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국회의원 선거와 전문가 의회(Assembly of Experts) 선거가 2월 26일 동시에 치러졌다. 역사적인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된 후 치러진 첫 선거에서 온건 개혁파가 최대 격전지인 테헤란의 의석을 휩쓸었다. 전문가 의회는 이슬람 법학자 울라마로 구성된 의회로 국가 수장인 최고 종교지도자를 선출하는 기구이다.
안정된 일자리와 자유, 개방이 도시 젊은층의 표심을 결정했고 보수파 정치 거물들을 대거 낙선시켰다.
온건 개혁파는 테헤란을 석권했으나 전국 단위에서 압승하진 못했다. 울라마-혁명수비대 강경 보수 연합이 자격심사 제도를 통해 테헤란에 출마한 간판급 개혁파 후보들을 제외하고는 개혁 성향 후보 등록자들을 대거 탈락시켰기 때문이다.
보수 연합은 핵 협상 타결 후 탄도 미사일 실험을 세 차례나 강행하기도 했다. 이란 보수파의 체제 단속은 최근 사우디 강경파가 내부 위기 돌파용으로 과격 행보를 보이자 더욱 강경해져 수니-시아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7년 들어서는 새로운 미국 행정부가 이란 중시정책을 약화시킬 경우 이란 보수파는 이를 빌미로 온건파를 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핵 협상 타결을 분기점으로 이란은 국제사회 복귀의 경로에 성큼 들어섰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대통령 주도의 개혁 운동은 탄력을 받았고 이러한 추세를 되돌리기에는 부담과 비용이 만만치 않다. 최고 종교지도자라 할지라도 제한적이나마 선거가 작동하는 나라에서 강경한 대외정책을 실시할 때는 국내의 정치적 비용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다만 변화하는 손익계산에 따라 보수 엘리트 내부의 눈치보기는 꽤 지속될 것이다.
온건 개혁파의 테헤란 석권과 강경 보수파의 영향력 유지
이번 선거는2015년 7월, 이란과 P5+1 주요국 간의 핵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후 12월 IAEA의 핵개발 의혹 해소 결의안 채택, 2016년 1월 16일 서방과 유엔의 이란 제재 공식 해제 등 숨가쁘게 진행된 핵 협상 일정에 이어 실시됐다.
29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제10대 이란 총선에서 핵 협상 타결과 제재 해제를 이뤄낸 온건 개혁파가 테헤란의 의석 30석을 모두 차지했다. 88명을 뽑는 전문가 의회 선거에서도 테헤란 배정 16석 가운데 15자리를 차지했고 이란 개혁파의 정신적 지도자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과 로하니 현 대통령이 각각 1위와 3위로 당선됐다.
전문가 울라마는 이슬람 성직자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 1400여 년 전 등장한 이슬람에는 공화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현대의 복잡한 문제는 울라마의 독립적인 판단, ‘이즈티하드(ijtihad)’에 맡긴다. 시아파에서 울라마의 권한은 수니파보다 훨씬 강력하며 전문가 의회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를 선출한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공화제보다 이슬람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어서 간접 선출된 종신직 종교지도자가 직접 선출직 대통령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최고 종교지도자는 군부와 사법부, 외교권을 장악하며 대통령의 결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책을 거부할 수 있고 체제 수호의 강압기구 혁명수비대(Iranian Revolutionary Guard Corps)의 보위를 받고 있다.
호메이니에 이은 2대 지도자 하메네이의 중병설이 파다하기 때문에 이번에 당선된 전문가 의회 의원들이 3대 지도자를 뽑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번 전문가 의회 선거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 선거에서 여성 당선자는 두 배로 늘었고 젊은 정치인이 대거 당선됐다.
온건 개혁파는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희망의 명단’ 연합을, 전문가 의회 선거에서 ‘국민의 전문가’ 연합을 조직했다. ‘희망의 명단’ 연합은 1990년대 말 이란 개혁 운동을 처음으로 조직했던 하타미 전 대통령이 구상했고 아레프 전 부통령이 대표직을 맡고 있다. 아레프 전 부통령은 2013년 대선에서 개혁파 표가 나뉘는 것을 막기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고 로하니 후보 지지를 선언한 인물이다. ‘국민의 전문가’ 연합은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의 지도 하에 있으며 로하니 대통령도 이 연합에 포함돼 있다. 하타미 전 대통령은 유튜브를 통해 ‘30+16’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테헤란에 출마한 개혁파 국회의원 후보 30명과 전문가 의회 의원 후보 16명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중 전문가 의원 1명만 빼고 전원 당선됐다.
온건 개혁파의 약진은 도시 중산층과 청년, 여성 유권자의 적극적인 지지 덕분이다. 특히 젊은 세대 유권자가 투표에 대거 참여해 투표소 마감 시간이 5시간 이상 연장됐고 60%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들 개혁파 지지층은 2013년 대선에서도 로하니 후보를 50.8% 득표율로 극적으로 당선시킨 주역이었다. 2011년 EU마저 강도 높은 제재에 동참해 원유 수출길이 막히고 경제난이 심해지자 중산층과 젊은 세대는 온건 개혁파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제한적일지라도 선거의 존재는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를 포함한 체제 수호 세력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다. 선거가 작동하는 나라의 지도자는 국내 여론 때문에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할 때 독재자보다 훨씬 많은 제약에 부딪힌다. 이란에서도 지도자가 공익 확대를 내세우는 것이 권력 유지를 위해 더욱 효과적이며 핵 프로그램 개발 정책은 하메네이의 “국내 청중 비용(Domestic Audience Costs)”1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2013년 대선 직후 하메네이는 2009년도와는 달리 부정선거 항의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는 대신 선거 결과를 수용했다. 2009년 부정선거로 재집권한 급진 강경파 아흐마디네자드 정부 시절, 경제가 더욱 악화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란 최고 종교지도자에겐 핵 협상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강경 보수파는 테헤란에서 전문가 의회 한 자리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파의 대표주자이자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와 사돈지간인 아델 전 국회의장은 31위에 그쳐 낙선했다. 전문가 의회 선거에서 아흐마디네자드 전 대통령의 스승인 야즈디 전문가 의회 현 의장도 낙선했다. 등록된 후보의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의장이자 전문가 의회 의원인 잔나티는 전문가 의회 선거에서 16위로 간신히 당선됐다. 반면 개혁파 연합의 대표인 아레프 전 부통령과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선거와 전문가 의회 선거에서 각각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보수파는 거점인 동북부 지역을 포함해 지방에서 선전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혁파는 83석, 보수파는 78석을 얻었다. 무소속이 55석을 차지했고 소수 종교가5석을 얻었다. 최다득표자가 20% 이상 획득에 실패한 나머지 69석은 4월 재선을 통해 결정된다. 선관위는 공식 결과 발표에서 소속 정파를 표기하지 않지만 여러 매체는 최종 집계를 비슷하게 추정 발표했다. 전문가 의회 선거 역시 전국 단위에서 보수파의 패배라고 보기 어렵다. 총 88석을 두고 3개 정파가 경합했는데 개혁파 소속 당선자가 55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중 온건 개혁파 명단에만 이름이 올라간 당선자는 16명뿐이고 나머지 39명은 다른 두 보수 정파 명단에도 포함돼있다. 각 정파의 대표가 후보자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 연합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지만 이들이 개혁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이란에서는 선거를 앞둔 후보자들이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이합집산한다. 일반 민주주의의 경우 정당 내부에서 행해지는 치열한 경쟁이 이란에서는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노선 차이가 선명한 테헤란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후보의 정체성이 애매모호하다.
온건 개혁파의 약진이 테헤란에만 국한된 이유는 강경 보수파의 조직적인 방해 때문이다. 직접 선거에 출마하려면 후보자들은 먼저 헌법수호위원회(the Council of Guardians)의 자격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헌법수호위원회는 체제 단속을 최고 목표로 삼는 12명의 울라마로 구성되어 있고 이번 총선 후보 등록자의 50%, 전문가 의회 후보 등록자의 80% 이상을 사전 심의로 걸러냈다. 이란 혁명의 아버지이자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초대 최고 종교지도자인 호메이니의 손자 하산 호메이니마저도 개혁 성향을 보이자 최종 후보자 명단에서 탈락됐다. 40대 초반의 성직자 하산 호메이니는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젊은층에게 인기가 높다. 이번 선거에서 헌법수호위원회가 탈락시킨 후보 등록자는 사상 최고치였고 대부분이 개혁파 성향이었다.
이란의 선거와 권위주의 지배 엘리트: 울라마-혁명수비대 강경 보수 연합의 개혁파 저지
모든 직선제 후보 등록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 12명 가운데 6명은 최고 종교지도자가 지명한다. 이란에선 ‘이슬람 공화국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든 시민에게 공직선거 출마의 권리가 주어지고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자유롭고 공정하며 규칙적으로 실시되는 선거 결과에 따라 권력 구성원이 교체된다. 2009년 대선 부정과 이에 항의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기 전까지 이란은 중동 내 제한적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됐다. 현재 이스라엘, 터키, 레바논과 아랍의 봄 이후 민주화 이행기에 접어든 튀니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 국가는 인종적, 종교적 민주주의라는 한계 때문에 민주주의 공고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으나 제한적이나마 선거와 다원주의를 제도로 보장하고 있어 최소한의 절차 민주주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 하지만 이란은 2009년 이후 “민주주의 없는 선거(elections without democracy)를 행하는 혼합 정권(hybrid regime)”2으로 강등되었다. 이란 민주주의의 후퇴에는 권력의 핵심인 울라마와 혁명수비대 강경 보수 연합의 역할이 컸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1979년 무능한 친미 왕정을 무너뜨린 시민혁명 후 출범했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왕은 1953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2차 대전 후 첫 민주주의 선거에서 좌파와 이슬람주의자를 포함한 국민 대다수의 지지로 총리가 된 민족주의자 모사덱을 몰아내고 집권했다. 이후 반정부 성향의 울라마인 호메이니를 구심점으로 반 팔레비 운동이 시작됐고 1979년 군과 비밀경찰마저 시민의 편에 서자 팔레비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란의 도시는 역사적으로 전통 시장 바자르를 중심으로 발달했고 바자르 공동체의 네트워크는 혁명의 조직적 기반이었다. 시아파 이슬람은 물리적 탄압에 맞설 수 있는 순교적 도덕성을 제공했다.
그러나 혁명 직후 울라마 그룹은 함께 혁명을 이끌었던 세속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좌파를 숙청했다. 뚜렷한 정치조직 없이 독재자 축출이라는 구호 아래 연합했던 혁명 세력들은 새로운 국가 형성 과정에서 치열하게 주도권을 다퉜다. 호메이니와 급진 울라마는 전통 가치를 내세워 대중을 동원했고 중간 관료, 대학생, 노조를 권력에서 제외시키는데 성공했다. 권력 분산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와 좌파 보다는 도덕성과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성직자들이 정치적 동원에 훨씬 성공적이었다. 더구나 팔레비 왕정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됐던 전자와 달리 후자는 종교 모임을 통해 시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슬람 공화국의 새 헌법은 호메이니가 주장한 이슬람 법학자 통치론(velayat-e faqih)을 따랐고, 최고의 울라마가 국가 통치권을 부여 받았다. 집권 울라마 세력은 새로운 강권기구인 혁명수비대를 통해 사회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울라마-혁명수비대 집권 연합은 교조적인 이슬람화를 통해 획일적으로 국가 이익을 추구했고 이에 따라 공기업의 비대화와 비효율성, 관료의 부정부패, 급진적이고 강경한 대외정책이 나타났다.
하지만 혁명으로 부패 왕정을 무너뜨린 후속 세대는 여전히 높은 정치의식을 보이며 “탈퇴가 아닌 항의의 의미로”3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 혁명을 주도했던 도시 바자르 세력은 성직자 권위주의에 큰 불만을 갖고 있으며 젊은 세대는 개방과 안정된 일자리를 원한다. 15-29세 사이의 청년층이 전체 인구의 33%를 차지한다. 이들은 종신 최고 종교지도자 체제와 울라마-혁명수비대 연합의 대안으로써 직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개혁 연합에 주목한다.
개혁 개방에 대한 열망은 1997년 대선에서 온건 개혁파 성직자 하타미가 70% 득표율로 압승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고 하타미는 그 여세로 4년 후 재선했다. 이에 앞서1989년 호메이니 사후 대통령에 당선된 라프산자니가 공적 영역에서 비 성직자 역할의 확대를 주장하며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후 하타미 대통령은 이슬람의 민주적 해석, 대통령의 권한 강화와 행정부의 위상 확대, 헌법수호위원회의 역할 축소, 미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내세웠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급성장한 개혁 운동은 행정부의 전문 관료와 지방자치 단체장에 대한 중산층, 지식인, 여성 운동가, 젊은 세대의 지지를 중심으로 공고화 되어갔다.
그러나 강경 보수파는 개혁 연합의 성장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1999년 테헤란 대학가에서 일어난 하타미 지지 세력과 반 개혁 그룹 간의 무력 충돌을 빌미로 개혁 성향의 성직자들을 해고했고 이슬람 모욕죄로 기자와 대학생들을 대거 체포했다. 하타미 정부 시절 폭발적으로 늘어난 언론사들을 대거 폐쇄 시키자 2000년대 초 신문 구독률이 45% 이상 하락하기도 했다. 2009년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사건 이후 개혁 운동은 와해 위기를 맞았다. 집권 보수 연합은 하타미 전 대통령의 발언과 사진, 이름에 대한 보도 금지령을 내렸고 2009년 대선의 개혁파 후보 무사비를 가택연금 시켰다. 온건 개혁파는 2012년 총선을 보이콧했고 30석을 얻는데 그쳤다.
이란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강경파의 견제
2015년 7월, 온건 개혁파 로하니 대통령과 자리프 외교장관이 핵 협상을 성사시키자 강경 보수파의 입지는 급속히 약화됐다. 권력의 핵심인 울라마-혁명수비대 연합은 제재 기간 동안 경제 분야마저 장악했기에 제재 해제를 원하지 않았고 개방 저지를 모색했다. 2015년 12월 15일 IAEA가 이란 핵 개발 의혹을 해소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온건 개혁파는 제재 해제일을 앞당기려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인 반면 강경 보수파는 선거를 2달 여 앞둔 정국을 경색시키고자 했다. 여론이 개혁파에게 점차 유리해지자 보수파는 체제 단속에 나섰다.
하메네이는 공식 석상에서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혁명수비대 관리들은 핵 협상의 기본 원칙에 반대되는 ‘선 제재 해제, 후 합의 이행’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혁명수비대는 10월 핵 탄두 탑재가 가능해 보이는 장거리 미사일을, 11월엔 중거리 미사일을 각각 시험 발사하면서 국제사회와 온건 개혁파를 자극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은 제재 해제일 바로 다음 날인 2016년 1월 17일 미사일 개발과 연루된 기업과 개인 11곳에 대한 신규 제재를 발표했다. 3월 8일 혁명수비대는 탄도 미사일 추가 시험 발사를 강행했다.
강경 보수파의 개혁파 저지와 보혁 갈등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강경파가 국외 변수로 등장하면서 이란 보수파의 체제 단속 행보가 더욱 강화됐다. 사우디 살만 국왕 체제가 국내외 위기에 처하면서 강경 대외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종파 갈등을 부추기며 이란과 대결 구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 보수파는 이를 호기로 삼아 맞대응으로 나서며 수니-시아 갈등을 내부 정치적 위기의 돌파용 카드로 이용하고 있다. 이렇듯 양국 강경파가 내부 위기의 타개를 위해 외부의 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서로의 과격 행보에 좋은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이란의 온건 개혁파에겐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다.
2016년 1월 2일 사우디가 자국의 시아파 성직자를 테러 혐의로 처형하자 이란 시위대가 테헤란의 사우디 공관을 공격했다. 양국 급진파의 강경 일변도 행보는 수니파 종주국과 시아파 맹주의 날 선 대결로 이어졌다. 사우디는 내정 간섭과 국제법 위반이라며 이란과 국교 단절을 선언했고 양국 간 교역과 민간 항공기 운항도 중단했다. 사우디 왕정은 전통적으로 친서구, 시장 선호, 실리 추구에 기반한 현상 유지 정책을 선호해왔다. 그러나 최근 저유가로 인한 재정 압박과 통치 기반의 위기, 살만 국왕의 독단적인 승계 구도 수정과 왕실 내부의 불만 고조, 출구전략 없는 예멘 내전 개입, 메카 압사 사고와 왕실 권위 추락, 미국의 이란 중시정책에 따른 불안감 상승으로 인해 국왕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르자 이의 타개를 위해 파격적이고 강경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우디는 미국 셰일 업계와의 경쟁에서 점유율을 지키고자 증산정책을 고수해왔고 이에 따른 저유가로 심각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 원유 수입에 기댄 무차별적 보조금 지원과 무과세 정책을 통해 왕실의 세습 지배를 유지해왔으나 이젠 ‘납세 없이 대표 없다(no taxation, no representation)’의 통치 기제가 위기에 처했다. 또한 2015년 1월 왕위에 오른 살만 국왕은 왕실 전체의 합의로 결정된 승계 구도를 수정해 제 1 왕세자를 자신의 조카로, 제 2 왕세자를 자신의 아들로 전격 교체하면서 왕실 구성원의 불만을 샀다. 제 2 왕세자이자 국방장관이 된 30대 초반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구사하며 예멘 내전 개입을 주도했다. 하지만 출구 전략도 없이 전비만 소비하고 있어 실리도 명분도 챙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구나 같은 해 9월에는 메카에서 순례자 1,500여 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나면서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수호하는 사우디 왕실의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역외 균형(offshore balancing)의 일환으로 이란과 핵 협상이라는 역사적 거래에 성공하자 살만 국왕 체제의 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시아파 맹주 이란이 국제무대에 복귀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는다면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사우디는 미국의 최대 중동 우방국임에도 이번 핵 협상을 핵 확산 금지의 실패작으로 비난하며 자체 핵 프로그램의 실시를 공언하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을 두고 1,4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수니-시아 종파 간 문명의 충돌이라는 설명이 있다. 물론 7세기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갑자기 사망하자 후계자 선출 방식을 두고 합의를 주장하는 다수 수니파와 혈통을 강조하는 소수 시아파의 갈등이 시작됐다. 하지만 역사적 사례를 보면 수니와 시아가 끊임없이 싸워온 것은 아니다. 1988년 사우디와 이란이 국교를 단절한 경우가 한번 있었으나 1991년 걸프전 발발 이후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물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 이후 수니파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고 시아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종파 갈등이 심화되기는 했다. 현재도 시리아 내전에서 수니파는 반군을 시아파는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며 예멘 내전에서 수니파는 정부를 시아파는 후티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 문제는 왜 하필 지금 사우디-이란의 단교가 일어났느냐 하는 점이다. 위기에 처한 사우디 살만 국왕 체제가 강경 노선을 택했고 입지가 축소된 이란 강경 보수파가 현상 타파 추구로 이에 대응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다.
이란 보혁 갈등과 사우디-이란 갈등, 한국의 시장 진출, 그리고 북한
제재 해제 후 이란 시장 선점을 위해 유럽과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우리 역시 이란과 무역 재개를 위해 2월 말 10년 만에 테헤란에서 한-이란 경제 공동위원회를 열었다. 오는 5월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 정상 최초로 이란 방문을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창조경제 활성화를 강조해 온 박 대통령에게 이란 시장 재진출은 의미가 크다. 2010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29호의 채택으로 이란 제재의 강도가 더 높아지기 전까지 이란과 활발히 거래하던 우리 중소기업은 2,000여 개에 달했다. 현재는 대기업 위주로 10여 개 회사만 진출해 있다. 우리는 이란에서 사우디,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다음으로 많은 원유를 사오고 있다.
우리의 이란 시장 재진출 노력을 두고 이란 강경 보수파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우리가 2003년부터 IAEA의 이란 핵 확산 금지 촉구 결의안에 동의했고 이후 제재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측 일부 인사가 우방인 미국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동참했다는 변명을 내놓았다고 한다. 아마 중국과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조바심이 난 변명인 듯하다.
우리측의 변명은 강경 보수파를 심판한 이란 유권자의 입장에 배치되어 보인다. 이번 양대 선거에서 보수파의 조직적 방해에도 개혁파는 약진했다. 개혁파의 전국적 압승은 아니었지만 유권자는 강경 보수파에 대해 심판의 시그널을 명확하게 보냈다. 이로써 내년 로하니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도 높아졌다. 물론 강경 보수파가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개방정책이 빠른 속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제한적이나마 선거가 작동하는 한 보수 지배 엘리트는 유권자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이란 제재에 참여해왔다. 더구나 이란과 북한 사이에 핵 기술과 군사 협력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다. 앞으로도 단기적 경제 이익에 앞서 안보 차원에서 이란 급진 강경파-북한 정권의 연결을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 실제로 2016년 1월 중순 미국이 혁명수비대의 미사일 실험 발사와 관련해 발표한 새로운 제재 대상에는 북한과의 미사일 개발 협력 의혹을 받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란 방산 기업의 임원 무사비는 북한 조선광업개발회사와 접촉해왔고 다른 3명 역시 평양에서 관련 부품을 운송해오는 데 직접 간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 연루 제재 대상이 발표된 지 두 달도 못돼 이란 급진 강경파는 추가 미사일 시험 발사를 했다. 입지 축소에 따른 방어 전략으로 강경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 강권기구 세력은 소수파이며 유권자는 물론이거니와 보수 지배 엘리트 사이에서도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이란 시장 선점에 대해선 우리가 크게 불안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란 내 중국 평가가 썩 좋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이란 제재에 참여하지 않았던 중국은 이란 원유를 독점해 싼 값에 들여오면서도 이란 내 인프라 건설이나 투자 유치에서 자신의 실속만 챙기고 현지화는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진정한 협력자로서의 태도가 아니었다는 이란측의 불만이다. 중국의 대 이란 시장 점유율이 27%에 달한다고 하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사우디-이란 갈등과 관련해 우리가 양자택일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핵 협상 타결 이후 사우디와 이란 사이의 패권 경쟁이 첨예해지기는 했다. 수니파 바레인, 수단도 이란과 단교했고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카타르는 자국 대사를 소환하거나 이란과 외교 관계를 격하시켰으며 요르단, 이집트, 오만은 이란을 맹비난하는 등 종파 갈등이 역내로 확산되는 듯하다. 하지만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이 두 나라의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거나 하지는 않고 기존의 역내 불안정 상태를 조금 더 악화시키는 데 그칠 것이다. 강경파라 할지라도 양쪽 모두에게 지나친 부담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동의 상황은 시리아 내전과 난민 문제, ISIS 격퇴전, 예멘 내전 등으로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상태이다. 사우디와 이란의 강경파가 현상 타파를 위해 종파 갈등을 이용한다 할 지라도 지금의 교착상태가 더 악화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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