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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혁명이 10주년을 향해 간다. 2010년 12월 튀니지 노점상 청년이 부패 공무원의 횡포에 항의해 분신했다. 아랍 장기 독재정권을 연달아 송두리째 흔든 민주화 혁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화에 실패했다. 이집트는 1년 만에 군부 권위주의로 회귀했고 시리아, 리비아, 예멘은 독재보다 더 나쁜 내전을 겪고 있다.

아랍의 독재는 프랑스 절대왕정, 제정 러시아, 이란 팔레비 왕조,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처럼 갑자기 몰락했다. 혁명은 전조 없이 일어났다. 독재자, 엘리트, 시민 모두 여론 통제와 숙청 공포로 인해 서로 속마음을 몰랐고 정권의 취약한 토대를 가늠조차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에 안심하던 독재자는 우연한 기회에 폭발한 시민의 분노를 접하고 당황했다. 냉혹한 독재자가 우물쭈물 유화책을 제시하자 측근 엘리트는 불안해했고 시민은 저항 수위를 높였다. 오랜 폭압 정치가 잠시 주춤한 순간 불안한 균형이 빠르게 흔들렸다.

아랍의 봄 배후라고 알려진 경제난, 청년실업, 부정부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산은 촉발 요소였지, 원인은 아니었다. 혁명의 근원지 튀니지는 북아프리카에서 부유한 편에 속했으나 혁명이 비켜 간 알제리에선 실업난과 민생고가 극심했다. 휴대폰, 인터넷, 페이스북 이용률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걸프 산유왕정에서 가장 높았다. 혁명이 일어난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예멘의 SNS 이용률 사이에는 일정한 패턴이 없었다.

극적으로 일어난 혁명은 민주주의 안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첫 민주선거에서 집권당이 된 이슬람 정치세력은 일방통행의 미숙한 국정 운영으로 유권자를 실망시켰고 구정권 군부나 무장정파에 정치 개입의 빌미를 줬다. 민주화에 유일하게 성공한 튀니지의 경우, 군부가 직업정신을 지켰고 이슬람 정당이 대타협을 결단했기에 가능했다. 과거 독재자가 쿠데타 공포 때문에 군부를 대폭 축소했고 이권에서 배제된 군부는 국방의무에만 전념해왔다. 이어 이슬람 정당과 세속주의 정당은 고통스러운 협상 끝에 비무슬림 보호를 명시하는 헌법 개정에 합의했다.

중동에선 민주화의 대대적 실패도 모자라 기존 민주주의마저 후퇴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로 분류되던 터키와 이란에서 역내 혼란이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일인체제 강화를 위해 터키 민족주의와 오스만제국 과거를 소환했다. 이란 보수지배연합은 시아 이슬람 수출에 대한 국내 저항을 무마하고자 이란 민족주의와 페르시아제국 영광을 섞어 포퓰리즘 선동에 나섰다. 두 나라는 주변국 내전에 개입해 패권주의를 가동했고 자국 내 정부 비판 목소리를 반민족주의로 매도했다.

이때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아랍의 봄 혁명을 억압했던 걸프 산유왕정이 구시대적 민족주의를 탈피해 새로운 외교 노선을 선언하고 나섰다. 10년 전 산유왕정은 복지와 순응의 맞교환으로 민주화 요구를 회유했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그런 아랍에미리트가 지난달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아랍국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을 무조건 지지해왔다. 같은 민족이고 이스라엘에 비해 약자라는 감성적 이유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시민사회 탄압, 전 세계발 원조금 횡령·비리에 대한 비판은 금기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라마단 기간 착한 유대인 캐릭터의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들 산유왕정은 최근 첨단산업 육성, 여성인재 등용, 보조금 폐지로 탈석유 개혁을 실시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엔 권위주의 감시체제를 활용해 공격적 방역을 실시하더니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다. 서남아 출신 이주 노동자에게도 무료 검사를 행하고 의료용품을 나눠줬다. 산유왕정의 국내 변화와 신외교 노선은 중동 대내외 오랜 관성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 본 글은 9월 8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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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