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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 30일 휴전 등 중재하며
국제사회 존재감 높이는 한편
美에 6천억달러 투자 보따리
이스라엘과 국교 수립도 검토
국익 극대화가 외교전략 핵심
 
요즘 사우디아라비아가 국제적 중재자로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지난 3월 무함마드 빈살만(MbS) 사우디 왕세자는 우크라이나·러시아·미국 대표단을 자국에 초청해 일련의 회담을 주최했고, 30일 휴전안을 끌어냈다. 비록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지는 않았으나 왕세자는 리야드와 제다를 오가며 활발한 중재 외교를 펼쳤다. MbS 왕세자는 ‘긍정적 중립성’이라는 새로운 외교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미국과 이란 사이를 중재하겠다고도 밝혔다.

사우디에 화려한 중재 무대를 마련해준 이는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최근 미국은 사우디를 투자와 안보의 핵심 파트너로 띄우며 알뜰살뜰 챙긴다. 그 중심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MbS 왕세자가 있다. 올 1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이틀 뒤 사우디 왕세자는 60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실제 집행 여부를 떠나 전략적이고 빠른 정치적 승부수였다. 이에 화답하듯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첫 해외 순방지로 사우디를 낙점하면서 사우디에 투자액을 1조달러까지 늘려달라고 했다. 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현대차의 210억달러 미국 투자와 비교하면 그 압도적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트럼프 1기의 중동 정책이 이스라엘 지위 강화와 이란 압박에 치중하는 단선적 전략이었다면, 2기 기조는 철저히 자국 경제 중심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상대로 대미 투자를 압박하며 자국 제조업 부흥과 일자리 창출 및 에너지 패권 확보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우디의 트럼프 2기 맞이 투자 약속이 곧 미국 바라기만을 뜻하진 않는다. 사우디는 미·중 경쟁과 이스라엘·이란 대립이라는 복잡한 구도 속에서 자국의 레버리지 극대화를 위한 셈법에 몰두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스라엘과의 협력은 여전히 사우디 외교 전략의 핵심 축이다. 정권의 사활을 걸고 국가 개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사우디는 이란의 군사 모험주의와 미국의 탈중동 정책을 중대한 안보 리스크로 인식한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사우디에 실존적 위협인 반면, 이스라엘이 보유한 최첨단 기술은 사우디의 경제 혁신을 돕고 탈중동하는 미국의 안보 공백을 메울 자산으로 판단된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전개한 ‘새로운 질서’ 작전으로 하마스와 헤즈볼라 등 이란의 프록시 무장 조직이 와해되고 이란혁명수비대도 큰 타격을 입자 사우디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사우디는 이란에 직접 맞서지 않는 동시에 중국을 적대시하거나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노선도 피하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이란을 군사적으로 압박할 때마다 이란은 예멘의 프록시인 후티반군을 이용해 사우디 석유 시설을 보복 공격하며 화풀이를 해왔다. 이에 사우디는 미국에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세 자제를 직접 요청할 정도였다.

사우디는 이란의 군사적 적대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한편 미국이 적극 중재해온 이스라엘과의 국교 수립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 대가로 미국에 철통같은 방위 공약과 민간 핵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며 협상 과정에서는 중국이 제안한 군사·핵기술 협력 가능성까지 카드로 활용 중이다. 그럼에도 사우디는 기술적 우위와 신뢰성 면에서 미국을 선호하며 예멘 후티반군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스라엘·아랍 통합 방위망을 적극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우디의 생존 셈법이 가능한 것은 저유가 시대에도 아직은 버틸 만한 오일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시간은 지금의 사우디 편이 아니라는 걸 왕세자와 왕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 본 글은 5월 7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About Experts

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자 지역연구센터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 법무부, 국방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주의와 독재,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대표 저서로 중동정치를 비교분석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 (Palgrave Macmillan 2013), 논문으로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정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전망” (아산이슈브리프 2022),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