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남북관계 발전에 반대하지 않지만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북핵 폐기 협상에 가시적인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남북관계를 무리하게 밀어붙여선 안 된다는, 과속 스캔들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다. 대북 제재를 우회해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비핵화를 추동하겠다는 한국의 ‘선순환’ 논리에 대한 완곡한 반대 표시라고 할 수도 있다.
1차 미·북 정상회담 이후 양측의 실무협상이 답보 상태였고, 간헐적인 협상의 내용도 공개된 게 거의 없어 도대체 미국의 입장이 뭔지에 대한 혼란이 많았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안보보좌관 등 시각이 다른 고위 관료들의 상충된 발언도 혼란을 부추겼다. 하지만 최근 비건 대표가 평양 방문 전 스탠퍼드대에서 가진 연설을 통해 많은 의혹이 해소될 수 있었는데, 특히 제재의 중요성을 되풀이해서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트럼프 행정부 대북정책의 핵심은 북핵 폐기 완료 때까지 돈은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돈줄을 죄어 김정은을 협상장에 끌어냈는데 이를 풀면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북한의 비핵화 단계에 맞춰 해줄 수 있는 보상도 종전선언, 연락사무소 개설 등 비경제적인 것에 집중돼 있다. 핵을 포함한 대량파괴무기(WMD)와 운반·생산 수단을 폐기하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도 협상 초기부터 요구하진 않겠지만, 북한의 마지막 핵무기가 제거될 때까지 제재 해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북한 비핵화를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또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기대를 갖고 한국의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까지 나서서 각종 대북 협력 제안을 봇물처럼 쏟아내는 현상은 미국의 우려를 자아낼 만하다. 국제 제재의 틀을 벗어난 남북협력은 ‘비핵화 완료 때까지 돈은 못 준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에 배치되며, ‘한·미 동맹은 확고하다’는 문재인 정부의 입장과도 맞지 않는다. 비건 대표는 남북관계 발전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지만, 북한 핵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고려해서 과속 페달을 밟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문 의장이 방미 간담회에서 밝힌 입장이, 한·미 양국이 공유하고 우리 국민도 공감할 수 있는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문 의장은 핵 보유와 제재 해제 지원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북한에 인식시켜야 한다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 분명한 대북 지원 의사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줘 핵 포기 결단을 돕는 것이 한국의 역할이라고 했다. 결국, 핵무기와 경제발전 병행은 불가능함을 북한이 깨닫도록 만들고, 북의 핵 포기에 대비해 북한을 돕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준비를 갖추자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남북경협은 비전을 공유하고 가능성을 모색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도로·철도 연결 사업이 착수식에 머무른 게 대표적 사례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도 재개될 수 없다. 또, 남북이 추진키로 한 2032년 올림픽 공동 유치가 성사된다 하더라도 북핵 폐기가 완료되지 않으면 서울이 단독 개최한다는 단서 조항을 유치 의향서에 명시해야 한다.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를 열망하지만, 북핵이 장애물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파하는 일이야말로 북핵 폐기 완료 때까지 한국이 고수해야 할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이다.
* 본 글은 2월 14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