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이슬람주의 계열 반군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 시리아해방기구)의 예상치 못한 기습 공세로 수도 다마스쿠스를 장악하고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후원국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시리아 세습 독재 정권이 극적으로 붕괴했다. 2011년에 시작된 시리아 내전에서 자국민을 화학무기로 무차별 공격했던 알아사드 정권은 러시아·이란·중국의 비호로 살아남았고 2023년에는 아랍연맹마저 ‘학살 정권’ 시리아를 다시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복귀를 시도하던 시리아는 후원국인 이란과 러시아의 군사 지원 약화, 독재 체제의 태생적인 취약함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이스라엘은 이란 혁명수비대와 ‘저항의 축’ 프록시 무장 조직에 대해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벌였고 전력이 급격히 약화된 이란은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할 여력을 잃었다. 러시아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시리아 정부군에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여기에 철권 통치의 불확실성과 내전으로 심화된 정권의 구조적 취약성 등 대내 요인도 작용했다. 알아사드 정권하의 부정부패와 불신 속에서 군부는 거짓 충성으로 불만을 숨겨왔다가 소규모 반군의 진격 앞에서 별다른 저항도 없이 투항했다.
새롭게 출범한 시리아 과도정부는 현재 안팎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25년 3월 HTS의 수장이었던 아흐메드 알샤라는 과도정부를 수립하며 소수계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민병대(SDF, 시리아민주군)를 포함한 다양한 무장 세력을 포용하며, 알아사드 정권의 과거를 청산해 ‘과도기적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도 천명했다. 국내 과제 외에도, 시리아 과도정부는 시리아 내 영향력을 둘러싼 주요 외세의 각축에 직면해 있다. 러시아와 이란은 알아사드 정권 시절 다져 놓은 전략적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 개입을 지속하고 있으며, 튀르키예는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계 민병대를 견제하고 자국 내 시리아 난민을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주도하는 시아파 초승달 네트워크의 확장을 차단하려 하며,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카타르는 아랍권의 정치적 목소리를 시리아 과도정부를 통해 투사하려 한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시리아의 안정을 통해 역내 불확실성을 줄이고, 무슬림 난민의 유입과 ISIS의 재확산을 방지하고자 한다. 이처럼 새로운 시리아를 둘러싸고 복잡하고 다양한 전략적 이해관계가 중첩되고 있다. 나아가 2025년 6월에 발발한 이스라엘-이란 무력 충돌은 시리아 내 긴장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공에서 이란 드론을 요격하고 군사 작전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 이란이 잔존한 친이란 민병대를 무장시켜 선동할 가능성에 대비해 시리아 과도정부는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새롭게 외교관계를 수립한 시리아에서 재건 사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우리 기업의 이익 창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시리아 과도정부가 요청하고 우리 정부도 호응한 바 있는 개발 경험 공유, 행정 시스템 설계, 전후 인도주의 지원에 보다 중점을 두는 접근이 바람직하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 이후, 중동에서 안전하고 민주적인 국가 재건에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시리아의 이행 과정은 국제사회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시리아 국민 다수는 알샤라 대통령을 지지하고 자유와 안보의 향상을 체감하는 반면, 절반 이상은 여전히 경제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냈다. 정치적 안정에 비해 경제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는 이행기 시리아에서, 한국이 효과적이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재건에 참여한다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동시에 역내 안정에 기여하고,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전략적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아사드 시리아 세습 독재 정권의 극적 몰락
2024년 12월 8일 이슬람주의 계열 반군 HTS가 진격 열흘 만에 수도 다마스쿠스를 장악하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후원국인 러시아로 급히 망명하면서 부자 세습 독재 정권이 54년 만에 막을 내렸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위임통치로부터 독립한 후 범아랍주의와 반제국주의를 내세운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이 결성됐고 1963년 바트당 소속 알라위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시아파 분파인 알라위파는 시리아 전체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소수 이슬람 종파다.1 1970년에는 국방장관인 하페즈 알아사드가 또 쿠데타를 일으켜 당을 장악했고 몇 달 뒤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바트당 일당 독재는 알아사드 1인 독재 체제로 전환됐다.
2000년에 30년간의 장기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가 사망하자 차남 바샤르가 대통령직을 이었다. 1994년 원래 세습 후계자였던 맏형 바실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예정에 없던 후계 자리에 오른 바샤르는 아버지가 다져놓은 독재 통치 메커니즘을 그대로 계승했다. 알아사드 세습 체제는 범종파 엘리트 지배 연합을 형성해 알아사드 가문이 속한 알라위파가 정보 보안 기구의 요직을 장악했고 나머지는 인구의 74%를 차지하는 수니파 출신 엘리트로 채웠다.2 2011년에는 알아사드 정권이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내전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군 고위 장성의 결정에 전적으로 기대고 이들의 자율권을 철저히 보장했으며 제4기갑사단, 공화국수비대, 정보국의 측근 엘리트는 충성 맹세로 화답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 중동의 대다수 국가가 수니파 반군을 지원했고 이란과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권을 밀었다. 그러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인 ISIS가 시리아 동부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쟁은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ISIS 간의 삼자 구도로 재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알아사드 정권은 ‘차악’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놓였다. 반군을 지원하던 여러 나라는 알아사드 정권의 축출이 아닌 ISIS 격퇴에 우선순위를 뒀고 그 틈을 타 알아사드 정권은 반군 공세 명목으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 이슬람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등 여러 분파로 분열된 채 통합된 지휘 체계조차 갖추지 못했던 시리아 반군의 사기는 사실상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알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HTS도 2011년 반정부 민주화 시위를 계기로 조직된 여러 반군 가운데 한 분파이다. 이어 미군이 ISIS 격퇴를 위해 알아사드 정권을 돕는 러시아군과 잠시 휴전을 선언하자 보복을 두려워한 시리아 반군은 대거 이탈했고 일부는 정부군으로 들어갔다.
결국 2018년 무렵부터 알아사드 정권은 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후 정상 국가 복귀를 선언했다. 당시 알아사드 정권은 전체 영토의 3분의 2 가량만을 통제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쿠르드계가 주축이 된 SDF와 반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알아사드 정권은 붕괴 직전까지 러시아와 이란 및 중국의 비호를 받아 국제사회에 당당히 복귀하던 중이었다. 시리아인권관측소에 따르면 알아사드 정권은 내전 기간 동안 자국 민간인을 상대로 210차례 이상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유엔은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응해 시리아 인권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유럽연합 이사회는 제재 명령을, 미국 대통령은 관련 행정명령을 각각 발동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해왔다.3 그러나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유엔 안보리가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 진상조사를 위해 12차례나 제출한 결의안에 대해 러시아는 매번, 중국은 여섯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란은 시리아 내전에 친이란 대리조직인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까지 투입하며 알아사드 정부군을 도왔다. 러시아는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습으로 시리아 정부군에 화력을 지원했다.
아랍연맹은 알아사드 정부군이 내전에서 승기를 잡자 2023년 ‘학살 정권’ 시리아를 연맹 회원으로 12년 만에 다시 받아들였다. 아랍국들은 시리아가 이란에 지나치게 종속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게다가 바샤르 알아사드의 동생 마헤르가 정권의 자금 조달을 위해 캡타곤 마약을 대량 생산 밀매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에는 캡타곤 중독자의 급증에 따른 사회문제가 심각했다. 이러한 사회적 위협에 대응하고자 결국 2024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걸프 산유국은 시리아에 자국 대사들을 파견해 외교적 관여를 본격화했다. 이처럼 아랍연맹을 상대로 몸값을 높이던 알아사드 정권은 화려하게 귀환하고 있었다.
그러던 알아사드 정권이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붕괴했다. 2024년 11월 말 전열을 재정비한 HTS는 수도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거점을 출발해 12월 초 다마스쿠스를 장악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한 채 투항했으며 ‘다마스쿠스의 도살자’ 바샤르 알아사드는 러시아로 도주했다.
시리아 세습 독재 몰락의 원인: 후원국의 군사 지원 약화와 철권 체제의 불가측성
이란과 러시아의 군사 지원 약화와 전략적 후퇴
알아사드 정권의 몰락에는 대외 변수가 결정적으로 작동했다. 견고해 보이던 알아사드 정권이 순식간에 무너진 계기에는 헤즈볼라와 하마스 등 이란 무장 프록시 조직의 와해와 이란의 전략적 후퇴라는 예상치 못한 중동 정세의 급변이 있었다. 2023년 10월 친이란 대리조직인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아랍과 이스라엘의 데탕트 움직임에 따라 궁지에 몰린 하마스가 그 흐름을 뒤엎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제2의 독립전쟁’을 선포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1년간 지상전을 벌인 뒤 2024년 9월 중동의 역학 구도를 뒤흔들 ‘새로운 질서’ 작전에 돌입했다. 이스라엘은 이란과 프록시 조직의 연대인 ‘저항의 축’ 세력을 약화시키고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지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군사 시설과 프록시의 무기고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특히 헤즈볼라 지휘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실시한 결과 이란의 최대 프록시 조직인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제거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질서’ 작전 실시 열흘 전에는 전초전 성격으로서 레바논과 시리아 전역에서 헤즈볼라가 사용하는 무선 호출기와 휴대용 무전기를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시킨 비밀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통신기기 폭파 작전으로 헤즈볼라 조직원 40여 명이 죽고 3,500여 명이 다쳤으며 조직 통신 체계가 마비되고 내부 혼란이 고조됐다. 같은 해 7월에는 하마스 정치국 수장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스라엘의 비밀작전으로 이란 테헤란의 군사 게스트하우스에서 암살된 바 있다.4
그림 1. 알아사드 정권의 붕괴 직전 정부군·HTS·SDF의 거점지역
출처: Al Jazeera
결국 HTS가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할 때 이란은 알아사드 정권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이스라엘이 군사 작전을 펼치면서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뒷배 역할을 해온 이란 혁명수비대의 군사 기지와 지도부 역시 타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발이 묶인 러시아도 영향력이 분산되면서 반군의 진격 앞에 무기력했다. 당시 시리아 정부군은 다마스쿠스를 비롯해 중부와 서부 주요 도시를 포함한 전체 영토의 60~65%를 통제하고 있었다.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 지원으로 2010년대 말부터 거점지를 회복한 결과였다. 반면 그림 1에서 보듯이 HTS와 기타 이슬람주의 계열 반군은 이들립과 아프린 등 북서부에서 전체 영토의 5~10%만을 점유해 튀르키예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한편 SDF로 대표되는 쿠르드계 민병대는 락까와 데이르에조르 등의 북동부에서 영토의 25%를 확보해 자치구역을 꾸려왔다. SDF 내의 YPG(인민수비대)는 미국 주도의 반ISIS 국제연합전선에서 핵심 지상군으로 활약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튀르키예가 YPG를 자국 내 분리주의 테러조직인 쿠르드 노동자당(PKK)의 연계조직이라며 반발하자 국제연합전선은 기독교계와 투르크멘계까지 폭넓게 포함하는 SDF를 정치적인 연합체로 재조직해 지원했다. 나머지 일부 고립된 영토는 ISIS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처럼 영토의 10%도 장악하지 못하던 HTS는 알아사드 정권의 후원국들이 약화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정부군은 부정부패로 인한 사기 저하, 이란 혁명수비대와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입은 피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여력 부족으로 인해 정권을 방어하지 못했다. 친이란 성향의 하마스가 감행한 기습 도발이 결국 같은 축에 있는 알아사드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중동판 나비효과’라 할 수 있다.
철권 체제의 불가측성과 내전으로 심화된 구조적 취약성
시리아 세습 독재 정권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가져온 대내적 원인은 독재 정권의 체제 특성에 있다. 독재 체제는 겉으로는 평온한 정치 상황을 유지하는 듯 보이다가 별다른 전조 없이 한순간 극적으로 무너지는 특징을 지닌다. 억압과 감시, 통제 장치로 체제를 유지하려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정확한 여론이 형성될 수 없고 따라서 정치적 폭발을 사전에 감지하기도 어렵다. 체제 몰락의 예고 신호를 읽기 힘들게 만든 바로 그 통제 장치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붕괴의 불가측성을 키우는 셈이다.
따라서 사회 내부의 불만이 임계점에 가까워져도 독재자와 정권 엘리트, 일반 시민 모두 그 징후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 정권 엘리트는 거짓 충성 경쟁에 몰두하고 시민들은 공포 정치 아래서 폭발 직전의 불만을 철저히 감추며 불안한 심리를 끊임없이 저울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안정한 협력과 억제된 균형은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쏠림, 즉 티핑포인트를 맞기 전까지는 평시처럼 유지되는 듯 보인다.5 바로 이 지점에 이르기 직전까지 알아사드 대통령과 측근 엘리트, 군부와 강압기구, 반군, 주변국 정보기관들조차도 시리아의 장기 세습 독재정권이 소규모 반군의 진격 앞에서 바로 무너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독재의 몰락은 매우 극적이어서 세상을 놀라게 하지만 이미 체제 내에서 독재 붕괴의 조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다만 독재 체제하에 만연한 부패와 불신 속에서 모두가 상대를 오해하면서 정권 몰락의 전조 현상은 무시됐다. 2024년 12월 알아사드 정권의 붕괴 당시 정부군의 대규모 탈영과 급속한 와해는 오랜 기간 누적된 부정부패와 정권에 대한 불신 및 구조적 무능이 한꺼번에 드러난 결과였다. 다마스쿠스 남부를 담당하던 제4기갑사단은 알아사드 정권의 핵심 친위 부대였지만 HTS가 다마스쿠스 외곽까지 진격하자 지휘관들이 가장 먼저 도주했고 장병 다수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탈영하거나 투항했다. 지방에 주둔하던 지휘관들 역시 HTS 측과 항복 조건을 타진하기에 급급했고 사병들 또한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며 전열이 무너졌다.6
이러한 결과는 많은 독재 정권의 몰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알아사드 정권 붕괴 직전의 상황은 독재 체제가 내부 압박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 불안정한 단계이지만 독재자와 측근 엘리트는 인위적으로 유지된 안정성과 현실의 구조적 취약성을 구분하지 못한다. 독재 정권을 뒤흔드는 계기가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으나 일단 균열이 생기고 충격이 가해지면 그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며, 결국 체제 붕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알아사드 정권의 강압기구는 왜 별다른 저항 없이 한순간에 정권 수호의 임무를 포기해버렸고 HTS는 너무도 빠르고 쉽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바샤르 알아사드는 핵심 강압기구 엘리트에 자율권을 부여해 국지적 충성심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자원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전체 엘리트 통합 구조는 오히려 약화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14년여 내전을 겪으며 정권 엘리트 간 통합력이 점차 약화되었고 이는 알아사드 세습 독재 체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심화시켰다.
이슬람주의 과도정부의 출범과 대내외 도전: 포용적 시스템 구축과 외부의 영향력 경쟁
포용적 시스템 구축과 경제 재건
2025년 1월 HTS의 수장이었던 아흐메트 알샤라는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대통령직에 올랐다. 알샤라 대통령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알카에다에 합류했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돼 5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자 알카에다 연계조직으로 창설된 알누스라 전선의 사령관으로 취임했으나 2016년 실용노선으로 전환해 알카에다와 결별하면서 조직의 이름을 HTS로 바꿨다. 알샤라 대통령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재건하고, 세습 독재체제 아래서 붕괴된 제도를 복구하며, 새 헌법을 마련해 공식 선거를 실시하기까지 최대 4년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 기간 동안 임시 입법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부처를 직접 감독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시리아 과도정부를 둘러싼 우려는 다양하다. 과거 알카에다 출신의 알샤라와 그의 측근이 시리아 내 소수 민족과 종파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시스템을 과연 구축할 수 있을지, SDF를 포함한 다양한 무장 세력과의 갈등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어떻게 회복시킬지, 알아사드 정권이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과도기적 정의’를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지가 핵심 과제이다.
2025년 3월 알샤라 대통령은 강력한 중앙정부 체제를 기초로 한 과도기 헌법과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다. 내각 구성원 23명 가운데 주요 요직은 대부분 HTS 출신이 차지했지만 알라위파·기독교도·쿠르드계·드루즈계 등 소수계 출신 기술관료, 시민단체 지도자, 알아사드 정권 시절 장관들도 포함됐다. 단, 투르크멘계와 이스마일파 출신은 등용되지 않았고, 여성 장관은 단 한 명뿐이다. 또한 알샤라 대통령은 같은 달 마즐룸 압디 SDF 사령관과 협정을 맺어 쿠르드계가 주축인 SDF를 새로 출범한 시리아군에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시리아 과도정부는 구 정권 세력에 대한 복수를 자제하고 포용적인 시스템을 수립하는 동시에 치안 확보에 나서면서 정당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또한 히잡 착용 강제 완화와 걸프 산유국과의 외교 확대를 통해 서방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고 있다. 4월 『이코노미스트』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리아 국민의 81%가 알샤라 대통령을 지지하고 80%가 이전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끼며, 70%는 국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반면, 경제 상황에 대해선 58%가 정체 또는 악화를 지적했고, 안보는 66%가 개선되었다고 응답했다.7
시리아 과도정부가 포용적인 정치 시스템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성공의 핵심은 경제 재건에 있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유럽 국가의 제재 해제가 결정적이다. 시리아에 대한 국제 제재는 알아사드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와 인권 탄압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고 알샤라 대통령이 속한 HTS에 대한 제재도 포함된다. 특히 미국은 ‘시저법(Caesar Act)’을 통해 알아사드 정권, 후원국인 러시아와 이란, 알아사드 정권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까지 제재 대상으로 삼았고, HTS를 알카에다 계열로 간주해 테러리스트로 제재하고 있다. 알샤라 과도정부에 대한 제재 해제 논의가 여전히 진행되는 가운데 유럽연합은 2025년 1월 외교장관 회의에서 대시리아 제재 완화를 위한 단계적 로드맵에 공식 합의했고 5월에는 시리아 재건 지원을 위해 대부분의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법적 조치를 채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같은 달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중 대시리아 제재 해제를 발표했고 미 국무부는 시저법에 따른 제재를 180일간 유예하는 조치를 취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 해제 발표와 알샤라 대통령과의 깜짝 회동에는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럼에도 시리아에 대한 안보와 인권 문제 관련 제재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 알샤라 과도정부는 알아사드 정권이 저지른 국가 폭력에 대한 진상 규명, 피해자 보상, 사회적 화해 실현이라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외부의 영향력 각축전
국내 과제에 더해, 시리아 과도정부는 시리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란, 러시아, 튀르키예, 이스라엘, 걸프 산유국, 미국, 유럽 등 주요 외세의 각축에 직면해 있다. 알아사드 정권의 몰락은 후원국 러시아와 이란에 전략적 타격이다. 러시아는 타르투스 해군 기지 임대권은 유지하고 있으나 라타키아 공군 기지에서는 군사 장비와 병력을 철수하면서 중동 내 거점이 약화됐다. 이란도 이란 혁명 수비대 주둔 인력과 친이란 민병대를 대거 철수했고 이란-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초승달 군사 네트워크의 연결 고리가 차단됐다. 하지만 러시아와 이란은 오랜 기간 형성해 두었던 영향력을 놓치기 않기 위해 과도정부와 협상을 시도하고 민병대와 종교 채널을 유지 가동하고 있다.8
한편 튀르키예는 알샤라 대통령과 HTS를 반군 시절부터 후원해왔고 과도정부의 중앙집권체제와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 배경에는 튀르키예와 국경을 접하는 북동부에서 쿠르드 자치구역을 꾸리며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는 SDF를 통제하기 위해서다. 튀르키예가 테러조직이라고 주장하는 SDF의 군사조직인 YPG는 시리아 주둔 미군 900명과 함께 ISIS 잔존 세력을 감시하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는 자국 내 시리아 난민 310만여 명을 본국으로 송환하고자 한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나라로 이미 20만여 명은 튀르키예 국적을 얻었고 40만여 명은 2024년 12월 알아사드 정권의 붕괴 직후 시리아로 돌아갔다. 경제 악화로 민심이 흔들릴 때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시리아 난민 송환을 유권자에게 반복적으로 약속해왔다.
역시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는 이스라엘은 알아사드 정권의 몰락을 이란과 ‘저항의 축’ 프록시 연대를 약화시킬 전략적 기회로 보고 시리아 남부의 군사 인프라를 파괴하는 동시에 자국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와 달리 소수계가 자치권을 갖는 연방제를 새로운 시리아의 정치체제로 주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공통의 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시리아내 드루즈계·쿠르드계와 접점을 가지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전 불개입 원칙을 강조하며 튀르키예와는 이란이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다시 행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닌다.
그림 2. 시리아를 둘러싼 외부세력의 각축전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카타르는 시리아 과도정부에 경제지원을 통해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하고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이 아닌 아랍권의 목소리를 투사하려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2025년 4월 시리아가 세계은행에 체납한 약 1,500만 달러의 부채를 공동으로 상환했고 시리아 공무원 급여 지불을 위한 3개월간 공동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아랍에미리트도 두바이 모델을 통한 재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알샤라 대통령 역시 2025년 2월 자신의 멘토인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아닌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첫 해외 순방 회담을 갖고 경제 협력 방안을 논의한 후에 튀르키예로 향했고 이어 4월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를 순차적으로 방문했다.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시리아 내 군사적 긴장도 급격히 고조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알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대공 방어 체계가 사실상 무력화된 시리아 영공에서 이란 드론을 요격하고, 전투기에 공중 급유를 실시하는 등 군사 작전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반복적인 폭격과 낙탄으로 농경지와 주요 인프라가 파괴되고, 민간인 피해가 누적되면서 시리아 과도정부의 통제력 역시 약화되고 있다. 또 이란이 이스라엘에 맞서 시리아 내 잔존한 친이란 민병대를 무장시켜 대리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는 과도정부의 안보 통제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9
나가며: 한국·시리아 수교 이후 한국의 재건 기여 방안
2025년 4월 10일, 한국은 193개 유엔 회원국 중 마지막 미수교국이던 시리아와 수교를 맺었다. 2024년 2월 한국은 북한과만 수교해 온 쿠바와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번에 시리아와 수교에 성공하면서 북한을 제외한 모든 유엔 회원국과 수교하는 기록을 세웠다. 시리아 과도정부는 새롭게 외교관계를 수립한 한국의 경제성장 비결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실무 대표단 파견을 희망했다고 전해졌다. 우리 정부 역시 개발경험 공유, 인도적 지원, 경제 재건 등 3대 분야 협력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10 현재 시리아는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래 전국 인프라가 광범위하게 파손됐고 경제 85%가 위축되었다. 재건에 드는 비용은 2,500억 달러에서 4,000억 달러 사이로 추산된다. 시리아인의 90%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는 670만여 명은 본국으로 돌아오길 희망한다.11
한국은 여러 개발도상국과 중동 각국에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성공적인 롤 모델로 여겨진다. 특히 중동 이슬람 세계에서는 가족, 사회 등 전통가치를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아시아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발전시켜 시민의 삶이 전반적으로 균등하게 향상된 한국에 큰 공감대를 느낀다. 5월 유럽연합과 미국이 대시리아 제재 해제를 결단하면서 한국 역시 시리아 재건 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우리 기업의 진출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5년 3월 출범한 이래 시리아 과도정부가 민주적이고 포용적인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이에 대한 시민들과 주변국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특히 중동에서는 장기 독재의 갑작스러운 붕괴 이후 안전하고 민주적인 국가로의 재건 성공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시리아의 이행 과정은 국제사회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을 겪은 나라 대부분이 민주화 안착에 실패하고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로의 회귀나 내전을 겪었다. 독재 몰락 이후 국가 재건의 성패는 새로 권력을 잡은 세력과 옛 정권의 강압기구가 어떻게 갈등을 조정하고 제도적 협약을 이끌어내는지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시리아 과도정부는 지금까지 비교적 과거의 교훈을 따르며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시리아 과도정부의 경제 재건 프로젝트에 기여한다면, 시리아의 국가 재건을 가속화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이 대 시리아 제재를 완화하고,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카타르가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은 물론 이란과 러시아까지도 현재로서는 시리아의 안정을 공통의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한국의 참여는 국제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재건 사업을 통한 우리 기업의 이익 창출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시리아 과도정부가 요청하고 우리 정부도 화답한 바 있는 개발 경험 공유, 행정 시스템 설계, 전후 인도주의 지원에 보다 중심을 두는 접근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편 알아사드의 세습 독재 정권이 외부 요인에 의해 붕괴했다는 점은 북한 정권의 급변 사태 가능성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가 알아사드 정권의 최대 후원국이었던 것처럼 김정은 정권도 2025년 6월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를 체결하며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까지 포함시켜 러시아에 사실상 정권의 운명을 걸었다. 이에 더해 김정은 정권과 알아사드 정권은 김일성 시대부터 우호 관계를 이어왔고, 1990년대에는 대량살상무기를 공동 개발했으며, 2010년대에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러 각각 유엔 인권조사위원회가 구성될 만큼 국제사회에서 나란히 악명을 떨쳤다는 공통점도 있다. 고립주의와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외부와의 교류를 극도로 제한해온 북한 정권은 최근 들어 러시아와의 밀착을 통해 대외관계에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북·러 군사동맹을 생존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은 북한은 트럼프 2기 행정부하에서 급변하는 미·러 및 미·이란 관계를 예의주시하며, 앞으로의 정세 변화에 한층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북한 정권 역시 외부 변수에 의해 급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한국은 시리아 사례를 교훈 삼아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한 입체적인 전략을 대비해야 한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전체 인구의 87%는 무슬림이며, 이 중 수니파가 74%, 시아파 분파인 알라위파가 11%, 이스마일파와 열두이맘파가 각각 1%를 차지한다. 기독교도는 전체 인구의 10%, 드루즈계는 3%에 해당한다
- 2. 장지향·유아름. “시리아 세습독재 정권의 생존과 다종파 엘리트 연합의 역할.” 『아산이슈브리프』. 2019-18.
- 3. Syrian Network for Human Rights. Summary of the Assad Regime’s Crimes Against the Syrian People Over the Last 14 Years. December 20, 2024.
- 4. Souad Mekhennet and Joby Warrick. “Mossad’s pager operation: Inside Israel’s penetration of Hezbollah.” The Washington Post. October 5, 2024; Dan Sabbagh. “Deep intelligence penetration enabled Israel to kill Hassan Nasrallah.” The Guardian. September 30, 2024.
- 5. 장지향. 『최소한의 중동 수업』. 서울: 시공사. 2023.
- 6. Maya Gebeily, Suleiman Al-Khalidi, Ahmed Rasheed and Timour Azhari. “How Assad’s army collapsed in Syria: demoralised conscripts, absent allies.” Reuters. December 13, 2024.
- 7. 2025년 4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시리아 전역의 다양한 종파와 지역을 대표하는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알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포괄적인 여론조사로, 종파 및 지역별로는 낙관 수준에 차이가 있으나 알샤라 과도정부에 대한 시리아 국민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보여준다. “Syrians are still surprisingly upbeat.” The Economist. April 2, 2025; Nicolas Pelham, “The great pretender: how Ahmed al-Sharaa won Syria.” The Economist. March 5, 2025.
- 8. Omar Albam. “Militants kill 2 soldiers in attack on Russian air base in Syria.” AP News. May 22, 2025; Nicole Grajewski. “Why Did Iran Allow Bashar al-Assad’s Downfall?”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December 9, 2024; Mark N. Katz. “Will Russia be able to keep its bases in Syria?.” Atlantic Council. December 18, 2024; Aila Slisco. “Iran Evacuating Military in Syria as Rebels Advance.” Newsweek. December 6, 2024.
- 9. Syrian Observatory for Human Rights. “Syria turns into arena for ongoing Iranian-Israeli escalation, where 28 drones shot down over several parts of Syria.” Syrian Observatory Reports. June 14-15, 2025.
- 10. “한-시리아 외교관계 수립.” 『외교부 보도자료』. 2025. 4. 11.
- 11. Joseph Daher. “Three Requisites for Syria’s Reconstruction Process.”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May 8,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