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인태 지역, 특히 동남아에 초점을 둔 지역 질서와 강대국 영향력 균형은 중요한 변곡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1 미중이 영향력 경쟁을 벌이던 동남아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가진 확신의 약화, 그에 따른 미국의 상대적 영향력 혹은 리더십 약화가 미중 사이 균형을 붕괴시킬 가능성이 있다. 특히 2024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Donald Trump) 행정부가 다시 등장한다면 이런 변화는 속도를 더할 것이다. 민주당이 재집권하더라도 바이든(Joe Biden) 행정부가 보여준 동남아에 대한 약한 관여를 반복한다면 속도만 다를 뿐 결과는 유사할 것이다.
동남아 지역은 미중 경쟁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다. 동남아가 중국의 영향권이 된다면 미국은 동남아에서 가진 경제적 이해뿐만 아니라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대를 상실한다. 중국은 미국에 대응해 자신의 앞마당인 동남아 국가에서 지지와 영향력을 확보하고 미국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남아는 한국에게도 중요하다. 한국에게 동남아는 경제적으로 무역 2위, 투자 2위의 협력 대상이자 중요한 해외건설 시장인 동시에 우리 개발협력기금이 집중되는 지역이다. 미중 경쟁에 놓인 한국 입장에서 대 강대국 레버리지 강화, 전략적 다변화는 필수이며 이를 위해 아세안과 같은 지역기구, 동남아 국가들과 전략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남아 지역을 관통한 전략적 환경은 크게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고 그 사이 동남아는 두 번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미소 냉전 시기 동남아 국가들은 양 진영 안에 나뉘어 포함되었다. 특정 냉전 블록에 포함된다는 것은 강대국으로부터 안보와 경제적 지원의 패키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2 미소 힘의 균형은 이처럼 일정한 이익과 함께 지역 국가들에게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제공했다. 냉전이 끝나면서 동남아 지역에서 강대국의 영향력, 강대국 영향력 균형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힘의 공백이 찾아왔다. 이런 힘의 공백 속에 동남아에는 아세안 주도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 아세안+3 등 지역 다자협력이 생겨났다.
1990년대 초부터 대략 2010년까지 동남아에서 강대국 영향력의 부재는 중국의 급속한 성장,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온 미국의 ‘피벗(Pivot to Asia)’ 정책과 함께 막을 내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미국은 급히 피벗 정책을 발표하며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로 복귀했다.3 냉전기 미소 세력균형이 붕괴된 이후 20년 동안 힘의 공백이 지속되다 미중 경쟁, 미국과 중국 사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강대국 경쟁이 다시 한번 동남아 질서의 뼈대를 형성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되었던 동남아 지역의 영향력 균형은 약 15년 만에 다시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미중 경쟁의 향후 진로와 상관없이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 팽팽했던 영향력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 동남아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전략적 확신이 빠르게 약화되고 2024년 미국 대선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재등장 가능성이 확산되면서 중국의 승리가 아닌 미국의 약화, 미국의 절대적 국력 약화가 아닌 미국의 동남아 지역에 대한 관여의 약화로 인해 적어도 동남아 지역에서 강대국 간 영향력 균형이 중국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미 바이든 행정부의 동남아 관여는 미국에 대한 확신을 감소시켰다. 동남아를 방치했던 트럼프가 다시 돌아온다면 동남아에 대한 방치와 무시가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미국 리더십에 대한 동남아 국가의 확신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이런 전망이 그대로 현실화된다면 중국은 적어도 동남아 지역에서 어부지리로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도 있다. 마치 미국이 냉전 직후 동남아를 떠나 오바마(Barack Obama) 행정부의 피벗 정책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20년의 공백 기간 동안 빠르게 성장한 중국이 동남아에서 세력권을 넓혔던 국면은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 당시와 지금의 차이는 탈냉전 후 20년간 중국이 추격자였다면, 세력균형이 붕괴된 동남아에서 중국이 의심할 여지없는 맹주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큰 틀의 전략적 환경 변화는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 영향력 균형의 변화는 한국에게 한미동맹, 한반도 문제를 넘어선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리스크 상황은 한국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붕괴되는 강대국의 영향력 균형의 유지를 위해 지역 중견국 간 협력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공간을 제공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동남아 국가와 전략적 협력 및 연대의 기회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기회는 모두 한국이 얼마나 전략적 시각을 넓게, 그리고 길게 가지고 긴 호흡의 지역 전략을 고민하는가에 달려 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 동남아 지역에서 미중 균형의 약화
현재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은 동남아 지역에서 비대칭적이다. 특히 지리적 비대칭성이 크다. 중국은 동남아 지역에 인접한 국가인 반면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중국이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동남아 지역에 직접 미치는 반면 미국의 동남아 관여에서는 늘 동남아와 미국 사이 먼 거리가 문제가 된다(tyranny of distance).4 중국의 힘이 크게 성장하고 미국과 경쟁하기 시작한 이후 동남아는 중국의 부상을 경제적 기회로 여기면서도 잠재적 안보 위협으로 보았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전략적, 경제적 관여가 필요했고 미국의 동남아 지역 관여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중국의 힘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미국의 군사적 관여, 중국의 경제력에 너무 의존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으로 미국의 경제적 관여를 필요로 했다.
[그림 1] 미중 사이 아세안의 선택은?5
출처: 2020~2024년 「The State of Southeast Asia」 조사 보고서 종합
2024년 초 발표된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ISEAS-Yusof Ishak Institute)의 여론 조사 결과는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이 이루고 있던 동남아 지역에서 힘의 균형에 중요한 균열을 예고한다. [그림 1]은 2020년부터 2024년까지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에 앞섰던 미국은 2024년 설문조사 결과에서 중국에 아주 근소한 차로 뒤진다. 2023년까지만 해도 넉넉한 차이로 앞서 나갔던 미국이 2024년에 갑자기 근소한 차이지만 중국에 뒤지게 된 상황은 역내 강대국 균형의 붕괴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중국과 비교해 지리적 비대칭성에 의해 반감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2024년 이전까지 미국이 앞서 있던 수치는 사실상 미국과 중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지리적 이원성을 감안하면 2024년 결과는 실질적으로 미국이 중국에 크게 뒤지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표 1] 미국의 경제, 정치 및 전략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동남아의 반응
출처: 2020~2024년 「The State of Southeast Asia」 조사 보고서 종합
더 나아가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정치 및 전략적 영향력을 평가하는 설문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감지된다.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증가에 대한 동남아의 우려 반응은 2020년 29.8%에서 2021년 25%, 2021년 31.9%, 2022년 34.3%, 2024년 48%로 증가일로에 있다. 반면 미국의 경제력 확대에 대한 긍정 평가는 2020년 70.2%에서 2024년 52%까지 떨어졌다. 미국의 정치적, 전략적 관여에 대한 우려도 2020년 47.3%에서 2024년 59%로 증가한 반면 정치적, 전략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긍정 평가는 2020년 52.7%에서 2024년 41.0%까지 떨어졌다.
[표 2] 미국과 중국에 대한 동남아 국가의 전략적 신뢰
출처: 2024년 「The State of Southeast Asia」 66-67쪽
[표 2]는 2023년과 2024년 사이 동남아 국가의 전략적 파트너로서, 그리고 지역 안보 제공자로서의 미국과 중국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이 표에서 미국과 중국을 비교하면 여전히 동남아는 중국보다는 미국에 대해 높은 전략적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불신’의 비율이 ‘신뢰’의 비율을 두 배 이상 넘어서고 있다. 반면 미국은 여전히 근소한 차이지만 신뢰가 더 높다. 그러나 이 표를 세로로 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미국에 대한 신뢰는 2023년 54.2%에서 2024년 42.4%로 크게 떨어졌다. 2024년에는 불신과 신뢰가 불과 5% 남짓한 차이다. 동남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관여에 대한 평가에서도 미국의 관여가 줄어들었다(‘매우 감소’, ‘감소’)가 2023년에는 25.7%였으나, 2024년 이 비율은 38.2%로 늘어났다. 당연한 결과로 관여가 증가했다(‘증가’, ‘크게 증가’)는 응답은 2023년 39.4%에서 2024년 25.2%로 크게 줄어들었다.6
이런 결과들이 말해주는 바는 몇 가지로 정리된다. 여전히 미국이 중국에 비해 동남아에서 전반적으로 앞서 있으나 그 차이는 매우 근소한 정도로 줄어들었다. 동남아 국가의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2021년에 정점을 찍고 2024년까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다시 말해 바이든 행정부 첫 해를 기대하며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정점을 찍고 바이든 행정부 내내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이런 미국의 하락 속에 중국이 그 반대급부를 모두 흡수한 것은 아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동남아 국가의 불신 역시 크게 증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종합해보면 한 가지 논점은 확실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 동남아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주는 한계를 감안할 때 미국은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과 경쟁에서 어느 정도 앞서 있어야만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2024년 여론조사 숫자들을 놓고 보면 미국과 중국은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거리의 문제를 감안할 때 실질적으로 중국이 미국에 앞서 있다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2024년 미국 대선 이후 동남아에서 강대국 영향력 균형의 향배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몇 달 남지 않았다. 유례없이 논란이 많은 선거전 속에 현재 두 명의 후보가 대선을 치를지 마저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민주당의 후보와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끝까지 대선 경쟁을 펼친다고 가정하면 2025년 새로 취임하는 미국 대통령은 이 둘 중 하나가 된다.7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이 중국과 힘의 균형을 맞출 것이라 기대하는 동남아 국가 입장에서 어떤 후보도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이미 동남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관여는 상당히 약화되었으며 이런 상태는 미국의 리더십 약화, 그리고 역내에서 중국에 맞서 세력균형을 맞추는 데 미국의 실패를 예고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뒤를 이어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고 새로 집권하는 민주당이 바이든의 대 동남아 정책 유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면 동남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천천히 그렇지만 꾸준히 약화될 것이다.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동남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급격히, 그리고 확실히 막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동남아 국가 입장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암흑기를 거치고 나온 민주당 바이든 행정부는 큰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바이든 취임을 앞둔 2020년 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미국의 대 동남아 관여가 증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동남아 사람들은 68.9%가 긍정적인 답을 했다.8 그 이전 트럼프 행정부 마지막 해 같은 질문에 대해 9.9%만 긍정적인 대답을 한 것에 비해 무려 60% 포인트 가까운 상승이었다. 동남아에서는 동맹의 복원,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등을 외치며 등장한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의 피벗 정책을 이은 피벗 2.0을 실시할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코로나19 기간 동안 2021년 온라인으로 진행한 미-아세안 정상회의 참석, 2022년에는 첫 미-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최, 2022년에는 미-아세안 포괄적전략동반자 관계 형성 등 몇 가지 노력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최고위급의 상징적인 관여 외에 실질적인 관여는 실망스러웠다. 바이든 행정부가 2021년 발표한 미국의 인태전략에는 베트남, 싱가포르만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로 언급되고 나머지 국가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9 바이든 행정부 내내 인태 지역에 대한 전략적 관여의 제도로 관심을 받았던 쿼드(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QUAD)와 오커스(AUKUS), 그리고 한미일 삼각 연대에 동남아 국가 혹은 아세안의 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힘있는 전통적인 미국의 동맹국만 강조되었다. 오히려 AUKUS가 호주에 제공하겠다는 핵추진 잠수함은 동남아 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2023년부터는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가진 필리핀과 미국, 일본의 전략적 협력이 강화되면서 오히려 아세안 내부의 불협화음만 더 부추겼다.10 QUAD, AUKUS와 같은 제도가 강조되면서 아세안 주도의 ARF,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ASEAN Defence Ministers’ Meeting Plus, ADMM+) 등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경제적으로도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대중 견제 노선을 강화했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IPEF)로 중국을 견제하는 경제질서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무역협정이 아닌 IPEF는 동남아 국가들이 바라는 제도적 안정성과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데 실패했다.11 오히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 공급망 경쟁을 위해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으로 대표되는 리쇼어링(reshoring),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을 강조했다. 이런 정책은 미국의 보호주의 강화라는 결과로 나타났다.12 미국 국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파격적 금리 인상은 바트, 링깃, 페소 등 일부 동남아 국가의 통화 불안, 동남아 지역으로부터 자본 유출, 동남아 국가의 외채 상환 부담 증가, 자본재 수입 비용 증가로 귀결되었다.13
바이든 시기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는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냉전 이후로 지속적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미국의 대 동남아 관여의 불확실성이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이다. 냉전 시기 미국의 필요에 의한 관여, 탈냉전기 20여 년간 탈관여,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 시기 10여 년에 걸친 피벗을 통한 재관여,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바이든 행정부로 이어지는 탈관여의 반복은 동남아 국가의 미국에 대한 확신을 장기적으로 약화시켰다. 두 번째로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는 물론이고 동맹을 강조했던 바이든 행정부까지 자국의 이익을 미국의 리더십보다 우선시했다. 중국과 경쟁,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은 지역 중소국가들이 중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항해 미국이 균형을 맞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불충분했다. 2024년 말 바이든의 동남아 정책을 계승한 민주당 정부의 출현은 미국 영향력의 점진적 약화를 예견한다.
반면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동남아 지역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은 쉽게 예견할 수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동남아 지역이 갑자기 이제 와서 큰 관심을 받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 트럼프 1기 아시아 정책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도 동맹에 대한 경시로 요약된다. 아시아의 동맹국과 파트너 국가에 대한 경시는 더욱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아세안과 동남아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14 2017년 처음으로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에 참여하기 위해 필리핀에 온 트럼프 대통령은 정작 EAS 직전에 필리핀을 떠났다. 2018년에는 마이크 펜스(Mike Pence) 부통령이, 2019년에는 로버트 오브라이언(Robert O’Brien)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했다. 중국과 경제전쟁으로 일부 동남아 국가가 반사 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동남아 전체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경제전쟁은 득보다 실이 훨씬 큰 전략적, 경제적 리스크다. 트럼프의 이런 동남아 경시가 2기에 들어 바뀔 만한 유인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미 미국은 물론이고 동남아의 전문가들도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섰을 때 트럼프 행정부 1기 정책이 그대로 반복되거나 아니면 동남아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15
동남아 지역에서 트럼프 1기 동안 미국의 리더십에 가졌던 물음표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크게 증폭되었고, 만약 트럼프가 다시 집권한다면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의 영향력과 리더십에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동남아 지역에 꾸준한 관여를 보여주지 못했다. 미국이 동남아 지역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인가는 동남아 국가 입장에서 가장 큰 전략적 리스크 중 하나다. 최근 미국은 꾸준한 관여 대신 중국과 전략 경쟁에서 동남아를 도구로 이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미중 경쟁에 따른 경제적 불안정성, 남중국해 등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발적인 군사충돌은 동남아 국가들에게는 모두 직접적 위험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리더십 붕괴는 동남아 지역에서 불안했던 중국과 미국 사이 영향력의 균형을 결정적으로 중국 편으로 기울게 할 수도 있다. 중국이 동남아에서 잘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효과적이지 못해 동남아 지역을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중국이 어부지리로 미국을 따돌릴 수도 있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
한국과 군사동맹 관계인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는 중요한 관심사다. 바이든이 아니더라도 민주당 정부의 재등장은 한미 관계에 어느 정도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의 재등장은 1기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서 보였던 동맹 국가에 대한 압박, 대외정책과 전략 문제를 거래로 보는(transactional) 태도의 반복 혹은 강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는 모두 한미동맹에 대한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한미동맹, 미국과의 관계는 또한 필연적으로 남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에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그 결과가 한미동맹, 한반도 문제에 주는 함의를 파악하고 그 대응방안을 고민하는 데 많은 자원이 투입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전략적 고민이 그 지점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미국의 대선 결과에 따라 동남아 지역, 조금 더 넓게 보자면 인태 지역의 전략적 상황, 특히 인태 지역의 아세안 등 개발도상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약화, 미국의 지역적 리더십의 약화 역시 한국에게 큰 리스크가 될 수 있다. 동남아 지역을 비롯한 지역 전체에서 미국의 관여 약화에 따라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된다면 이런 변화의 영향은 동남아에 국한되지는 않고 인태 지역 전반에서 질서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변화에 따른 지역 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약화, 중국의 공세적 행동 강화는 지역 중견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한국의 운신의 폭을 크게 축소시킬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향력 강화라는 지정학적인 변동은 한국이 동남아 지역에서 가졌던 경제적, 전략적 이해관계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리스크 속에 한국은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 미국의 지역 내 영향력 약화에 따른 강대국 간 영향력 균형의 붕괴 가능성은 리스크지만, 그 속에서 무너진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한 지역 중견국의 역할이 오히려 강조될 수도 있다. 인태 지역에서 혹은 더 좁게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에 대응해 지역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역내 중견국 간 협력과 연대가 그 어느 때 보다 강조될 수도 있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 1기에 미국의 자국중심주의와 고립주의 대외정책으로 인해 글로벌 차원에서 중견국이 협력해서 미국이 비운 자리를 대체해 자유주의 질서를 지탱해야 한다는 논의가 많았다.16 다시 한번 지역 중견국 혹은 중견국 연대의 이런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이 인태 전략을 앞세워 호주, 일본, 동남아의 중견국인 인도네시아, 전략적으로 떠오르는 베트남, 싱가포르 등과 향후 지역 질서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중국에 대해 어떻게 균형을 유지해야 할지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는 하나의 대체 전략 혹은 보완 전략으로 생각했던 지역 중견국 간 전략적 연대가 중심적인 전략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인태 지역에서 활발해진 소다자 협력을 통해 지역 중견국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 아젠다를 형성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국이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추진했던 KIA(Korea-Indonesia-Australia) 협력을 부활시켜 전략적 논의의 장으로 다시 활용할 수도 있다.17 또는 동남아-오세아니아-동북아(Southeast Asia-Oceania-Northeast Asia, SONA) 전략대화 같은 것을 제안할 수도 있다. 가장 핵심은 미국 대선에 따른 전략 환경 변화, 지역 질서 문제, 그리고 지역 강대국 간 균형의 문제를 사전에 고민해 논의할 아젠다를 설정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협력 대상 국가에 제안하는 일이다.
두 번째로는 더 좁은 범위에서 미 대선 이후 지역 상황을 한국과 아세안 사이 전략적 협력 강화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이미 동남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대 동남아 관여의 한계, 미국의 리더십 약화, 그리고 지역 세력균형의 불안정성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중국 양 강대국 외에 제3의 세력과 연대하려는 목소리도 크다.18 한국은 지역의 전략과 안보 문제에 있어 오랫동안 한반도 안에 안주해 왔다. 그러나 커진 국력을 감안할 때 한국이 더 이상 좁은 외교안보 아젠다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밖에서 한국의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마침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인 한-아세안 연대구상(Korea-ASEAN Solidarity Initiative, KASI)도 동남아 국가와 전략적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동남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관여 약화는 한국과 아세안이 기존 경제협력, 사회문화 협력을 넘어 지역의 전략적 상황, 미국의 리더십 상실, 지역에서 강대국 균형 문제를 더 심도 있고 실질적으로 논의하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은 이런 리스크로 가장한 기회를 살려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미국 혹은 중국이라는 강대국만 바라봤던 시각을 교정해 한국만의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중견국 협력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이 지역에서 강대국 영향력 균형 변화에 대해서 상황 판단, 아젠다 설정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아세안에 대화와 실질협력을 제안하는 식으로 리더십을 보인다면 한-아세안 관계 심화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한국의 전략적 무게감까지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이 글에서는 흔히 쓰는 미중 사이 세력균형,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 대신 영향력 균형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세력균형이나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은 군사적인 부분을 포함해 미중 사이 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반면 영향력 균형은 미국과 중국이 동남아 지역 국가들 사이에 얼마나 지지를 받고, 얼마나 리더십을 발휘하고, 지역 국가들이 이 양 강대국에 대해서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는지를 의미한다.
- 2. Toby Carroll. 2020. “The Political Economy of Southeast Asia’s Development from Independence to Hyperglobalisation.” in Toby Carroll, Shahar Hameiri and Lee Jones eds. The Political Economy of Southeast Asia: Politics and Uneven Development under Hyperglobalisation (Cham, Switzerland: Palgrave Macmillan). p. 45-51.
- 3. Kurt M. Campbell. 2016. The Pivot: The Future of American Statecraft in Asia (New York: Twelve Books). p. 261-264.
- 4. David Shambaugh. 2021. Where Great Powers Meet: America and China in Southeast Asi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 101-103.
- 5. 원 설문조사의 질문은 “If ASEAN were forced to align itself with one of the strategic rivals, which should it choose?”.
- 6. Seah, S. et al., 2024. The State of Southeast Asia: 2024 Survey Report (Singapore: ISEAS-Yusof Ishak Institute). p. 53.
- 7. 이 글이 발표되기 직전인 2024년 7월 22일(한국시간) 바이든 대통령은 더 이상 후보직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며,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최종적으로 누가 될지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아직 미지수다.
- 8. 2020년과 2021년 「State of Southeast Asia」 조사 보고서를 종합.
- 9. White House. 2022. “Indo-Pacific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 February (https://www.whitehouse.gov/wp-content/uploads/2022/02/U.S.-Indo-Pacific-Strategy.pdf).
- 10. Premesha Saha. 2023. “Great power competition raises concerns within the ASEAN.” ORF. August 16 (https://www.orfonline.org/expert-speak/great-power-competition-raises-concerns-within-the-asean); Richard Heydarian. 2023. “Marcos’ courting of U.S. support is unsettling his ASEAN neighbors.” Nikkei Asia. December 1.
- 11. Emily Benson and Aidan Arasasingham. 2022. “The IPEF gains momentum but lacks market access.” East Asia Forum. June 30.
- 12. Jayant Menon. 2024. “The export-led model is evolving, not dying.” East Asia Forum. March 23.
- 13. Dylan Loh. 2022. “ASEAN banks face sharper debt risks as interest rates rise.” Nikkei Asia. November 11; Jack Stone Truitt. 2023. “India and ASEAN growth to slow in 2023 as interest rates rise: IMF.” Nikkei Asia. January 31.
- 14. Ian Storey and Malcolm Cook. 2020. “The Trump Administration and Southeast Asia: Half-time or Game Over?” ISEAS Perspectives 112. October 7.
- 15. Joshua Kurlantzick. 2024. “What a second Trump term could mean for Southeast Asia.” The Japan Times. May 8; Neo Chai Chin. 2024. “Analysis: As chances of a Trump 2.0 presidency shoot up, how ready are Southeast Asian states?” Channel News Asia. July 18; Hunter Marston. 2024. “Southeast Asia Wants U.S.-China Conflict to Stay Lukewarm.” Foreign Policy. July 3; Ford Hart. 2024. “Southeast Asia and Trump 2.0(?): Agency Amid Anxiety.” Fulcrum. June 5.
- 16. Roland Paris. 2019. “Can Middle Powers Save the Liberal World Order?” Chatham House Briefing. June18; Umut Aydin. 2021. “Emerging middle powers and the liberal international order.” International Affairs 97:5.
- 17. Jonas Parello-Plesner. 2009. “KIA – Asia’s middle powers on the rise?” East Asia Forum. August 10.
- 18. Benjamin Ho. 2024. “Bound to Lead: US-China Relations and the Future of Global Leadership.” IDSS Paper IP24046. May 1. 뿐만 아니라 「State of Southeast Asia」 설문조사에서 미중 경쟁으로 인한 전략적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과 중국 중에서 필연적으로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제3세력과 연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훨씬 크다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