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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국제질서를 크게 흔들어
한·미 동맹, 중국과 우호 기조 속
일본·인도와도 전략적 연대해야
우리 능력으로 당당한 외교 가능
 
트럼프 2기가 시작된 지 지난 100여 일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간이었다. 2차대전 이후 80년간의 국제질서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무질서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투키디데스가 갈파한 대로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감당해야 할 고통을 감당할 뿐”인 세상이 오고 있는가? 이런 험한 세상 속에서 한국 외교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첫째, 국민들은 국가안보가 든든히 지켜지기를 원한다. 특히 북한의 안보 위협을 우려하고 있다. 그렇기에 동맹인 미국과의 관계는 아직도 대단히 중요하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주둔에 회의적이고 동맹을 거래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공약 수행이 미국에 이득이 된다고 믿게 만들 것인가. 다행히도 구한말 때와 달리 지금 우리에게는 카드가 있다. 한국이 잘하고 있는 조선·원자력·반도체·자동차·방산 등이다. 예를 들어 올해 중국의 선박생산 능력은 세계 전체의 74%인데 미국은 0.2%밖에 안 된다. 이처럼 미국의 허약한 부분을 우리가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우리의 가까운 이웃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원하며,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다. 따라서 호혜와 상호 존중의 원칙 아래 우호친선 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가는 것이 우리의 국익이다.

둘째,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격렬하게 원한다. 지난 12월 3일 계엄선포 사건 이래 수십만의 국민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이제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정치 안정을 되찾고 있다. 동맹국인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흔들릴지라도, 그리고 이웃 나라 중국이 권위주의 국가임에도,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

셋째, 국민들은 또한 힘의 논리와 국제 무질서가 아니라 규범이 작동하는 국제질서를 원한다. 국제 무질서의 제국주의 시대에 나라를 뺏겼고, 지금도 군사 대국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서해 한·중 잠정조치수역에 철제구조물을 구축하거나 북한이 핵 개발로 우리를 위협하는 등의 불법 행위를 결연히 반대하며 국제규범 준수를 촉구한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 중국과의 우호 관계라는 기조는 유지해 가면서도, 규범 기반 국제질서와 민주주의를 원하는 뜻이 맞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이것이 혼란기의 한국 외교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나라가 일본이다. 만일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타협으로 동아시아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장악하게 된다면, 한국은 큰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미국의 관점에서 한·미 동맹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고, 한국은 안보 공백 상태에 던져질 것이다. 또한 중국은 지난 수십 년 그래왔듯이 자국의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주변국에 확산시키려 할 것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세력권에 방치된 민주주의의 섬으로 고립되고, 경제의 사활이 걸린 통항로도 중국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일본과의 전략적 연대는 한국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것이다.

일본 못지않게 중요한 국가가 인도이다. 한국 외교는 그동안 너무나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프레임에만 갇혀있었다. 지정학적으로 두 나라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국력 수준을 볼 때, 이제 그 프레임을 뛰어넘어 전 세계로 외교 공간을 확장할 때가 되었다. 인도는 최대 인구의 민주국가이고 곧 세계 3대 경제국이 될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와의 연대를 강화해야 할 한국의 입장에서, 그 첫 번째 전략 파트너가 인도이다.

유럽연합(EU)·호주·캐나다 같은 국가들은 트럼프 현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규범 기반 질서의 수호뿐 아니라 환경·인권·개발 등 다자 국제협력의 파수꾼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국이 협력을 강화해야 할 중요 파트너 국가들이다.

그런데 과연 미국이 빠진 채 여타 국가들이 뭉친다고 해서 규범 기반 국제질서의 유지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40년 전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코헤인은 『패권 이후』라는 책에서 패권국가가 지도력을 발휘해서 만든 안정된 국제제도들은 패권국가가 사라져도 관성을 가지고 상당 기간 지속된다고 주장했다. 희망이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자, 나머지 국가들은 TPP를 보완해서 미국 없이 CPTPP를 만들었고 지금 12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보호무역의 광풍 아래서도 역내 자유무역을 추진하고 있는데, 한국도 서둘러 가입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석유수출국기구(OPEC), EU 등도 패권국 없이 만들어져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경제력, 군사력, 문화력 수준이면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당당한 외교를 펼쳐갈 수 있다. 권력정치의 험한 파고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켜가며 국제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역량이 있다. 난중지추(亂中之錐), 즉 혼란 속에서도 두드러진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 본 글은 5월 3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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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관
윤영관

이사장

윤영관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입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에 임용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또한 한국미래전략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반도 평화연구소의 창립 회원이자 이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동아시아 비전그룹 II 공동의장(2011-2012)과 국회의회 외교 자문위원회 위원장(2019-2020)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국제정치경제, 한국 외교정책, 남북관계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