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점령지가 잇달아 탈환당하자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점령지역 합병 투표를 강행하는 한편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다시 핵무기 위협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는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에도 “러시아를 방해하려고 시도하는 측들은 역사상 보지 못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핵 사용을 암시했다. 푸틴의 핵 위협은 1950년대 핵 시대 개막에 이어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출범을 거치면서 유지돼 왔던 두 가지 불문율을 동시에 깬 것이다. 그는 핵무기 보유 국가가 비핵 국가를 침공하고 핵 협박을 한 최초의 사례를 만들었고, 핵무기는 보유하고 있을 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핵보유국 간의 묵계 역시 무시했다.
지금 푸틴이 깔아놓은 핵 위협의 레드카펫을 충실히 밟아나가고 있는 체제가 한반도 이북에 존재하고 있다. 지난 4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 기념 연설을 통해 자신들의 ‘근본 이익’이 침탈당할 경우 억제 목적을 넘어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며 핵무기 선제 사용 가능성을 공언했다. 그의 발언은 지난달 8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공표된 ‘핵무력정책’ 법안에 의해 제도화됐다. 북한의 핵 위협이 현실적 문제가 되면서 우리 국내에서는 미국 전술핵 재배치 등 다양한 대안에 대한 열린 접근을 통해 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간과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푸틴의 핵버튼과 김정은의 ‘핵무력정책’ 위협은 쌍생아(雙生兒)와 같다. 양자 모두 국제 비확산 체제를 훼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재래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정보화 시대에 있어 국가의 외교력은 세계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의 안보와 생존을 위해 북한 핵무기에 대한 대응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세계가 이해해야 미국도 더 확실한 보장 조치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론 조성을 위해서는 북한의 핵 위협을 강조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핵 협박 전체에 대한 단호한 비판과 배격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푸틴이 핵버튼을 만지작거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후 세계는 푸틴을 향해 그 재앙적 결과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9월 CBS와의 인터뷰에서 ‘절대(Don’t, don’t, don’t)’라는 용어를 반복해 사용하면서 푸틴의 핵무기 사용을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나토 역시 푸틴의 핵무기 사용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은 푸틴의 핵무기 위협에 대해서는 직접 비난하지 않았지만, 점령지 병합 투표에 대해 자체적인 대러 제재로 응수했다. 그러나 우리는 푸틴의 핵 협박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당하고 있는 핵 위협에 대해 공감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심각한 안보 상황을 국제 사회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제부터라도 푸틴의 핵버튼에 대해 우리의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북한으로부터의 핵 협박에 대한 우리의 절박성을 체감할 수 있다. 북한의 핵 개발이 국제 비확산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점을 부각해야 북한 핵 문제를 보는 세계와 우리의 눈높이가 일치할 수 있다. 푸틴의 핵버튼을 세계가 저지할 수 있다면 이는 북한에도 준엄한 메시지로 다가갈 것이다. 북한에 비해 훨씬 뛰어난 핵 능력을 지닌 러시아가 핵무기를 실제 사용하지 못하고 저지됐다면 북한 역시 장차 똑같은 벽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푸틴의 핵버튼과 김정은의 핵무력정책을 똑같이 다뤄야 ‘글로벌 중추국가’로서의 정책이 나온다.
* 본 글은 10월 24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