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연횡은 중국 전국시대에서 유래한 말이다. 강국으로 부상한 진나라에 맞서 다른 여섯 나라들이 연대해 생존을 유지한 것이 합종이고, 이후 진나라의 압박과 설득으로 합종을 깨고 각각 진나라와 동맹을 맺은 것이 연횡이다. 이후 진나라는 동맹을 맺었던 여섯 나라를 하나씩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한다. 강대국을 이웃으로 둔 ‘지정학의 저주’는 역사와 시간을 관통하는 고민거리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세계질서를 놓고 싸우는 패권경쟁이기에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핵무기 출연으로 ‘강대국 간 세력 전이에는 항상 전쟁이 따른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오늘날 적용되지 않은 것뿐이지, 싸움의 본질은 같다.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이나 중국의 일대일로는 21세기 패권경쟁의 나침반과 같고 무역전쟁은 무력전쟁을 대신한 충돌의 양상이다.
미·중 패권경쟁은 정치·경제적으로 양국 사이에 놓여 있는 한국에 최악의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은 안일하다. 미·중 양국에서 오는 압박을 기업의 선택 문제로 미루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따로 일 수 없는 국가총력전의 시대에 무책임한 행태다. 외교부에 전담조직을 만들었지만 시기도 늦고 방향도 틀렸다. 외교만이 아닌 경제와 산업 전반의 대응책 수립이 절실하다. 늦게나마 조직을 둔다면 청와대나 총리실 산하로 하고 정책조정에 힘써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가능하면 선택을 뒤로 미루려는 모습에선 미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위기가 지나가길 바라는 모습에서, 위험을 느낀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다는 타조효과를 연상케 한다. 이래선 안 된다.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전략적 사고다. 현재의 단순한 손익계산을 넘어 미·중 패권경쟁의 결과가 우리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심모원려가 선행돼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오늘의 선택을 해야 한다. 작금의 상황에 비추어 미래를 보자. 미국은 우리의 동맹국이다. 위기가 도래했을 경우 함께 싸워줄 파트너다. 향후 미국이 우리에게 행사할 정치적 영향력도 크지 않다. 시장 개방이나 방위비 분담 같은 자국이기주의가 없지 않겠지만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상황 증진을 지원할 가치의 공유자다. 더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부딪힐 일도 적다. 국력을 놓고 봐도 상당기간 미국은 중국에 대해 군사적·경제적 우위를 유지할 것이다.
중국은 제1의 무역 파트너로서 우리 경제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좋은 이웃이다. 하지만 중국의 성장과 함께 경쟁이 치열해지고 우리 기업의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 군사적 위기가 도래해도 함께 싸워줄 나라가 아니다.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와 같이 우리와 거리를 둘 가능성이 높다. 향후 중국이 행사할 정치적 영향력도 달갑지 않다. 과거 마늘파동이나 사드 제재와 같이 중국의 국익에 필요하다면 정치적 압박과 일방적 제재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가까운 이웃이라 부딪힐 일도 많다. 중국 스스로 변하지 않는 한 우리가 바라는 중국은 없다. 미·중 경쟁에서 중국이 승리하면 그 이후의 모습은 어떨까.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한국에 대해, 경제적 압박에 있어 중립을 택했다고 특별한 보상을 하겠는가. 패권경쟁에서 밀린 미국이 동북아에서 물러설 경우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주둔에 위기가 찾아오지 않겠는가. 역내 패권자로 등장한 중국이 이웃 국가들에 행사할 정치적 영향력은 지금보다 줄어들겠는가. 당장의 경제적 손실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미래의 모습이다.
중국은 과거 진나라가 합종을 깨고 연횡을 한 것처럼 미국의 대중국 압박 동참 요구를 받는 국가들을 각개격파하며 현 상황을 돌파하려 할 것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미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나. 상황이 가변적이고 충격도 클 것이기에 신중히 행동해야겠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 본 글은 6월 17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