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재현되고 있다. 북한이 이미 남북 군사합의를 여러 차례 어긴 상황에서 우리만이 이를 일방 준수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군사합의 효력 정지가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018년 남북 간에 맺어진 이 합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미 동력을 상실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첫째, 북한의 선의를 근거 없이 기대해 우리의 강점을 스스로 무장해제 한, 설계단계부터 어그러진 약속이었다. 9·19 군사합의는 군사분계선 인근 일정 지역에서의 적대행위(포사격 훈련 및 야외 기동훈련 등) 중지,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 전방지역에서의 사격 및 기동훈련이나 감시·정찰활동을 제약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군에 비해 장비 및 물자 면에서 우위에 있는 우리의 발을 묶는 조치였다. 대치하는 쌍방 간의 긴장을 해소하고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는 군비통제의 가장 초보적인 조치는 ‘신뢰구축조치(Confidence Building Measures·CBMs)’이고 여기에 적용되는 ‘신뢰’ 개념은 매우 엄밀하고 제한적이어야 한다.
9·19 군사합의는 북한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검증단계를 건너뛰고 운용적 군비통제 조치의 일부를 도입했고, 이는 정치적 성과에 집착한 조치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둘째, 9·19 군사합의는 더 이상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를 보장할 수 있는 장치가 아니다. 국방부가 발행한 ‘국방백서 2022’는 2019년 11월의 창린도 일대 해상 포격에서 2022년 12월의 무인기 침투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위반한 17건의 군사합의 위반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다.
더욱이 2020년 이후 북한이 감행해온 숱한 탄도미사일 및 방사포 발사 사례 등은 군사합의의 기본 바탕인 2018년 평양공동선언에서 명시된 ‘한반도 전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전쟁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관계 해소’라는 비전을 이미 사문화시켰다.
이미 북한이 수시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긴장 고조를 막기 위해 우리라도 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셋째, 우리의 안보 상황을 고려할 때, 대북 감시·정찰 능력의 강화가 시급한 시점이다. 최근의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상대방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가장 기본은 상대방의 위협의지와 능력을 조기에 탐지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하마스의 도발 양상이 완전히 같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위협 억제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동향을 감시할 눈과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
중국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사성어 중 ‘송양지인’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는 ‘송나라 양공의 어진 심성’이지만, 사실은 강을 건너는 적을 앞에 둔 유리한 상황에서도 명분과 예의만을 내걸고 기다리다가 결국 패배한 어리석은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의 대비 태세를 격상함으로써 도발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선의를 갈구하면서 평화라는 단어를 오용하면 이런 함정에 빠지게 되고, 실제로 우린 과거 그런 우를 이미 범했다. 지금 그런 행위를 계속하자는 이야기인가.
* 본 글은 11월 3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