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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진정한 평화와 안전은 자기의 자주권을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물리적 힘에 의해서만 담보된다.” 힘에 의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를 강조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5월 9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실험에 참관했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이다. 한편으로는 체제가 보장되고 위협이 해소되면 핵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력 증강과 힘에 기반한 평화를 외치고 있다. 만성적 식량난에도 무력증강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김정은 정권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군이 흔들리고 있다. 북한 어선 1척이 동해 북방한계선(NLL)에서 직선거리로 130km나 떨어진 삼척 앞바다까지 왔지만, 어민들이 신고할 때까지 해군과 육군은 이를 포착하지 못했다.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도 확인하지 못한 채 한 달 넘게 분석만 하더니 이젠 경계마저도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간 성장해 온 우리 군의 피나는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전 실패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 실패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가장 기본적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데 대한 통렬한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

군 당국은 현존 장비로는 ‘소형 목선을 탐지해 내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과거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소형선박을 활용해서 침투할 경우 어떻게 대비하겠다는 것인가. 그간의 준비 소홀을 드러낸 변명일 뿐이다. 탐지장비가 부족했다면 보완을 하고 인력이 부족했다면 증원을 해야 했다. 예산사용의 우선순위나 작전운용의 미숙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경계 실패를 진솔히 사과하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를 소상히 설명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평화를 명분으로 추진하고 있는 남북 간 재래식 신뢰구축이다. ‘9·19 군사분야 부속합의서’로 인해 한국군의 감시정찰능력이 제약받고 있고, 서해 평화수역이나 공동어로수역이 개시될 경우 해상경계에 더욱 심각한 차질이 예상된다. 물론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면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이다. 하지만 북한 핵능력은 날로 증강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군의 장점은 발목을 잡히고 이젠 경계태세마저 구멍이 뚫렸으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행태를 보라. 우리민족끼리를 외쳐대며 남북 정상 간 합의내용을 이행하라고 연일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기본합의서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과 같이 자신들이 불리한 합의는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 북핵 폐기에는 관심이 없고 미사일 실험을 하며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 의도는 하나다. 한국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갖고 남북관계를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안보의 최후 보루인 우리 군은 정부의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뒷받침하느라 고유의 목소리를 상실한 지 오래다.

지난 2년간 우리 군에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자. 장군 갑질을 명분으로 4성장군을 체포했지만 사실상 무죄로 종료됐다. 기무사 쿠데타 음모라며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했지만 결국 전직 기무사령관의 생명을 앗았을 뿐 용두사미가 됐다. 새로 발간된 국방백서는 북한군을 더 이상 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장병들에 대한 정훈교육에서는 북한 위협을 다루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북핵은 그대로인데 전시작전통제권은 조기에 전환하려 한다. 우리 군의 독자적 대응방안인 한국형 3축 체계는 이름이 바뀌고 내용도 순화됐다. 국방예산이 늘었고 인권 상황은 개선됐지만 과연 우리 군은 더욱 강해졌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미·중 패권경쟁과 북핵 문제로 격랑이 일고 있다. 한국을 제외한 모두가 현실주의에 기반한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고 있다. 우리만 장밋빛 희망에 기대어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지 못하겠다면, 평화를 위한 힘이라도 키워야 한다. 경계의 실패는 이러한 기준 어디에도 용서받기 어렵다. 치열한 반성과 자기 혁신을 통해 강군으로 거듭나는 대한민국 국군을 기대한다.

 

* 본 글은 6월 18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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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안보통일센터

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