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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째 집권 중인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21세기 술탄이라 불린다. 올해 6월 재선에 성공해 2033년까지 장기 집권의 기반도 마련했다. 오스만제국의 최고 지도자 술탄이 누렸을 절대권력을 에르도안의 막강 파워에 비유하는 이유다.

10년 전만 해도 에르도안 당시 총리는 터키를 무슬림 민주주의 모델로 올려놓은 주인공이었다.

2001년 이스탄불 시장 출신 에르도안은 온건 이슬람주의자들을 모아 정의발전당(AKP)을 세웠다. AKP는 반서구주의 대신 시장화·민영화·세계화를 내세웠고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도 적극 지지했다. 시장과 전통의 조화를 강조한 이들은 이슬람이 큰 정부와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닮았다고도 했다. 무능하고 부패한 기존 세속주의 정당들에 지친 유권자들은 AKP에 매료됐다. 오스만제국 해체 후 출범한 터키 공화국은 세속주의와 터키 민족주의를 국시로 삼았다. 공화국의 수호자 군부는 이슬람주의와 쿠르드 민족주의 세력을 국가 통합의 적으로 여겨 탄압했고 강경 세속주의 세력만이 정치권에서 살아남아 기득권을 남용했다. 그러나 개혁 이슬람 정당 AKP가 창당 이듬해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새로운 돌풍을 일으켰다. AKP 정부는 군부의 정치 개입 금지, 쿠르드 소수민족 보호, 사형제 폐지 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 직후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가 실시한 아랍권 여론 조사에서 에르도안은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꼽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터키 국회 연설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이끈 에르도안의 리더십을 치하했다. 에르도안은 중동의 여러 분쟁에서 중재자로 뛰었고 그의 총리 재임 10년간 1인당 국민소득은 3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10년 넘게 실권을 장악해 온 에르도안은 권위주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3선 연임으로 총리 출마길이 막히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당선됐다. 이후 친·인척 비리가 쏟아졌고 언론 탄압이 이어졌다. 2016년 에르도안을 겨냥한 쿠데타가 실패한 후엔 공안정치가 몰아쳤다. 2년간 국가비상사태가 이어지면서 공직자 15만명이 해임되고 군인·지식인·언론인 5만명이 체포됐다. 미국 NGO 프리덤하우스의 평가에 따르면 작년 터키의 민주주의지수는 전년보다 두 단계 떨어졌고 언론자유지수는 독재 수준과 같았다.

대외 정책도 변했다. 에르도안은 시리아 내전에서 쿠르드계 반군이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자 국내 쿠르드에 대한 탄압 수위를 높이며 친아사드 쪽으로 돌아섰다. 이후 아사드 세습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이란·러시아와 밀착했고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서구와는 멀어졌다. 터키의 민주주의 퇴행은 경제에도 타격을 줘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했다.

에르도안은 권력의 사유화 과정에서 옛 동지인 이슬람 은행과 기업, 종단 사람들을 숙청했고 당내 온건파도 축출했다. 그의 권위주의 행태를 비판해서다. 에르도안과 AKP의 부상에는 이슬람 자본가의 역할이 컸다. 이슬람을 기업윤리로 내세운 회사와 이슬람 은행의 경영진, 주주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수니 종단 회원이기도 하다. 세계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한 이슬람 자본가는 원리주의 정당 대신 AKP를 적극 밀었다.

자유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권력의 집중에서 오고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에르도안은 1인 지배를 강화하며 자신을 선택한 국민의 뜻이라 강변하고 있다. 선출 대통령의 합법적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대의 민주주의에서 선거와 다수결 원칙은 기본이다. 하지만 52.5% 득표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주장은 대의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오류다. 민주주의란 당선자를 뽑지 않은 나머지 의견을 듣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2016년 쿠데타 실패는 에르도안의 지지자뿐 아니라 그의 권위주의 통치에 반대했던 시민들까지 거리로 나와 탱크에 맞섰기에 가능했다. 군부의 정치 개입에 반대한 민주시민의 승리였다. 이들 시민은 에르도안의 술탄 등극 역시 반대하고 있다. 다만 독재 수준의 언론 탄압 때문에 눈에 크게 띄지 않을 뿐이다.

 

* 본 글은 10월 23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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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