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인류의 오랜 열망이자 국제관계의 대표적 화두지만, 동시에 평화만큼 오남용이 쉬운 단어도 없다. 많은 국가가 자신들의 침략이나 강압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평화 개념을 악용하면서 자의적인 평화의 전제조건을 제시해 왔다.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키이우정권에 의해 자행된 모욕과 대량학살에 직면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라고 말하며 ‘특별 군사작전’을 시행했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포기한 것은 우크라이나라고 주장했다. 최근의 이스라엘·이란 전쟁에서도 양측은 서로에게 평화 파괴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이들에게 평화는 상대가 자신에게 굴종하거나 공격적 군사 활동을 용인할 때 가능하다.
남북한 관계에서도 평화 개념의 괴리 문제는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2023년 말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괴뢰들의 흉악한 야망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우리의 대북 관여정책 자체를 비판했는데, 이는 북한의 변화를 지향한다면 대북 유화책이든 강경책이든 가리지 않고 적대시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즉 북한의 평화 개념에 따르면 한반도 평화는 남북한 공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북한 정권이나 체제의 변화를 포기하고 ‘자위적 핵억제력’을 건설하는 평양의 우위를 인정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2023년 말 이후 남북한 관계의 물리적·심리적 단절이 가속화되고, 정치·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한반도 안정과 평화에 대한 갈증이 커지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 간 소음방송과 대북 확성기 방송의 중지를 계기로 갈등 해소의 기반이 마련된 만큼 이제 대화 복원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간 조치들도 시도해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 원론적 측면에서는 맞는다. 그런데 그 당위성이 상대방의 자의적이고 무리한 요구까지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반도 평화는 분명 추구하고 달성해야 할 이상이지만 우리와 상대방이 추구하는 평화가 서로 다른 모습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를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는 대응도 필요하다. 이는 한반도 평화에 앞서 달성해야 할 우리 사회 내 평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과정이다. 국가안보와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함께 추구하고, 안보에 대한 정부의 판단 이상으로 국민 개개인의 심리적 안정감을 중시하는 현대의 추세를 고려할 때, 평화 역시 특정인이나 일부의 주장보다 사회적 합의가 우선시돼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민간인 사망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만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1000만명 이상이 거주지를 잃고 떠돌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스라엘·이란 전쟁에서 대량살상과 파괴에 시달린 민간인들 역시 양측 전투원 손실에 못지않다. 평화가 파괴되면 가장 취약하게 노출될 잠재적 피해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평화 개념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북한의 주장은 무조건 배격해야 하고, 평양을 더 강경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인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 대 안보’류의 이분법적 논쟁이나 각종 수식어를 붙인 평화 개념의 남용이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더욱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왜곡된 평화관을 먼저 바로잡아야 하고, 이것이 없는 공허한 평화의 외침은 오히려 갈등의 단초와 상대방에게 도발의 유혹만을 제공한다는 것이 오늘날 각종 국제분쟁의 교훈이다.
* 본 글은 6월 23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