가들만의 별도의 논의의 장이 먼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과 신남방정책에 대한 함의
아세안이 강대국 사이에서 느끼고 있는 딜레마와 압박은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느끼는 딜레마, 압박과 매우 유사하다. 물론 유사한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한국과 아세안의 대응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아세안 국가들은 집합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한국에 비해 보다 대외정책, 대 강대국 정책을 쉽게 전환한다. 아세안 국가들의 외교적 전통이기도 하고 약소국의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의 대 강대국 관계는 보다 복잡하다. 한반도 문제로 인해 강대국 사이에서 운신의 폭이 더 좁다. 미국과 동맹 관계,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 한국의 행동반경을 좁히는 변수가 된다. 나아가 아세안은 10개국 연합으로 대 강대국 협상력이 크다. 단순 10개국의 협상력을 합한 것 보다 훨씬 큰 협상력을 가진다. 반면 한국은 이런 대 강대국 협상력 증폭을 위한 수단이 거의 없다. 오히려 북한이라는 마이너스 요소가 있을 뿐이다. 한국은 아세안과 관계 강화, 아세안의 잠재적 힘에 대한 지원을 통해 아세안과 한국이 전략적으로 서로 이익이 되는 협력을 해야 한다.
한국의 신남방정책이 추구하는 3P (peace, prosperity, people) 중에서 평화 (peace) 협력은 아세안 국가와 전략적 협력 심화를 통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한다. 그 이면에는 한-아세안의 전략적 협력으로 강대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줄이고, 지역과 글로벌 차원에서 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전략적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목표가 있다. 한-아세안 전략적 협력을 통해 한국은 아세안의 내적 응집력 강화, 지역 다자제도에서 아세안 중심성 강화를 적극 지원해 아세안의 협상력과 위상 강화를 지원해야 한다. 이는 아세안의 대 강대국 협상력 강화로 이어진다.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제도를 통해 강대국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아세안의 힘도 강해진다. 아세안의 강화를 통해 강대국 행동을 통제하면 그 긍정적 효과는 한국도 함께 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은 아세안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지원할 수 있는 국가군을 확보할 수 있다. 대 강대국 관계, 한반도 문제 등 한국의 대외관계, 전략적 문제에서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 10개의 국가를 얻게 된다. 신남방정책은 한-아세안 협력을 추동력으로 해서 우리와 유사한 전략적 딜레마를 안고 있는 지역 중소국가를 규합하는 전략 구상까지 나갈 수도 있다.
이런 보다 큰 틀의 전략적 구상을 하기 위해서 현재 신남방정책의 평화협력은 방향 설정을 새로 하고 협력의 내용을 재구조화 (restructure) 해야 한다. 지금까지 신남방정책 1.0의 평화협력은 양자협력 위주로 구상되었다. 문재인 정부 남은 기간 추진될 신남방정책 2.0의 평화협력은 양자를 넘어 다자협력과 지역적 관점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경제협력인 번영 부문, 사회문화 협력인 사람 부문의 협력과 다르게 평화협력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목표로 한다.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해 한-아세안 양자 관계만 강화할 것이 아니라 지역의 전략적 환경, 지역 전통-비전통 안보 문제, 지역 다자협력, 지역 강대국들의 전략 구상 등을 모두 고려한 한-아세안 협력이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을 위해서는 지역 주요 전략, 안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가 시급하다고 해서 한국이 한반도 문제 하나만 관심을 두는 단일 쟁점 국가 (single issue country)에 머물 수는 없다. 스스로 자부하듯 명실상부한 중견국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부담을 지고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Kuik Cheng-Chwee. 2008. “The Essence of Hedging: Malaysia and Singapore’s Response to a Rising China” Contemporary Southeast Asia. 30:2.
- 2. 대표적으로 Amitav Acharya. 2009. Whose Ideas Matter? Agency and Power in Asian Regionalism.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와 Alice D. Ba. 2009. [Re]Negotiating East and Southeast Asia.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 3. David Martin Jones and M. L. R. Smith. 2006. ASEAN and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Regional Delusion. Edward Elgar Publishing: Northampton. Pp. 144-169.
- 4. Simon Tay. 2019. “ASEAN Centrality and Collective Leadership: New Dynamics and Responses” in Simon Tay, S. Armstrong, P. Drysdale and P. Intal eds. Collective Leadership, ASEAN Centrality, and Strengthening the ASEAN Institutional Ecosystem. ERIA: Jakarta. Pp. 92-97.
- 5. Richard Stubbs. 2004. “ASEAN: Building Regional Cooperation” in Mark Beeson ed. Contemporary Southeast Asia: Regional Dynamics, National Difference. Palgrave: Houndmills. p. 217.
- 6. 주변 강대국들은 중국과 인도 (2003년)을 시작으로 해서 한국, 일본, 러시아 (2004년), 호주, 뉴질랜드 (2005년), 그리고 결국 미국 (2009)년까지 TAC에 서명을 했다. Marty Natalegawa. 2018. Does ASEAN Matter? A View from Within. ISEAS: Singapore. p. 84.
- 7. Nick Bisley. 2018. “After APEC, US-China tensions leave cooperation in the cold” The Conversation. November 19.
- 8. Kurt Campbell. 2016. The Pivot: The Future of American Statecraft in Asia. Twelve Books: New York. Pp. 260-264.
- 9. Tan See Seng. 2017. “Defence and Security Cooperation in East Asia: Wither ASEAN Centrality? in Alan Chong ed. International Security in the Asia-Pacific: Transcending ASEAN towards Transitional Polycentrism. Palgrave: Singapore. Pp. 71-77.
- 10. ARF는 안보를 직접 해결하는 기구가 아니라 예방외교 (preventive diplomacy), 신뢰구축 (confidence building)을 통해 안보문제를 다룰 메커니즘을 찾는데 까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아세안이 추구하는 연성제도 (soft institution)의 전형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ARF에 관한 흔한 오해 중 하나가 ARF가 지역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만들어 졌다는 오해다. 이런 오해로 인해서 ARF가 지역 안보 문제 해결에 직접 개입하거나 안보 현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기구라는 비판이 자주 있다. 그러나 ARF의 Concept paper에서 보듯이 ARF는 지역 안보 문제 해결의 방식을 찾기 위한 제도이지 문제 해결의 메커니즘은 아니다. 1단계 신뢰구축, 2단계 예방외교를 통해 3단계로 지역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메커니즘을 모색하는 것이 ARF concept paper에 나온 ARF의 목적이다. 따라서 ARF는 시작부터 문제해결을 위해 강력한 법과 제도에 기반한 제도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ASEAN Regional Forum. 1993. “ASEAN Regional Forum: A Concept Paper”와 Rodolfo C. Severino. 2009. The ASEAN Regional Forum.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Singapore. Pp. 32-40을 볼 것.
- 11. ARF는 지역의 주요 국가를 모두 포함한다. 미국, 중국은 1994년부터 ARF의 창립 국가로 참가했다. 그 외에도 유럽연합, 러시아, 일본, 인도 등 지역 주요 국가는 물론이고 북한도 2000년부터 ARF에 참여하고 있다. 지역의 주요 강대국들과 안보 관련 이슈를 가진 주요 국가들을 모두 포함하는 셈이다. 아세안 6개국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태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대화상대국 (캐나다, 미국, EU,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옵서버 (베트남, 라오스, 파푸아뉴기니), 그리고 협의국 (consultative partner)인 중국과 러시아는 1994년부터 ARF의 회원국 이었다. 이후 아세안 회원국 확장, 대화상대국 확장에 따라 캄보디아 (1995), 인도 (1996), 미얀마 (1996) 등의 국가들이 ARF에 포함되었다. 이후에는 몽골 (1998), 북한 (2000), 파키스탄 (2003), 동티모르 (2005), 방글라데시 (2006), 스리랑카 (2007)까지 회원국에 포함되었다. Rodolfo. C. Severino. 2009. The ASEAN Regional Forum. ISEAS: Singapore. Pp. 14-30.
- 12. EAS는 명확하게 그 성격을 지역 정상들 간 큰 전략적 문제를 논의하는 장으로 규정하고 있다. EAS 10주년 기념 쿠알라룸푸르 선언 (Kuala Lumpur Declaration on the 10th Anniversary of the East Asia Summit)을 보면 EAS는 “동아시아의 평화, 안정,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목적으로 폭넓은 전략적, 정치적, 경제적 공통의 이해관계 이슈들에 관한 대화를 위한 정상들이 주도하는 포럼”이라고 성격 규정이 되어 있다. 이 문구는 해마다 EAS 정상회의 의장성명에 반복되어 삽입된다. EAS외에 ADMM+에 관해서는 Tan See Seng. 2017. “Defence and Security Cooperation in East Asia: Wither ASEAN Centrality? in Alan Chong ed. International Security in the Asia-Pacific: Transcending ASEAN towards Transitional Polycentrism. Palgrave: Singapore and Tan See Seng. 2019. “ADMM+ a plus for mitigating US-China rivalry” East Asia Forum. 22 February.
- 13. ARF ISM은 5개로 ARF 장관회의 사이 구체적인 안보 분야에 대한 실행계획을 만들고 우선 순위를 정하는 논의를 한다. ISG는 ISM이 종료되고 장관회의가 열리기 전 ISM 등 ARF 활동을 종합하고, 장관회의 아젠다를 설정하는 등의 역할을 맡는다. ADMM+는 회원국 국방부간 협력을 위해 5개의 실무반회의를 가지고 있는데, 해양안보, 반테러리즘, 인도적 지원과 구조구난, 평화유지활동, 군용 의약품 등의 주제를 다룬다.
- 14. White House. 2015. “Factsheet: Advancing the Rebalance to Asia and the Pacific” November 16.
- 15. White House. 2016. “Press Conference of President Obama after ASEAN Summit” September 08.
- 16. The U.S. Department of Defence. 2019. Indo-Pacific Strategy Report: Preparedness, Partnership, and Promoting a Networked Region.
- 17. Xinhua. 2019. “Speech by H. E. Li Keqiang Premier of the State Council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t the 12th East Asia Summit” 14 November.
- 18. Embassy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Australia. 2017. “Wang Yi Attends 24th ARF Foreign Ministers’ Meeting” August 07.
- 19.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020. “Bringing the East and West Together in Shared Commitment to Multilateralism” Speech by Wang Yi, Foreign Minister of China at the 56th Munich Security Conference. Munich 15 February.
- 20. Ernest Z. Bower. 2012. “China Reveal Its Hand on ASEAN in Phnom Penh” CSIS Commentary. July 20 and Prak Chan Thul. 2012. “SE Asia meeting in disarray over sea dispute with China” Reuter. July 13.
- 21. Asia Sentinel. 2012. “The China-Philippines Banana War” Asia Sentinel. June 7.
- 22. 중국은 필리핀 바나나 수출의 35%를 차지하는 큰 시장이고, 수출액은 당시 1억 5천만달러에 달했다 Louise Maureen Simeon. 2016. “China lifts import ban on Philippine bananas” Philstar. October 7.
- 23. 싱가포르가 대만과 군사훈련을 한 것은 2016년이 처음이 아니고 1974년 합의한 이후 1975년부터 합동훈련을 지속해왔다. Phia Siu. 2017. “Singapore military vehicles still detailed, says Hong Kong customs” South China Morning Post. 3 January.
- 24. Bhavan Jaipragas. 2017. “What new Silk Road snub means for Singapore’s ties with China” South China Morning Post. 18 May.
- 25. 배긍찬. 2005. “제 1차 동아시아 정상회의 (EAS) 개최 전망 및 과제” 『국립외교원 주요국제문제분석』 No. 2005-22.
- 26. Hoo Tiang Boon. 2017. “Flexing Muscles Flexibly: China and Asia’s Transitional Polycentrism” in Alan Chong ed. International Security in the Asia-Pacific: Transcending ASEAN towards Transitional Polycentrism. Palgrave: Singapore.
- 27. 반면 아시아 방면에 보다 전략적 관심을 보였던 오바마 행정부는 지역 다자협력에 적극 참여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클린턴 (Hillary Clinton) 국무장관, 뒤를 이은 케리 (John Kerry) 국무장관은 ARF 회의에 꾸준히 참석했다. EAS에 가입한 첫해인 2010년에는 클린턴 국무장관이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이후 2011년부터 미국은 EAS에 정상이 꾸준히 참석했다. 오마바 행정부에서 대통령이 EAS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2013년 미국 국내 예산 문제로 행정부 기능이 정지했을 때가 유일하다.
- 28. Laura Zhou and Viola Zhou. 2017. “Donald Trump’s early East Asia Summit exist casts doubt over US ties to Asia” South China Morning Post. 14 November.
- 29. Mathew Davies. 2020. “Repairing the US-ASEAN relations” East Asia Forum. March 14.
- 30. William Mallard. 2012. “Obama, China’s Wen Meet on Summit Sidelines” The Wall Street Journal. November 20.
- 31. Jason Szep and James Pomfret. 2012. “Tensions flare over South China Sea at Asian summit” Reuter. November 19 and Natasha Bereton-Fukui, Chun Han Wong and Enda Curran. 2012. “Sea Tensions Erupt at Asia Summit” The Wall Street Journal. November 20.
- 32. 배긍찬. 2013. “2013년 ASEAN 관련 정상회의 결과 분석: 한-ASEAN, ASEAN+3, EAS를 중심으로” 『국립외교원 주요국제문제분석』 No. 2013-33.
- 33. Josh Rogin. 2018. “The Trump administration just reset the U.S.-China relationship” The Washington Post. October 5.
- 34. White House. 2018. “Prepared Remarks for Vice President Pence at the East Asia Summit Plenary Session” Suntec City, Singapore. November 15.
- 35. Ben Westcott. 2018. “Xi Jinping says no one wins in cold war, but Pence won’t back down” CNN. 17 November.
- 36. Hillary Rodham Clinton. 2010. Intervention at the East Asia Summit. October 30과 Andrew Quinn. 2011. “U.S. calls for more clarity on South China Sea claims” Reuters. July 23.
- 37. ASEAN. 2019.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https://asean.org/storage/2019/06/ASEAN-Outlook-on-the-Indo-Pacific_FINAL_22062019.pdf)
- 38. Alan Collins. 2003. Security and Southeast Asia: Domestic, Regional and Global Issues. Lynner Rienner Publishers: Boulder. Pp. 131-137 and Simon Sheldon. 2008. “ASEAN and Multilateralism: The Long, Bumpy Road to Community” Contemporary Southeast Asia. 30:2.
- 39. Jurgen Haacke. 2003. ASEAN’s Diplomatic and Security Culture: Origins, development and prospects. Routledge: London. Pp. 165-190 and Marty Natalegawa. 2018. Does ASEAN Matter? A View from Within. ISEAS: Singapore. Pp. 53-66.
- 40. Jusuf Wanandi. 2001. “ASEAN’s Past and the Challenges Ahead: Aspects of Politics and Security” in Simon S. C. Tay, Jesus P. Estanislao and Hadi Soesastro eds. Reinventing ASEAN. ISEAS: Singapore. Pp. 25-29 and Richard Stubbs. 2009. “Meeting the Challenges of Region-Building in ASEAN” in Mark Beeson ed. Contemporary Southeast Asia (2nd edition). Palgrave: Houndmills. Pp. 239-240.
- 41. 예를 들면 Ralf Emmers and Sarah Teo. 2015. “Regional security strategies of middle powers in the Asia-Pacific”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Asia-Pacific. 15: 2.; Tanguy Struye de Swielande. 2019. “Middle Powers in the Indo‐Pacific: Potential Pacifiers Guaranteeing Stability in the Indo‐Pacific?” Asian Politics & Policy. 11:2.; Mark Beeson and Lee W. 2015. “The Middle Power Moment: A New Basis for Cooperation between Indonesia and Australia?” in C. B. Roberts, A. D. Habir and L. C. Sebastial eds. Indonesia’s Ascent. Palgrave Macmillan: London.; Ali Wyne and Bonnie Glaser. 2019. “A New Phase in Middle-Power Adjustment to U.S.-China Competition?” The National Interests. November 5.; Roland Paris. 2019. “Can Middle Powers Save the Liberal World Order?” Chatham House Briefing. June.
- 42. Rory Medcalf and C. Raja Mohan. 2014. “The U.S.-China Rivalry Has Asia on Edge: Can Middle Powers Create Stability?” The National Interest. August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