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의 섬들은 고대로부터 중국의 영토다.
우리는 영토 주권을 수호할 권리가 있다”
– 시진핑
“간척, 건설 행위와 분쟁지역의 군사화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시 주석에게 전달했다.”
– 버락 오바마
지난 9월 말 시진핑 주석의 미국 방문 당시 공동 기자회견에서 양 정상 간에 오갔던 남중국해 관련 발언들이다. 그로부터 한달 후 미국은 구축함 라센(Lassen)호를 수비 산호초(Subi Reef, 중국명 주비다오, 渚碧礁) 해역 12해리 안으로 진입시켜 정찰했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를 확인하는 작전이라고 했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중국 해군 함정을 급파하여 라센호를 추적하는 한편, “중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위험하고 도발적인 행위를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2012년 미국과 중국 간의 군사대립 이후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긴장이 다시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미국의 득점
2012년 미국은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호를 남중국해에 파견했다. 동중국해에서 일본을 겨냥한 중국의 해상군사훈련이 있은 후였다. 후진타오 당시 중국 주석이 중국의 대양해군 건설을 천명한 후였다. 2012년 조지 워싱턴호 파견이 후진타오 주석에 대한 경고였다면 2015년 라센호 파견은 시 주석에 대한 경고다.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행동까지 취할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의 천명이자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필리핀, 베트남에 대해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중국의 확장을 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이번 작전에서는 항행의 자유를 특히 강조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이 영토라고 주장하는 지역의 영해로 해석이 가능한 12해리 이내로 미군 함정을 진입시키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중국이 주장하는 남중국해 영토를 미국은 인정하지 않으며 이 지역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운 항행이 보장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계산된 작전이었다.
미국의 실점
이번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점들도 많다. 우선 작전의 효과가 크지 않았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벌이는 간척이나 건설 사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중국은 적어도 2014년 초부터 간척 사업을 해 왔다. 2015년 초 중국의 이런 행동이 관심사로 떠오른 뒤에도 미국은 몇 달 동안 구두 경고를 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라센호 파견은 중국의 간척사업이 시작된 지 1년 반이 넘는 시점에 이루어졌다. 남중국해에서 유사시 미국이 신속한 군사적 행동을 보여줄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다음으론 시점의 문제다. 미국은 최근 몇 주 동안 남중국해에서의 항행 자유에 관한 목소리를 높여 왔고, 중국이 주장하는 영토의 12해리 안으로 진입해 군사작전을 전개할 것이라고 계속 밝혀왔다. 라센호 파견은 이미 예견됐고 언제냐의 문제만 남아 있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군사적 행동이고 따라서 중국에 극대화된 충격을 주기에는 미흡했다. 중국의 반발이 뒤따르자 미국은 중국의 영해뿐 아니라 필리핀, 베트남이 점령한 섬의 12해리 안에서도 항행 자유 보장을 위한 행동을 곧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발표가 미국에 중립적 이미지를 주기는 하지만, 중국 견제라는 효과는 더욱 감소된다.
이뿐 아니다. 라센호의 궤적도 문제다. 라센호가 지나간 수비 산호초는 현재 국제법으론 명확하게 영해를 인정받을 수 없는 지형이다. 수면 위가 아니라 수면 아래 섬인데 중국이 간척사업으로 면적을 넓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라센호가 도전했던 중국의 12해리는 어차피 국제법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해역이었다. 중국이 보다 강력하게 영해를 주장할 수 있는 다른 섬들의 12해리 안으로 항해를 했다면 작전의 상징적 효과는 더욱 컸을 것이다.
문제는 국제법이 아니라 정치다
얼마 전 필자가 참여했던 한 해양 문제 관련 회의에서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중국의 대표적 연구기관 출신인 한 참석자는 중국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몇 가지 주장을 펼쳤다. 중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간척 사업 등에 늦게 뛰어든 편이며, 중국의 간척∙건설 사업이 섬들의 국제법적 속성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중국은 해양에서 중국의 적법한 이익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론 남중국해에서의 간척∙건설은 평화적 목적을 위한 것이며 ‘대국으로서(big country) 중국의 국제적∙지역적 책임을 위한 행동’이라고 결론을 냈다.
반면 미국의 입장은 ‘남중국해에서 벌이는 중국의 행동들은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법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토 주장은 국제법적으로 인정되기 어려우며, 이 해역에서 법적으로 인정된 항행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센호의 파견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가 보장됨을 보이고 이를 수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양측 모두 국제법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정치적인 데서 나온다. 우선 중국의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도 스스로 인정하듯 중국이 ‘국제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대국’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주변국에 미치는 정치적 파장도 고려해야 한다. 덩치 큰 코끼리에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움직일 때 발생하는 주변 작은 동물들이 입게 되는 부수적 피해에 대해서도 코끼리는 민감해야 한다.
미국은 국제법으로 인정되는 항행의 자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언급한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레토릭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힘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다. 라센호 파견도 늦은 감이 있다. 이 정도로는 중국의 반대편에 서 있는 동남아 국가들에게 정치적∙전략적 확신을 주기에 미흡하다. 더욱이 국제법을 강조한다는 것이 기계적 중립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수비 산호초에 군함을 파견한 데 이어 베트남, 필리핀이 주장하는 영토의 12해리 안으로도 군함을 파견하겠다고 하는 발표가 대표적이다. 중국에게 충격을 주기에 다소 미흡하다.
남중국해 문제는 어디로
그러면 이런 행동들이 양국 간의 군사적 마찰로 본격화 할 것인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물론 남중국해는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다. 중국은 영토 주권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본다. 미국은 양보를 할 경우 대 아시아 정책 전반이 흔들린다. 향후 며칠 동안 충돌까지 가지 않는 몇 번의 무력시위가 예상된다. 일본, 필리핀, 베트남 등도 여기에 제한적으로 동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국이나 중국 모두 상대와 일전을 불사할 정도로 한가하거나 체력이 남아 돌지 않는다.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오바마 대통령이나 경기 하락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시진핑 주석이나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할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화하면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로 양국 관계가 매끄럽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선거전에 뛰어든 사람들은 아직 정책 결정권이 없는 후보들이어서 문제는 안 된다.
다만 저강도의 조치나 작전, 비난전은 지속된다. 늘 그랬듯이 남중국해 문제는 긴장이 상승하는 국면과 하강하는 국면을 반복하면서 풀리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관전 포인트는 언제 이 갈등 양상이 다소 누그러지고 화해가 상승하는 국면으로 접어 드느냐다. 이 지역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는 늘 잠시 제쳐두고 유보되어 왔다. 영토 분쟁도 어떤 정치적 모멘텀이 발생하면 이를 계기로 당분간 현안에서 내려 놓는 방식으로 관리되어 왔다. 미-중 간에 이 같은 정치적 모멘텀이 찾아오면 남중국해 문제도 당분간 조용한 관리 모드로 들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