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학번이던 내게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의 기억은 가슴속에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한일관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리고 20여 년.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본의 반발부터 2018년 강제징용 문제,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와 한국의 불매운동까지. 한일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관계, 혹은 악순환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다.
지금의 10대와 20대에게 한일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길게는 10년 이상 한일관계가 악화일로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한일 관계는 어쩌면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양국이 서로 마음을 닫았지만 일본에서는 K팝과 K뷰티가 유행하고 ‘사랑의 불시착’,‘이태원클라쓰’ 같은 K콘텐츠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는 ‘귀멸의 칼날’과 ‘슬램덩크’가 극장가를 휩쓸었다.
비행기로 2시간이면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는 가까운 이웃 나라지만 역사 문제로 얽힌 양국 관계는 조금은 껄끄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한일 갈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간 한일 양국이 서로에게 보여준 적대감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성향과 이데올로기적 대립, 동경과 선망, 경계와 적대의 대상으로 일본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와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하게 일본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 사이. 이른바 ‘낀 세대’인 나는 양쪽의 시선이 이해되는 동시에 또 이 간극이 낯설다. 한일관계의 좋았던 시절을 머리로는 이해시키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기는 쉽지 않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그 가능성을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달 16일, 우리 대통령이 일본에 간다. 다자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된 걸 제외하고, 온전한 양자 회담을 위해 정상이 준비하고 만나는 것은 12년 만이다. 3월 6일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 해법을 발표한 후 열흘 만에 이뤄지는 정상회담이다. 그래서 여전히 부족하고 미흡하며 채워야 할 부분은 많지만, 한국의 결단으로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다. 해결해가야 할 과제가 더 많다는 점에서 이번 만남은 그 시작을 알리는 자리다. 그래서 양 정상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극도로 악화되었던 한일관계를 떠올리면, 양국 정상의 친근한 모습은 다소 낯설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갈등과 대립을 넘어 협력과 화합의 관계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자리였으면 한다. 서로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치유하고 과거에서 미래를 잇는 만남이 되기를 희망한다.
12년 만의 한일 정상회담에 국내외의 많은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그토록 강조해 온 ‘미래 세대’들이 있다. 양국이 반목과 불신으로 서로 으르렁거렸다면 양 정상은 이제 두 국가가 어떻게 화해하고 함께해 나갈지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다음 세대가 이어갈 한일관계는 조금은 더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따뜻한 말로 서로 보듬어 주고,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길 희망한다. 그 시작이 이번 한일 정상회담이었으면 한다.
* 본 글은 3월 1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