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브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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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개최된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아세안 관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 CSP)로 격상되었다. 1989년 한국과 아세안이 부분 대화 상대(sectoral dialogue partnership) 관계를 맺은 지 35년 만에 한국과 아세안 관계는 동맹의 바로 아래 단계라고 하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까지 발전했다.1 한-아세안 CSP로 한국과 아세안 관계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를 지났다. 무엇보다 CSP 관계 수립은 지난 14년간 전략 동반자 관계에 있었던 한-아세안 관계의 발전과 심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향후 한국과 아세안 사이 협력이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이번 CSP 관계 형성은 일차적으로 한-아세안 관계 수립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한-아세안 관계 격상은 2010년 이후 지난 14년간 미-중 전략 경쟁의 심화 등 한-아세안 관계를 둘러싼 환경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2015년 아세안이 아세안 공동체(ASEAN Community)를 선언하는 등 아세안의 성격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에 비추어 기존 협력을 새로운 틀에 담을 필요가 있었다. 한국 입장에서는 그간 크게 달라진 한국 외교에서 아세안의 위상과 아세안에 대한 한국의 협력 의지를 반영하는 관계 격상이라는 의미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유사하게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을 중시하는 주변 강대국, 중견국과 아세안의 공식 관계가 격상된 만큼 한국도 이와 유사하게 격을 맞춘다는 의미도 있다([부록 1] 참조).

CSP 관계 형성에 따라 곧 이 관계를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행동계획(Plan of Action, PoA) 작성을 위한 작업이 이어질 것이다. 이 PoA는 현 정부를 넘어 다음 정부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한-아세안 협력의 연속성을 담보하게 된다. CSP는 현상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성격도 함께 가진다. 따라서 CSP 관계 수립도 중요하지만 이를 플랫폼으로 삼아 향후 제시되는 PoA를 얼마나 내실 있게 추진하는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는가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우선 PoA의 협력 사업들이 어떻게 아세안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업 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아세안을 강대국에 대한 한국의 전략적 레버리지로 만들려는 한국의 목표도 PoA를 통해 충족시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공적 안보 원조(Official Security Aid, OSA)를 통해 대 아세안 군사적 접근을 강화하는 일본, 최근 무역, 투자에서 아세안과 관계 강화를 강력히 추진해 주목받는 호주의 대 아세안 CSP 전략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

 

한-아세안 CSP의 주요 내용

 
한-아세안 CSP는 매년 열리는 아세안+3(ASEAN+3),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 계기에 개최되어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최종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1년에 한 번 한국과 아세안 국가 정상들은 이 일련의 정상회의 계기에 양자 관심사와 협력을 논의하는 정상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왔다. 물론 이 정상회의가 열리는 아세안 의장국 순방을 통해 아세안 의장국과 양자 회담, 다른 동남아 국가 정상과 양자 회담은 물론 ASEAN+3, EAS 참여 국가의 정상과 만남이 이루어진다.

아세안과의 정상회담, 그리고 여타 국가와 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이번 일련의 한-아세안 정상회의, ASEAN+3, EAS 중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고 중요했던 것은 한-아세안 CSP라고 할 수 있다. 한-아세안 CSP 관계 수립에 관한 선언(Joint Statement on the Establishment of the ASEAN-ROK 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은 이미 2023년 합의된 아세안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관점 협력 관련 한-아세안 공동선언(Joint Statement of the 24th ASEAN-ROK Summit on Cooperation on the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과 함께 향후 한국과 아세안 협력을 견인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2

한-아세안 CSP 수립을 전후해 아세안 측의 CSP 수립에 대한 기대도 컸다. 지금까지 한-아세안 협력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안보, 국방, 전략 부문의 협력이 CSP를 통해 강화될 것이라는 희망에서부터 이름 그대로 CSP가 포괄성을 강조하는 만큼 한국과 아세안 국가 사이 협력이 아세안 10개국에 고르게 확산되어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3 아세안 내 특정 국가에 치우친 한국의 경제 협력이 다른 국가들로 균등하게 확산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아세안 지역에서 역할 강화에 대한 전망도 있었다. 한국의 앞서 디지털 분야, 그리고 소프트 파워 분야에서 한국과 아세안 사이 협력 강화도 예견되었다.4

CSP 수립에 관한 공동선언은 한국과 아세안 사이 협력 분야를 대표하는 세 가지 원칙이 견인한다. 이 세 가지 원칙은 정치 안보 분야의 1) 모두를 위한 평화와 안보 증진(Advance peace and security for all), 경제 협력 분야에서 2) 스마트하고 지속 가능하며, 복원력 있고 연결된 미래 건설(Build a smarter, and a more sustainable, resilient, and connected future), 그리고 사회문화 분야에서 3) 젊은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문화 플랫폼 창조(Create a socio-cultural platform for young and future generations)로 압축된다.5

한-아세안 CSP의 ABC 원칙 중 정치 안보에 해당하는 원칙은 특별히 비(非)배타적이고 포용적인 평화와 안보를 지향한다. 이는 역내 특정 국가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한국의 인도 태평양 전략에서 밝힌 포용성(inclusivity)과 맥락을 같이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아세안 지역에서 비전통 안보, 인간 안보의 문제가 평화와 안정의 핵심임을 감안해 국가 안보뿐 아니라 개인 한 사람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안보까지 포괄적 대상으로 한다. 경제 협력의 원칙은 아세안에서 강조하는 연계성(connectivity)을 반영하고 디지털 전환, 기후변화에 관한 내용을 포괄하는 미래를 건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문화 분야에서는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인 한-아세안 연대구상(Korea-ASEAN Solidarity Initiative, KASI)에서 특별히 중점을 두고 있는 미래세대 교류와 역량 강화를 중요하게 반영했다.

이런 원칙하에 CSP의 정치 안보 부문은 아세안과 한국 사이 대화와 외교를 통한 평화 증진을 약속하며, 아세안 주도의 다양한 회의와 포럼을 통해 협력의 강화를 약속했다. 비전통적 안보 부문에서는 사이버 안보와 초국가적 범죄 대응을 확대하고,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서는 유엔해양법협약(UNCLOS) 준수를 바탕으로 해양 안전과 항행의 자유 보장을 위한 노력을 중점 사항으로 제시했다. 한국 측의 관심사인 한국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 노력에 대한 지지도 명시되었다.

경제적으로는 한-아세안 자유무역협정(ASEAN-Korea Free Trade Agreement)과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을 통해 무역과 투자 촉진, 공급망 회복력 강화를 위한 노력을 약속했다. 또한 스마트 인프라와 인공지능(AI), 중소기업 지원 등을 통해 아세안의 미래 산업 육성을 명시했다. 사회문화 협력에서는 원칙에 충실해 교육 및 문화 교류, 청년과 여성의 역량 강화, 공공보건, 고령화 문제에 대한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2027년까지 한-아세안 협력기금을 연 4,800만 달러까지 증대하고 이를 주로 디지털 경제, 기후 변화, 지속 가능 에너지, 그리고 재난 관리 분야에 집중할 것을 밝혔다.

 

왜 지금 한-아세안 CSP인가?

 
아세안은 이제 한국 외교의 5강(强) 중 하나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협력 대상이다. 지역과 글로벌 차원에서 중견국인 한국이 지역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는 차원에서, 아세안이 한국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한국의 대외적 자율성 제고를 위한 외교 다변화 차원에서 아세안은 매우 중요한 파트너다. 아세안 국가들의 안보와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한국은 아세안과 이미 많은 협력을 하고 있다. 이는 지역의 평화 증진이라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아세안은 한국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무역과 투자의 파트너다. 수많은 한국기업이 아세안 국가에 진출해 있고 한국이 지속적으로 무역 흑자를 기록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상호 방문, 한류 등 문화 교류를 통한 사회문화 협력관계도 깊다. 이런 중요성을 감안해 한국 정부는 지난 문재인 정부 시기의 신남방정책, 그리고 현 정부의 인태 전략 안에 포함된 한-아세안 연대구상(KASI) 등 별도 아세안 지역에 대한 협력 비전도 가지고 있다.

이런 기존의 깊은 협력관계, 그리고 이를 반영한 정책도 있는데 왜 CSP를 통해 한-아세안 관계 격상을 별도로 추진해야 하는가?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중요한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로 압축된다.

 
깊어진 한-아세안 관계를 담을 새로운 틀의 필요성
 
첫째로 한-아세안 관계가 마지막으로 격상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한-아세안 협력을 둘러싼 주변의 전략적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한국과 아세안 관계의 마지막 격상은 2010년 한-아세안 전략적 동반자 관계 수립이다. 1989년 첫 공식 관계를 맺은 한국과 아세안은 2년 만인 1991년 전면 대화 상대국(full dialogue partnership)으로 관계를 높였다. 1990년대 큰 변화가 없던 한-아세안 관계는 199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급격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런 발전에 힘입어 2004년에 한-아세안은 상호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comprehensive partnership)로 높였다. 이어 6년 만인 2010년에는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이후 14년간 한-아세안 관계와 협력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관계 격상 등의 가시적 조치가 없었다. 신남방정책, KASI 등으로 더욱 깊어진 한-아세안 협력관계를 14년 만인 2024년에 와서야 한 단계 올리는 것은 다소 늦은 감마저 있다.

 

[표 1] 한-아세안 관계의 심화: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까지6

표1
출처: 「2022 한-아세안 통계집」, 「해외직접투자통계」, 「한국 콘텐츠산업 통계」
 

또한 아세안과 CSP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아세안을 둘러싼 주요 대화상대국의 CSP 추진에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는 점도 있다. 2021년 중국과 호주가 아세안과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다. 곧이어 2022년에는 중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미국이 아세안과 CSP 관계로 양자 관계를 격상했고 인도 역시 CSP 관계를 수립했다. 일본도 2023년 아세안과 CSP 관계 수립을 발표했다. 이들 주요 아세안 대화상대국들과 한국이 아세안을 놓고 경쟁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대화상대국들이 아세안과 CSP로 관계를 격상함에 따라 한국도 이와 대등한 수준으로 아세안과 관계를 격상할 충분한 요인은 있었다.

 
격화된 강대국 경쟁 속 전략적 협력 강화를 위한 관계 업그레이드
 
두 번째로 한-아세안 협력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했다는 점이다. 한국과 아세안 협력은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변 환경, 특히 미중 전략경쟁과 같은 중요한 환경 변수가 변화하면 그에 맞는 새로운 협력의 전략과 틀이 필요하다. 한-아세안 사이 마지막 관계 격상을 했던 2010년만 해도 미국과 중국이 막 전략 경쟁을 시작한 시점으로 이 강대국 경쟁의 여파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상한 중국은 여전히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에게 매력적인 경제 협력 파트너였다. 미국의 피봇(pivot) 정책 역시 중국에 대한 견제 성격보다는 중동에 매몰되어 있던 미국이 다시 아시아를 중시하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한국이나 아세안 모두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한국이나 아세안 국가 모두에게 가장 큰 전략적 고민거리이고 지역 전체적으로 가장 큰 전략적 불확실성의 요소가 되었다. 두 강대국의 경쟁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이제 군사, 외교, 무역, 투자, 공급망, 기술 등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갈등은 지역의 가장 중요한 갈등 지점(flash point)으로 떠올랐다. 중국과 일부 동남아 국가 사이 해양 영토 분쟁의 이면에는 미국과 중국 사이 지역 해양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이 존재한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한 필리핀-미국-일본의 군사적 연대는 남중국해 분쟁뿐만 아니라 아세안 국가 간 분열을 심화시킬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미국과 중국에 동시에 의존한 동남아 국가들의 처지는 점점 곤란해지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의 경제적 영향권 하에 들어간 듯 보이지만 여전히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은 동남아 국가들에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동남아에 대한 기업의 투자에서 미국은 여전히 다른 주요 국가들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7 반면 동남아 개도국의 인프라 건설, 자원 개발 부문에는 중국의 자본이 지배적이다. 중국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도 지리적으로 연결된 동남아 대륙부 국가의 인프라 건설에 중국은 적극적이다. 반면 중국과 경제적 경쟁을 위한 미국의 디커플링(de-coupling), 리쇼어링(re-shoring), 배타적 공급망 건설 등의 전략은 동남아 국가들에게 큰 경제적 리스크다.8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를 무기화 하는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은 동남아 국가 경제 안보에 중요한 리스크로 작용한다.9

강대국 경쟁이 격화된 상황에서 그에 따른 전략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대 강대국 전략도 중요하지만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 사이 협력도 중요하다. 한국과 아세안은 경제와 안보 이익에 관한 미중 경쟁 사이에 끼어 있다. 한-아세안 협력이 미중 경쟁을 해결하기는 어렵겠지만 강대국 경쟁 틈바구니 속에 중견세력 사이 협력을 통해 지역 중소 국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대하고 이익을 보호하는 전략적 연대가 있다면 강대국을 상대하는 레버리지도 강해진다. 한-아세안 CSP를 통해 전략적 협력의 강화는 이런 방향을 추구하고 있고 또 해야만한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아세안의 성격 변화를 반영한 협력 제도 마련
 
세 번째로 지난 14년간 아세안은 제도적으로 크고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아세안 공동체라는 아세안의 제도적 변화와 아세안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관점(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AOIP)을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 대응 전략 변화는 한-아세안 협력을 그에 걸맞은 새로운 틀에 담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협력 상대의 성격, 그리고 협력 상대의 전략이 달라짐에 따라 그에 맞는 대응이 필요했다.

2008년 채택된 아세안 헌장(ASEAN Charter)에 기초해서 아세안은 2015년 아세안 공동체를 선언했다. 물론 이 선언 만으로 아세안 공동체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15년 선언을 기점으로 아세안 공동체 건설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이전 아세안의 지향점은 동남아 지역 국가들 간 느슨한 협의 및 협력체였으나 2015년 이후에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아세안 공동체 건설이 가능할지 아닐지 여부를 떠나 아세안은 2015년 이후 모든 협력을 아세안 정치 안보 공동체(ASEAN Political Security Community, APSC), 아세안 경제 공동체(ASEAN Economic Community, AEC), 그리고 아세안 사회문화 공동체(ASEAN Socio-Cultural Community, ASCC) 단위로 진행하고 있다.10 한국을 포함한 아세안대화상대국의 대 아세안 협력도 기본적으로 이 세 공동체 단위로 일어나고 있다.

한편 아세안은 내적으로는 공동체 건설을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는 AOIP를 모든 대화상대국과 협력의 핵심에 놓고 있다. 한-아세안 CSP도 이런 아세안의 전략과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아세안은 주변의 더 큰 대화상대국에 대응하기 위해 내적으로 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아세안 중심성이라는 주장을 제시한다. 아세안 지역 안보 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 ASEAN+3, EAS 등 아세안 주도 다자 협력이 과거에는 아세안 중심성 구현의 핵심 메커니즘이었다. 여기에 아세안은 2019년부터 AOIP를 아세안 중심성 강화를 위한 추가 수단으로 덧붙였다. 점차 강화되는 인도-태평양이라는 개념을 제목으로 받아내면서 실제 내용은 대화상대국들이 아세안과 어떤 분야에서 어떤 협력을 해야 하는지 AOIP는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아세안은 2020년부터 차례로 일본, 인도, 호주, 한국, 미국, 중국과 AOIP를 중심으로 한 별도의 협력 문서를 만들어 대화상대국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동시에 아세안 중심성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부록 2] 참조).

 
한국 외교 정책에서 높아진 아세안의 중요성 반영
 
네 번째로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과 협력에 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아세안에 대한 한국의 협력 의지와 심도가 달라짐에 따라, 그리고 한국의 지역 전략이 진화함에 따라 한-아세안 협력을 규정할 새로운 방향성과 형식이 필요했다는 점도 한-아세안 CSP 수립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2017년 전임 문재인 정부는 신남방정책을 발표했다. 1989년 이후 한-아세안 관계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지만, 이를 크게 촉진시킨 것은 1998년 경제위기와 함께 등장한 ASEAN+3이었다. 다자 협력 맥락 속에서 한-아세안 관계는 이전보다 긴밀해졌지만 한국이 별도로 이름을 가진 아세안 지역에 대한 정책을 마련한 것은 2017년 신남방정책이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신남방정책은 아세안 국가들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대통령의 정책 과제였던 만큼 한국 정부도 이에 많은 자원을 투입했으며 큰 성과를 남겼다.

현 정부에서도 이를 이어받아 KASI라는 아세안 정책을 발표했다. KASI는 신남방정책이 경제 및 사회문화 부문의 협력에 많이 치중했다는 평가를 바탕으로 안보 및 전략적 협력에 큰 강조점을 두었다. 구체적으로 국방 협력, 방산 협력, 그리고 해양안보 협력 부문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는 북태평양, 동남아, 오세아니아, 서남아, 아프리카 및 유럽까지 포함하는 인태 전략을 발표했다. KASI는 한국의 대 아세안 전략일 뿐만 아니라 한국 인태 전략의 하위 단위로 역할을 한다. 한국의 인태 전략은 거의 최초로 동북아를 넘어서 인태 지역 전반에 걸친 한국의 정책적 비전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전의 한국 대외정책과 차별성을 가진다. 신남방정책과 KASI는 이전 정부의 대 아세안 정책과 달리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을 한 단계 끌어올린 정책적 이니셔티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으며 이런 한국의 달라진 대 아세안 정책적 관심을 새로운 한-아세안 CSP를 통해 담아내려 하고 있다.

 

CSP 이행을 위한 행동계획과 고려 사항

 
CSP에 관한 합의와 큰 방향성을 담은 공동 선언은 이미 발표가 되었으니 이제 남은 과제는 이행을 위한 행동계획(PoA)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은 의장국인 말레이시아 주도로 2025년 한 해 PoA의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PoA는 정상들이 선언하는 공동 선언에 비해 덜 주목을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CSP를 구체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한국과 아세안 사이 구체적 협력 사업을 담은 PoA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CSP 관계를 명실상부하게 완성하는 것은 PoA, 그리고 PoA의 제대로 된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세안 협력에 연속성, 일관성을 담보하는 CSP와 PoA
 
무엇보다 PoA는 한-아세안 협력에 연속성과 일관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다. 다시 말해 정부의 변화에 따른 큰 대외정책 방향의 변화, 아세안에 대한 관심의 등락에도 불구하고 한-아세안 협력을 추동하는 보이지 않는 추진체라는 의미다. 특정 정부의 대 아세안 정책은 대개 그 정부에 국한되며 해당 정부에서 아세안과 협력에 있어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중심으로 협력 사업이 꾸려진다. 지난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현 정부의 KASI는 이런 특정한 정부의 정책이다. 물론 특정 정부의 정책 방향과 PoA가 시너지를 내는 것이 바람직하고 실제 협력 사업의 집행에 있어 시너지를 내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PoA는 일반적으로 정부를 넘어 한-아세안 협력의 구체 사항을 가이드 해왔다.

한국과 아세안 사이 협력을 위해 주목할 만한 PoA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2005년 제9차 한-아세안 정상회의 공동선언의 실행을 위한 행동계획이었다. 이 행동계획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를 범위로 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동시에 포함한다. 2010년 한-아세안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면서 이를 반영한 2011-2015년 행동계획이 만들어졌다. 이 역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걸치고 있다. 이를 뒤이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두 번째 행동계획은 2016년부터 2020년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포괄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과 아세안은 신남방정책을 반영해 2021년부터 2025년까지의 행동계획을 만들었다. 이 역시 문재인 정부의 임기를 넘어선다. 2025년에 만들어질 행동계획 역시 2030년까지를 포함할 것이며 다음 정부로 이어질 것이다.

 
PoA 구체화의 고려 사항
 
향후 5년간 한-아세안 협력을 구체화할 뿐만 아니라 다음 정부에서도 연속성을 담보하기 위한 행동계획을 만들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아세안이 일련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수립을 하면서 강조하는 원칙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세안은 모든 포괄적 동반자 관계가 “의미 있고, 내실 있으며, 상호 이익이 되는(meaningful, substantive, and mutually beneficial, MSMB)” 협력 관계라는 원칙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11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가 실질적인 효과와 성과를 내는 관계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행동계획의 협력 사업들이 어떻게 아세안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방향으로 PoA의 사업과 내용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세안이 강조하는 AOIP의 협력 분야인 해양 협력, 연계성, 그리고 인프라, 과학기술, 디지털, 고령화 사회 등의 주제를 포함하는 경제 및 기타 협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아세안 공동체 건설, 아세안 연계성 증진은 아세안의 최대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세안의 요구와 필요성이 적절히 반영된 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이 행동계획은 단순히 한국이 아세안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아세안 스스로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가 ‘상호 이익’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행동계획이 아세안에 이익이 되는 동시에 한국의 전략적 목표도 충족시켜야 한다. 상호 균형점을 잘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이 행동계획이 현 정부의 대 아세안 정책인 KASI, 그리고 더 나아가 인태 전략을 수행하고 목표를 실행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특히 인태 전략과 KASI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지역 해양의 평화와 안정(해양안보), 사이버 안보 등 디지털 부문의 협력, 그리고 그 외에 KASI가 강조하는 미래세대 협력 등의 부문을 행동계획에 적절히 반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인태전략, KASI, 그리고 한-아세안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의 협력이 한꺼번에 시너지를 내면서 추진될 수 있다.

세 번째로 이 행동계획을 통해 한국이 가진 아세안과 협력 의지에 대한 재확인이 필요하다. KASI에 대한 동남아 국가들의 확신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행동계획이 역할을 해야 한다. 현 정부 들어 인태전략, 그리고 인태 전략에서 북태평양 방면으로 규정된 미국 및 일본과 협력이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지난 정부 신남방정책에 비해 아세안 방면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이 줄어든 것이 아닌가라는 평가가 있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행동계획을 통해 이런 인식을 불식시키고 아세안 정책, 아세안과 협력에 대한 연속성을 강조해야 한다. 특정 정부에 따라서 정책이 강화 혹은 약화될 수도 있고, 방향이 수정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의 행동계획은 정부를 넘어 지속되며 이 행동계획이 한-아세안 협력의 연속성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아세안에 대한 관심이 일관된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주요 대화상대국 중 마지막으로 아세안과 CSP를 체결한 만큼 먼저 CSP를 형성한 국가들의 경험을 참고할 수 있다. 이들 국가 중 호주, 일본은 CSP 이후 새로운 PoA를 발표했고, 중국은 기존 PoA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CSP 이후 협력 사업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국은 다른 국가들의 PoA를 다각도로 분석해 장, 단점을 확인하고 이들의 단점 혹은 빈 공간을 파고드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이런 영역 중에서 한국이 강점을 가지고 있고, 아세안에서 한국의 강점이라고 하는 부분들 사이 교집합을 우선적인 협력 분야로 채택해야 할 것이다.

 

[부록 1] 한국과 아세안의 동반자 관계 현황

부록1

[부록 2] 아세안과 주요 대화상대국의 AOIP를 중심으로 한 협력 선언

부록2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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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이재현

지역연구센터 ; 출판홍보실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2012년까지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다. 현재 한국동남아학회 부회장, 해양경찰청의 자문위원이고,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최근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적 공간의 등장(2015), 북한과 동남아시아(2017), 신남방정책이 아세안에서 성공하려면(2018),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신남방정책의 역할(2018), 한국과 아세안의 전략적 공통분모와 신남방정책(2019), 비정형성과 비공식성의 아세안 의사결정(2019), 피벗: 미국 아시아전략의 미래 (2020, 역서), G-Zero 시대 글로벌, 지역 질서와 중견국(2020), “Southeast Asian Perspectives of the United States and China: A SWOT Analysis”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