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4년 미국 대선을 통해 본 미국 정치 현실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트럼프 등장 이후의 미국 정치 완결판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2015년 공화당 후보 경선에 뛰어든 시점부터 이번 대통령 선거까지 거의 10년 동안 트럼프는 미국 정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 번의 임기 후 자발적으로 사퇴한 초대 워싱턴 대통령 이래 미국 대통령들은 짧으면 4년 혹은 길어야 8년의 현실 정치에 머물러 왔다. 1884년 당선되었다가 4년 후 재선에 실패한 뒤 4년 후 다시 당선된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이 22대와 24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물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 1932년에 처음 당선된 후 내리 4번 대통령에 선출된 적이 있지만 역시 1951년에 수정 헌법 22조가 통과되기 이전 사례였다. 결국 헌법 수정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제한이 적용된 미국 정치에서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 그리고 대선 후보로 10년간 영향력을 발휘해 온 인물은 트럼프가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의 지난 10년간 존재감은 이라크 전쟁 실패 및 금융 위기 이후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기에 반공주의를 기초로 이념 대결에 몰두했던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의 단극체제 운영 방안을 체계적으로 마련하지 못했다. 관여(engagement) 정책을 확대(enlargement) 방식으로 전환한 자신감의 표출 외에 구체적인 대전략(grand strategy)을 짜지 않은 셈이다. 2001년 발생한 9/11 위기 이후에 전통적인 군사적 접근법을 중동의 민주화라는 가치 이슈와 연결하려던 부시 행정부의 시도가 실패하고 연이어 발생한 대규모 금융 위기로 인해 미국 내 여론은 제2의 베트남 증후군을 겪게 된다. 다른 나라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국내 제조업 침체에 따른 불안감이 팽배하던 시점에 갑자기 등장한 아웃사이더가 트럼프였다. 기존 정치권의 어법이나 사고방식을 전면 부정하는 연예인 스타일의 트럼프가 “장벽을 쌓는다”거나 중국을 ‘도둑’으로 규정할 때 겉으로 잘 나가던 미국의 그늘진 곳에서 소외받던 유권자들이 호응하였다. 이들은 오직 기업과 금융 편만 들었던 공화당을 “컨트리 클럽(country club)” 정당이라 조롱하였다. 환경 위기에만 주력하고 노동조합을 홀대하기 시작한 민주당이 급기야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하자 심한 배신감을 느낀 집단이기도 했다. 미국 사회의 기본 가치들을 부정하고 인종 비하 발언을 거듭하는 트럼프의 성공은 일종의 미국 민주주의 실패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이라크 전쟁 실패는 미국 우선주의 혹은 비개입주의를 낳았고 금융 위기는 백인 노동자 계층의 새로운 결집을 초래했다. 트럼프가 만들어 낸 미국 정치 변화가 주로 미국의 대외 정책 분야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롤러코스터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여러 차례 경험했던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의 특징들 중 향후에도 파장이 클 사안들은 무엇일까? 우선 지난 7월 1일에 미국 연방 대법원이 결정한 대통령의 면책 특권 사항이 중요하다(Trump vs. United States).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에게 적용될 이번 연방 대법원의 판단은 대통령이 가진 면책 특권을 매우 광범위하게 정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스미스(Jack Smith) 특별 검사가 2021년 1월 6일 폭동 사태의 배후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목하여 기소한 데 대해 트럼프 진영의 반박 이론은 대통령의 경우 먼저 탄핵을 당하지 않고서는 기소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연방 대법원은 6대 3 결정으로 대통령의 면책 특권을 전혀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특검 측 주장과 탄핵을 방패막이로 삼은 트럼프의 반론을 모두 기각하였다. 형식 논리상으로는 대통령의 공식 행위(official acts)와 사적 행위(private acts)를 구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재임 중 행동은 일단 공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 핵심이다. 결국 대통령의 면책 특권을 상당히 넓게 해석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트럼프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되었다. 이번 연방 대법원의 결정으로 인해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는 트럼프가 낙선한 이후에도 거의 물 건너간 상황이 되었고 이후 미국 대통령들에게도 매우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후보 경선이 종료된 이후에도 대선 후보가 교체될 수 있다는 새로운 전례가 만들어진 선거라는 점이 특이하다. 2022년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 참사 이후 지지율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던 바이든 입장에서는 트럼프가 뉴욕 재판에 출석하느라 유권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이 불안 요소였다. 높은 물가에다 허술한 국경 수비로 리더십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바이든 입장에서는 유례없는 6월 말 대선 후보 TV 토론회를 통해 트럼프의 본색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그 토론회의 역풍으로 인해 지지율 하락 정도가 아닌 궁극적인 후보 사퇴 상황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다. 우선 2020년 대선에서도 두 명의 여성 상원 의원 후보들을 공개 지지함으로써 바이든 행정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뉴욕 타임스가 후보 사퇴라는 초강수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바이든에 대한 실망감이 낮은 투표율로 이어져 자신들의 재선이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민주당 의원들 역시 바이든 사퇴 압박에 앞장섰다. 펠로시(Nancy Pelosi) 전 하원 의장 등 일부가 소위 미니 프라이머리를 개최하자고 나섰지만 당내 분열에 대한 우려 덕분에 해리스 부통령이 비교적 수월하게 후보 교체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로써 경선을 통과한 대선 후보가 선거 전에 교체되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해리스 후보의 경우 처음 등장할 때 일으킨 신선한 바람을 9월 10일 대선 후보 TV 토론회까지 이어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한 달 반 동안의 선거 전략에 혼선이 온 것으로 평가된다. “New Way Forward(새로운 전진)”라는 캠페인 슬로건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다시 트럼프 비판에 몰두하는 양극화 전략으로 회귀한 것인데 선거인단 제도와 고정된 경합주 현실에 발목 잡힌 민주당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2024년 미국 대선을 둘러싼 미국 외교 정책 현황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외형상으로는 트럼프의 화려한 복귀냐, 트럼프의 완벽한 퇴출이냐를 결정하는 분수령과 같은 선거였다. 그런데 막상 외교 정책과 관련된 정당 재편성 차원의 선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올드리치 등의 연구(Aldrich et al 2014)에 따르면, 미국 대선을 통한 외교 정책의 대변환이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1 하나는 당면한 대외 문제를 둘러싼 두 정당 후보 간의 분명한 입장 차이가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국제 이슈가 미국 유권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여야 한다는 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모두 그 의미와 여파를 일반 미국 유권자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미국 지상군이 투입되지 않은 국제 분쟁이라는 점에서 미국 국민들이 분명한 선호나 이해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중국과의 경쟁 역시 어느 후보도 더 이상 중국과의 관여 정책을 입에 담지조차 않을 정도로 미국의 입장이 확고해졌다. 이전 미국 대선 과정에서 자주 보이던 “중국에 유약하다(soft on China)”는 비방전이 거의 사라진 배경이기도 하다. 누가 더 강경한가 경쟁만이 남았는데 유권자 입장에서 명확히 식별하기 쉽지 않다. 만일 4년 임기의 대부분을 떠맡았던 바이든이 후보로 나서서 동맹 중심의 대외 정책을 가지고 트럼프의 동맹 폄하 발언과 대립각을 이루었다면 의미가 달랐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교 정책 경험이 전무한 해리스 부통령이 갑자기 동맹을 강조하는 후보로 전면에 나서기는 어설픈 점이 있었다. 바이든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인해 동맹 중심의 대외 정책에 대한 신임 여부를 물을 기회도 함께 사라진 셈이다.
보다 중요한 이번 미국 대선의 맥락은 미국 외교 정책 방향이나 내용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부재했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으로 경제 문제가 크게 중요하지 않거나 미국이 직접 관여하는 대외 전쟁이 진행 중인 경우 외교 이슈가 중요해질 수 있는 선거가 미국 대선이다. 그런데 2024년 미국 대선의 경우 일찍부터 정해져 있던 구도는 트럼프가 추진한 국정 심판론 대 바이든/해리스가 밀어붙였던 양극화 논리 간 대결이었다. 경합주 7개가 대선 기간 내내 변화 없이 유지된 것처럼 이번 미국 대선 구도 역시 그대로 지속되었다. 물가 상승률은 9퍼센트에서 올해 2.5퍼센트까지 하락했지만 누적 물가(cumulative price level)는 팬데믹 위기 이후 거의 가라앉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트럼프는 인플레이션을 최대 이슈로 줄곧 공격하였다. 4년 전보다 살림살이가 나빠졌다고 인식하는 유권자들이 1984년 이후 가장 많았던 해이기도 하다. 또한 국가 위기관리 실패로 쉽게 연결되는 국경 수비 허술과 불법 이민자 폭등은 전반적인 사회 심리 불안을 조장하였고 현직 대통령 바이든과 교체된 후보 해리스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졌다. 이에 맞서는 해리스 후보 역시 유권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국제 이슈를 거의 건드리지 않은 채 오로지 낙태 권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부적절성만 강조하였다. 독재자 이미지를 트럼프와 연결하고 임신 중절 권한 논리로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선거 전략이었다. 실제로 인플레이션의 경우 정책적인 해결책이 부재하다는 특성으로 인해 해리스 후보가 쉽게 다룰 수도 없는 현안이기도 했다.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물가 해결인 데도 불구하고 막상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현직 부통령이 유권자들의 관심을 다른 곳, 예를 들어 낙태 문제와 민주주의 등으로 돌리는 선거 전략을 구사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 어떻게 트럼프는 2024년 미국 대선에서 완승했을까?
11월 5일에 치러진 이번 미국 대선은 트럼프 후보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7개 경합주를 모두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2004년 대선 이후 최초로 총 득표수에서도 민주당을 앞섰다([그림 1]). 단순히 선거에서 크게 이긴 수준을 넘어 공화당은 이번에 가히 “트럼프 연합(Trump Coalition)”을 구축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림 2]는 뉴욕 타임스의 선거 후 초기 분석인데 주목할 점은 도시와 농촌 같은 주거지 차이, 교육 수준 차이, 인종 구성 차이, 연령 차이를 가리지 않고 2020년 대선에 비해 트럼프 지지도가 크게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백인이 50퍼센트 미만인 290개 카운티(county)들에서 무려 7퍼센트에 가까운 지지율 상승이 발생했고 흑인 유권자들이 많은 지역에서도 트럼프가 선전했다. 가장 커다란 지지율 변화는 라티노(hispanic) 인구가 25퍼센트를 넘어선 카운티들에서 일어났다. 2020년 대선에 이어 이번에는 9퍼센트를 상회하는 트럼프 지지율이 기록되었다. 소수 인종이나 청년, 여성 등에 의존하는 흔히 정체성(identity) 선거 방식으로 이전의 대선 경쟁을 이어왔던 민주당에게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민주당으로 지지가 편향되었다고 알려졌던 고졸 이상의 고학력 유권자 그룹에서도 트럼프 지지가 확인되었다.
[그림 1] 2004년 이후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얻은 총 득표수
[그림 2] 뉴욕 타임즈가 분석한 2020년 대비 2024년 트럼프 지지율
자료: The New York Times(Nov 6, 2024)
이번 트럼프와 공화당의 낙승은 연방 의회 선거에서도 확인된다. 상원에서는 미시건과 위스콘신의 현역 민주당 상원 의원이 수성에 힘겹게 성공했지만 펜실베니아 상원 의원 케이시(Bob Casey)가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개표가 완료되지 않은 11월 10일 현재 AP 통신에서는 케이시의 의석 상실을 이미 선언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당은 웨스트 버지니아(WV), 몬태나(MT), 오하이오(OH) 등 세 곳의 의석과 더불어 총 4석을 잃게 되면서 내년 1월 3일에 개원하는 연방 상원에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상원 의석수는 공화당 53석, 민주당 47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가 치러지기 전 예측으로는 트럼프 지지가 높은 웨스트 버지니아와 몬태나에서만 민주당이 패배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는 공화당 51석, 민주당 49석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펜실베이니아(PA)와 오하이오 두 곳에서도 민주당은 밀린 것으로 드러났다. 상원 선거의 민주당 완패를 가리키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캘리포니아 등 경합 지역구 다수에서 아직 개표가 진행 중인 하원에서는 공화당이 다수당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11월 10일 현재 공화당은 216석을 확보했고, 민주당은 209석을 이겼다. 남아 있는 10개 지역구 중에서 공화당은 8곳을 앞서고 있으며 민주당은 2곳에서 이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원 다수당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의석은 총 435석의 과반인 218석이므로 공화당은 2석만 더 확보하면 되는 상황이다. 다만 하원에서도 두 정당 사이에 의석수가 크지 않은 또 한 번의 양극화된 초박빙 의회가 등장할 전망이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떻게 미국 대선에서 완승을 거둔 것일까? 첫째, 높은 물가 상황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인플레이션 경우 1980년 카터 대 레이건 대선 이후 미국 대선에서 주요 변수로 등장한 적이 없다. 예컨대 65세 이하의 유권자들은 이번처럼 높은 물가 수준에서 대선을 치른 적이 처음이라는 분석도 있다. 게다가 실업률 상황과 달리 인플레이션의 경우 현직 대통령이나 집권 정당에서 효율적으로 대처할 정책 도구가 마땅치 않다. 금리를 높이는 것 외에 별 방법이 없는데 크레딧 카드 빚이 많은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또 하나의 인기 없는 대안일 수밖에 없다. 둘째, 이번처럼 예측을 뛰어넘는 7개 경합주 완승 혹은 완패의 경우 단순히 경제 상황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선거 기간 후반부에 트럼프 후보와 공화당은 성전환 운동선수(trans-athletes)와 관련된 TV 캠페인 동영상을 경합주에서 집중적으로 상영하였다. 사실 트럼프가 본격적인 문화 전쟁을 선포하고 이를 주요 선거 전략으로 집중 공략한 것도 아니다. 다만 선거 막판에 공화당이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스포츠와 성전환 문제는 유권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분석된다. 유색 인종 남성 유권자들과 자녀를 둔 여성 유권자들 모두 성전환 운동선수의 여성 스포츠 참여에 대한 거부감이 컸고 해리스 후보가 이에 대해 적절한 반론을 펴지 못한 측면이 크다. 결국 종합하여 볼 때 트럼프 후보가 선거 승리 후 언론과 인터뷰에서 지적한 대로 미국 유권자들은 경제와 문화 차원에서의 “상식(common sense)”을 회복하려는 욕구가 강했던 것으로 읽힌다. 지나치게 높은 물가에 대해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의 좋았던 경제를 회상한 것이기도 하고 급진적인 젠더 이슈를 중심으로 지나치게 엘리트 정당이 되어 가는 민주당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도 한 셈이다.
4. 2024년 미국 대선 이후 미국 외교 전망과 한국의 대응 전략은?
2024년 미국 대선 이후의 미국 외교 정책을 이슈별로 전망하기에 앞서 우선 미국 대통령의 권력 행사와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 행정 명령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에 관한 미국 정치의 전통적인 견제와 균형 원리는 이전과 다르게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선거 기간 동안 강조해 온 전 세계 모든 수입품에 대한 10퍼센트 보편 관세의 경우 행정 명령이 기초해야 하는 미국 실정법 근거 조항 여부가 불투명하다. 물론 중국과 같은 특정 국가의 경우 1962년 무역확장법(Trade Expansion Act)의 232조에 규정된 국가 안보 조항을 근거로 대통령이 임의적인 관세율을 부과할 수 있다. 이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벌어졌던 사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수입품에 일괄적인 10퍼센트 관세를 부과하려고 하는 경우 우선 의회의 견제 수단으로는 새롭게 입법에 나서는 경우가 있다. 대통령의 관세 명령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인데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공화당 상원 의원 투미(Pat Toomey)가 시도했다가 표결조차 부치지 못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의회의 견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대신 연방 판사에 의한 대통령 권력 견제 상황은 어느 정도 예상해 볼 수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첫해인 2017년에 트럼프가 발동한 여행 금지(travel ban) 행정 명령이 좋은 예다. 7개 중동 국가 국민들을 90일 동안 입국 금지시켰던 2017년 1월 27일의 행정 명령은 2월 3일에 곧바로 미국 연방 법원(US District Court)의 로바트(James Robart) 판사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축소된 형태의 여행 금지 행정 명령(version 3.0)을 개발하여 밀어붙였고 2018년 6월에 가서 비로소 연방 대법원의 5대 4 지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최종적인 내용의 5개 국가 리스트(이란, 시리아, 예멘, 리비아, 소말리아)는 국내적 파장이 실제로 크지 않았고 트럼프 역시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게 되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주로 행정 명령을 사용하게 될 영역은 통상과 기술 분야다. 우선 중국에 대한 고관세가 예상되는데 현재 극도의 침체 상황인 중국이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또한 연방 사법부의 차단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10퍼센트 보편 관세를 트럼프가 우선 추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치적인 메시지 효과를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이나 기타 무역 흑자국들을 대상으로 행정 명령을 통해 징벌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미국의 기술 경쟁력을 담보하고 경쟁 국가들의 시장 우위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도 상정해 볼 수 있다. 미국 국내 생산 요건을 강화한다거나 중국을 우회하는 제품 요소들까지도 규제 대상으로 묶는 것이 그 예다. 해외 기업들에 대한 반덤핑 조치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미국 제조업을 부흥시키려는 노력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정 명령 위주의 정책들은 이후의 견제 가능성과 지속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촌각을 다투는 21세기 기업 및 산업 경쟁 상황에서 그 충격이 적지 않다. 이는 트럼프 임기 4년 내내 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 대상이다.
행정 명령이 아닌 의회 입법 사항들의 경우 주요 변수는 상원의 필리버스터(filibuster) 적용 대상인가 아닌가 여부다. 2017년 12월에 통과된 트럼프 세금 인하법(Tax Cuts and Jobs Act of 2017)은 2025년에 만료되는데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에게 매우 중요한 입법 사안이다. 특히 4년 임기 동안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정책 도구가 트럼프에게도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주고 기업의 법인세를 깎아주는 세금 인하 법안 연장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법안의 경우 2017년 통과될 당시와 마찬가지로 상원의 필리버스터에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사인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도 필리버스터 예외 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와 공화당이 국세청 증원 폐지와 전기차 혜택 금지 등만 포함하는 축소된 형태의 폐기(skinny repeal) 법안을 상정하는 경우 이론적으로 필리버스터 없이 상하원 단순 과반으로 통과될 수 있다. 다만 공화당 지역구에 이미 상당 규모의 수혜가 약속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폐기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두고 봐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의 의회 승인을 요청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대통령의 리더십 없이 의회가 군사 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미국 역사에서 거의 전례가 없다. 따라서 트럼프가 지원을 요청하지 않으면 결국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곧 끊기게 된다. 이때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도와주는 경우 언제까지 단일 대오를 유지할 수 있게 될지는 의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와 지속해 온 경제적 유대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 등을 포함한 국제 사회가 지원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 젤렌스키에게 가해지는 휴전 혹은 종전 압박은 매우 커질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역시 트럼프와의 공조를 통해 하마스에 대한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고 인질 석방 협상에 즉각 돌입하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미국인 인질들도 상당수 포함된 현실에서 트럼프가 인질 석방 과정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우 미국 국내 지지는 더욱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관한 해법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와는 달라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북한이 핵 능력을 고도화하고 ICBM 기술 수준을 높인 현실과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4년으로 한정된 현실을 동시에 들여다보아야 한다. 여전히 북한 문제를 “나와 김정은 위원장 간의 문제(me vs. Kim)”로 인식하는 트럼프 대통령 쪽에서 미국 국내 정치 타이밍을 재면서 북한과 만나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북한은 이전보다 높아진 몸값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미국에게 요구할 것인지 한창 계산에 분주할 것으로 보인다. ICBM 폐기와 핵탄두 동결을 조건으로 제재 해제를 주장하게 될 수도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어떤 것이 우리의 단기적, 그리고 중장기적 안보와 평화 국익에 부합할 것인지 정부가 미리 논의하고 미국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우리의 대응은 다음을 필요로 한다. 첫째, 트럼프의 유연성에 대한 대칭 개념으로 우리도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트럼프가 불확실성 그 자체인데 우리가 굳이 확실성을 보여주거나 매달릴 이유나 동기는 없다. 다시 말해 트럼프에 대해 미리미리 대비하기보다 그때그때 대처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때로는 트럼프에게 공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트럼프 탓을 하기도 하는 당당하고 유연한 외교가 필요하다. 둘째, 마찬가지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스스로의 섣부른 자충수는 피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달라진 외교를 표상하는 정치인임에는 분명하지만 모든 외교는 상대방이 있고 또한 시간이 걸린다. 너무 트럼프를 두려워한 나머지 트럼프가 미처 요구하거나 거론하기도 전에 우리 스스로 협상 전략을 노출한다거나 가상적인 양보 시나리오를 공론화하는 것은 금물이다. 셋째, 수정 헌법 22조에 의해 2028년 대선에는 나올 수 없는 임기 4년짜리 대통령 트럼프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4년 임기 동안 어떤 정책을 우선순위로 내세우다 보면 다른 정책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또한 2026년에는 현직 대통령에게 불리하다고 알려져 있는 미국 중간 선거도 기다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행하는 선택과 집중에 관해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분석해야 한다. 너무 뒤처져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앞서 나가는 것도 불필요하다. 냉철하게 트럼프를 상대함으로써 달라진 미국을 최대한 이해하고 활용하는 한국 외교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John H. Aldrich, John L. Sullivan and Eugene Borgida. 2014. “Foreign Affairs and Issue Voting: Do Presidential Candidates ‘Waltz Before a Blind Audienc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3(1): 123-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