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COVID-19 위협 속에 휩싸여 있다. COVID-19 문제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 머지않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다.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심각한 위협은 북한 핵이다. 1992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가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1 시작된 북핵 문제는 지난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6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북한의 핵 능력은 고도화되었고, 북한판 이스칸데르(Iskander, 러시아 단거리전술탄도미사일), 북한판 에이태킴스(ATACMS, 미국 전술지대지미사일), 신형 초대형방사포,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신형 전략무기 개발로 인해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북한 핵위협이 없다면 한국도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살아가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핵 위협에 직면해 있고, 북핵 문제는 강 건너 불이 아닌 우리 발등의 불이다. 우리의 독자적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가치로 하는 동맹과 우방국들의 관심과 협력, 국제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인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의 지원, 중국, 러시아, 일본 같은 주변국들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그러나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과 러시아는 공개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고, 북중러 북방3각 관계는 긴밀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수년간 경제는 물론 안보 분야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미국과 중국의 일방주의는 북핵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자유민주주의 동맹의 균열과 동반자의 퇴색을 가져와서 국제사회의 혼돈을 심화했다.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기존 질서가 붕괴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의 경찰국가로서 규범과 질서를 만들고 지켜왔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그런 미국의 지위와 역할을 포기하고 국제규범을 무시하는 일방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중국 중심의 세상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몽”을 표방하는 시진핑(Xi Jinping) 주석 시대의 중국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여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중국만이 아니다. 러시아나 프랑스 같은 주요 국가들도 철저한 국익 계산하에 이합집산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취했다. 이런 강대국들의 일방주의는 국제사회의 혼돈과 불안을 심화시킬 것인데, UN과 같은 국제기구가 제대로 작동하고 역할을 수행한다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핵 문제와 리비아 사태를 통해 UN은 무능력함과 형해화된 모습을 보여주어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림 1. 북한판 이스칸데르
출처: Reuters.
새로이 출범할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 시대의 일방주의를 탈피하여 동맹을 복구하고 어떻게 얼마만큼의 의지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지도 아직은 분명치 않다. 오바마 정부 시절의 전략적 인내가 반복될지, 아니면 북한이 요구하는 군축협상을 통해 북한을 핵 국가로 인정하고 잠정적으로 문제를 봉합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북핵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동맹인 미국과의 공조, 일본을 비롯한 중국, 러시아의 협력도 필요하고, UN의 지지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그리고 예상되는 국제정세는 각국이 평화와 안전, 국제법의 준수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철저한 개별 국가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국제기구는 형해화되었으며, 국제규범과 질서는 파괴되고 있는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이 균열하여, 이러한 혼돈의 세계는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혼돈의 국제질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데 전력해야 하는 것이 2021년 우리의 현실이다.
■ 2020년 평가
‘COVID-19’와 미중 전략경쟁으로 인한 혼란
2020년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익숙함과 생경함을 동시에 지닌 것이었다. 미중 간 무역분쟁 그리고 그 배후에 존재한 전략경쟁은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어 온 것이었지만, 2020년에는 또 다른 양상을 띠고 진행되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전략적 경쟁자를 넘어 자신들의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과 도전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상호의존 속에서의 견제라는 불문율을 허물 수도 있음을 시사하였다. 미중 간 경쟁의 와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5월 “중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We could cut off the whole relationship)”2 고 말한 것은 충동적인 트럼프 행정부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이었다.
그림 2. 미중 전략경쟁의 최전선 남중국해
출처: CSIS.
이제 미중은 ‘하나의 세계’가 아닌, 상황과 경쟁영역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따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019년 ‘화웨이’ 기술과 운영체제의 배제를 다른 국가들에게도 요구하고 나섰던 미국은 2020년 들어 ‘틱톡’과 ‘위챗’ 등 중국과 관련된 SNS 애플리케이션을 미국 시장에서 퇴출시키고자 했다. 당장 물리적인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상공간(virtual world)과 과학기술 영역에서는 중국에 대한 벽을 쌓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미중 간의 경쟁은 이제 단순한 양국의 차원을 넘어 세계질서 전체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림 3. 미국의 제재 대상 화웨이
출처: 연합뉴스.
물론, 미중 전략경쟁이 2020년 세계정세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른 국가들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하지는 않았으며, 이들은 미중 전략경쟁의 틈새에서 세계 혹은 지역적 차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행보를 가시화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의 행보로, 러시아는 비자유주의적인 가치의 표방 면에서 중국 못지않은 미국의 대항마로 부상하였고 이는 주로 중동과 근외(near abroad)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터키 역시 이슬람적 가치를 기치에 내걸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체제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었으며, 이는 중근동의 지전략적 지형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이었다. 중동 지역 국가들 역시 이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종래의 종교 지도나 정책 방향을 벗어난 새로운 합종연횡(合從連橫)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 국가들의 경우 미중 경쟁과는 별도로 사안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구도를 나타내었다.
‘COVID-19’ 변수는 이러한 2020년 세계의 특성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킨 요인이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현상들은 대부분 이 신종 감염병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COVID-19는 그 이전까지는 어렴풋한 윤곽만을 보여주던 국제질서 재편의 모습에 가시성을 더해준 일종의 시약(試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2020년 2월 COVID-19가 더 이상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을 때 미국과 중국이 보여준 반응은 기존의 세계화·정보화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양국은 감염병 확산과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거나 치료제·백신 개발 등에 있어 협력하기보다는 서로의 방식에 따라 대응했다. 특히, 3월에 들어 세계 전체가 몸살을 앓게 되는 상황이 되자, 감염병 확산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기 시작했다. 특정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체제 자체가 타국에 감염병 위험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라는 논란이 벌어졌으며, 이는 전략경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촉매제가 되기도 하였다. 여타 주요 국가들은 미중 상호 비난의 와중에서 각자의 감염병 차단에 더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경제·사회적 공동체의 단계에 들어선 EU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와 같은 국제기구들은 세계적 공동대응의 연계 메커니즘 혹은 중심체로서의 신뢰성에 상처를 입었으며, 향후 그러한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까지 회의감도 받게 되었다.
그림 4. COVID-19 백신 접종
출처: Reuters.
신뢰성 있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된다고 해도 이제 세계가 COVID-19 이전으로 돌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감염병과 관련해서는 미국과 중국 어느 누구도 세계적인 의제 창출자가 되기 힘들며, 다른 국가들의 모범 사례(best practice)로 받아들여질 만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단순한 감염병 대응을 넘어 다른 영역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 각자가 추구하는 세계가 기존에 비해 더 안전하고 풍요로울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기존의 레짐이나 국제기구 역시 권위와 동력이 약화된 상태이고, 여타 국가들을 결집할 대의나 목표 역시 뚜렷하지 않다. 더 이상 기존의 질서로는 세계적인 발전이나 안전을 도모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안적 질서는 어느 것 하나 확신을 주지 못하는 상태로 2020년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국제적 레짐과 국제기구의 신뢰성 약화는 감염병 이슈와 WHO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2020년 중 UN은 해양자원 확보를 위해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 경계 획정을 둘러싼 그리스-터키 해양분쟁3, 아르메니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독립을 둘러싼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에4 대한 분쟁 해결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그림 5. 그리스-터키 해양분쟁과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
북한 핵문제와 무기력한 UN
혼돈의 세계에서 실낱같은 희망이 될 수 있는 UN은 북핵 문제 해결에 필요한 대북제재의 도입과 이행에 있어서 무기력함을 보였다.
북한 핵문제는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악화되었고, 북한의 핵 능력은 날로 고도화되었다. 북한 핵문제는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PT) 밖에서 핵무기를 개발했던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 국가들은 NPT 회원국은 아니지만 NPT의 기본원칙과 목적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핵확산을 하지 않겠다는 점을 공언하고 있다. 이들 국가와는 달리 북한은 NPT 회원국이면서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비확산 의무를 저버리고 비밀리에 핵을 개발한 유일한 사례로서, 국제 비확산 체제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도전이었다. 북한은 헌법과 노동당 강령에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명시하였고, 핵 국가 지위를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현재 40~60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핵물질을 생산하고 수출하여 동북아를 넘어 중동 등과 같은 지역에서의 안보에 큰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핵 도미노 현상도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가진 면담에서 북한이 비핵화하지 않으면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 등은 1년 안에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북한이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처음 선언하였을 때, 북한은 탈퇴 의사가 있을 경우 3개월 전 모든 NPT 조약당사국과 UN 안보리에 이를 통고해야 한다는 NPT 10조 1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탈퇴가 공식화되기 전까지는 IAEA의 사찰 의무를 수용해야 하나 이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N은 이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1994년 10월 21일 ‘미북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이 NPT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UN뿐 아니라 주변국 누구도 국제적 규범 위반이라는 북한의 잘못된 행위를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북한이 2003년 1월 10일 두 번째 NPT 탈퇴를 선언할 당시에도 UN의 대응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북한이 NPT 탈퇴 선언 이전인 2002년 말부터 핵시설을 재가동하고 IAEA의 감시·사찰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UN 차원에서는 경고나 제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UN이 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해 제재 조치를 취한 것은 2006년 7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한 이후에 나온 1695호가 처음이고, 이는 북한의 첫 번째 NPT 탈퇴 선언으로부터 13년 이상이 경과한 후였다. 그러나, 1695호는 북한의 행위에 대한 경고와 향후 제재 가능성을 시사하는 선에 머물렀다. 북한은 제재결의안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해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이는 2005년 9월 19일 『9.19 공동성명』5 에서 합의된 북한 비핵화 약속을 노골적으로 위반한 행위였지만, UN의 제재(안보리 결의안 1718호)는 여전히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북한이 2009년 2차, 2013년 3차 핵실험을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UN은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낼 단호한 제재를 결의하고 이행하는 데 실패하였다. UN의 대북제재는 북한 군부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극소수 기관이나 개인에 국한되었을 뿐, 북한 정권의 실제 돈줄인 민수 분야는 손도 못 대었다. 이는 이란의 사례와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이란에 대해서는 UN 차원의 제재를 넘어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등 주요 관련국들이 강력한 독자 제재를 시행하여 이란을 비핵화 협상의 장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미국을 포함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UN의 대이란 제재가 속 빈 강정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자구책을 마련함으로써 훨씬 강력한 조치가 나오게 되었고, 이란이 협상을 수용하도록 압박한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제재 강도가 10 정도라면 이란에 대한 제재의 강도는 100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UN이 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주요국가들이 강력한 독자적인 제재를6 가했기 때문이다. 2016년 이전의 대북제재는 핵과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물자의 거래를 금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고, 북한과의 금융거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여 주요 유럽 국가들이 참여한 이란에 대한 제재는 이란의 해외 금융거래를 차단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대북제재의 도입과 시행은 영변 핵단지의 존재 확인으로 북한 핵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1991년이 아니라 25년이나 지난 2016년에 와서야 시작되었기에 그 의미와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너무 늦게, 너무 적게(too late, too little)” 대북제재를 도입한 UN은 북핵 문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도 이란의 경우와는 달리 북한에 대한 독자제재를 적극적으로 집행하지 않아 문제를 키운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외형상 강화된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를 우회하거나 회피함으로써 북한을 지원하는 행태가 지속되고 있다. 2019년 대북제재위원회의 전문가패널 보고서에 의하면 불법 환적(換績) 등을 통한 대규모 물자 유출입이 북한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UN 안보리가 제한을 둔 석유 정제품의 경우 불법 환적 규모가 5만 7000배럴 규모(한화 64억원 상당)에 이르렀다고 한다.7 이 거래는 선적(船籍)과 선체를 모두 위장해 진행됐으며 세계적 유력 상사(商社)와 미국·싱가포르의 은행, 영국의 보험회사가 거래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20년 3월 9일,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2020년 전문가패널 보고서를 인용, UN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석탄과 모래 등을 팔아 방탄차, 주류, 로봇기계 등 사치품들을 수입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가 이에 협조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8
중국과 러시아는 그동안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민생경제’를 위태롭게 하여 인도주의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으며, 대북제재의 강화에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미국 역시 명목상으로는 강력한 독자제재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 독자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제재 대상 개인/단체의 리스트 갱신이 필수적인데, 미북 협상 타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은 재무부가 추진하려던 제재 대상 확대를 거부하였다.
그림 6. 미국의 대북제재 대상 변화 추이
자료: 미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실(Office of Foreign Assets Control, U.S. Department of the Treasury).
문제는 대북제재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북한의 핵 능력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경 전문가들이 추정한 북한의 핵탄두 보유 수는 10~15개 정도였다. 그러나 2017년에 이르러 미국 국방정보국(Defense Intelligence Agency, DIA) 분석관들을 포함한 북한 정보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탄두가 최대 60개에 이를 수도 있다고 추정하였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020년대 초반이면 북한의 핵탄두 수가 100여 개에 이를 수도 있으며, 북한은 한국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핵 위협을 가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북한의 ‘핵 인질’이 되어 버린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 혼돈의 시대: ‘新냉전’과 국제규범 및 질서의 파괴
2021년의 정세를 전망하는 데 있어, ‘新냉전’이라는 주제가 검토된 가장 큰 이유는 2020년의 세계에서 나타난 특성이 과거의 냉전 시대와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냉전 시대와 같은 주요 국가 간 경쟁과 대립 구도가 재현되고 이들이 국가이익을 위해 국력을 강화할 경우, 세계가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 즉 미국이라는 패권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도전국 간의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 물론, 세계적인 상호의존의 시대에 이러한 선택은 공멸을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양국 모두 이를 자제하기는 하겠지만, 新냉전 속에서 서로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상호관계가 관리되지 않는다면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목과 대립, 갈등이 확대되어 전 세계가 불안정하게 되고, 피해가 증가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2021년을 관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국제규범과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모습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선 미중 전략경쟁과 러시아의 영향력 회복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 대 비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전체주의의 상호 견제 구도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미소 양 강대국 간의 대결을 연상케 한다. COVID-19를 통해 더욱 뚜렷해진 미국과 중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의 상호 인식은 공존보다는 서로의 극복에 가까웠다. 과거 패권국과 도전 세력 간의 대결은 새로운 패권국의 등극과 기존 패권국의 순응, 혹은 도전 세력의 좌절로 나타났다.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완전한 소멸이나 와해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냉전 기간 중 미국과 舊소련을 정점으로 한 동서 양 진영이 지향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승리이자 적대 이념과 체제의 해체였다. 미국은 이미 COVID-19 이전부터 중국의 이념과 체제 문제를 공격해왔으며, 신종 감염병 확산의 원인도 그에 있다고 보았다. 중국은 이러한 공격이 결국 중국 공산당의 존립과 중국 자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매우 공격적이고 대립적인 성격의 ‘전랑외교(战狼外交)’로 맞섰다. 미국은 ‘쿼드(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Quad)’, ‘쿼드 플러스(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Plus, Quad Plus)’와 ‘인도-태평양(Indo-Pacific) 전략’을 통해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구성하려는 전략을 본격화하였고, 바이든 행정부하에서 “민주주의 정상회의”와 동맹 복원 등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협력 네트워크 구성을 가속화할 것이다. 중국 역시 기존 ‘일대일로’를 경제적 차원 이상의 연대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은 이념대립을 기반으로 체제경쟁을 지속하였고, 군사적으로는 핵과 재래전력 양면에서 고강도 군비경쟁을 벌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데탕트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현재의 新냉전하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전방위적 경쟁 양상도 비슷한 궤적을 보이고 있기에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이다. 반면, 新냉전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 있어서는 과거의 냉전과 차별화되어 진행되었고, 2021년에도 그 경향이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념보다는 국가이익
과거의 냉전 시대에 양 블록을 구분한 것은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친구와 적이 나뉘었고, 양대 진영은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를 확산시키는 동시에 상대방을 고립시키는 데 최대의 중점을 두었다. 때론 이념이 현실적인 국가이익을 뛰어넘는 정책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국가들은 어느 정도의 물질적 이익이 뒤따라야 행동을 결심한다. 과거의 냉전 시대는 이러한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이념적 동료의식이었다. ‘무역’이라기보다는 ‘원조’에 가까웠던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경제협력, 미국이 별다른 실익이 없는 국가들의 자본주의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을 지원했던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新냉전하에서 이념은 그리 중요한 결정요인이 아니다. 미국이 중국의 공산당 지도체제와 민주적 절차의 결여, 그리고 인권유린 등을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은 이슬람계 로힝야 학살 비난을 받고 있는 미얀마에 대해서도 관계개선 움직임을 보이는 등 중동이나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독재를 묵인하거나 그들과 협력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중국 역시 자신들이 주도하는 ‘일대일로’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참여를 권유하는 등 세력권을 넓혀가는 데 있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념은 주도국 간에는 서로를 식별하고 상대방과의 차별성을 강화하는 기준이지만, 다른 국가와의 협력을 결정하는 핵심요인이 더 이상 아닐 것이며,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거버넌스를 둘러싼 싸움과 가치로 포장된 이익의 전쟁
2020년 기존의 체제나 국제 레짐들은 예외 없이 그 권위에 상처를 입었다. 때로는 이미 상대방이 주도권을 잠식하기 시작한 기존 레짐을 포기하고 또 다른 레짐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으며, 미국의 WHO 탈퇴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즉, 국제 거버넌스가 모두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세계적 공동자산이 아니라, 자국의 패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미국 행정부하에서 이러한 기조가 바뀔지 혹은 그대로 유지될지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중국이나 러시아 역시 기존 미국이나 서구 중심의 레짐에서의 주도권 획득을 추구하든, 아니면 자기 나름의 레짐을 새로 형성하든 간에 국제적 거버넌스를 둘러싼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거버넌스’ 경쟁 속에서 양측은 과거와 같은 이념에 대한 직접적 공격보다는 “바람직한 가치”와 관련된 논쟁에 주력할 것인데, 이것이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수월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 진영인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자유, 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를 핵심적인 가치로 하고 있다. 권위주의 세력의 대표인 중국도 자유, 평등, 민주, 법치 등을 주요 가치로 주장한다.9 이외에도 부강, 문명, 조화, 애국, 우호 등도 가치로 내세우며 국가와 사회의 가치도 강조하고 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주권과 영토 존중, 내정불간섭, 반(反)패권, 다자주의 등을 내세운다.10 언뜻 보기에 미국과 중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가치의 구체적 해석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민주 제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유선거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권력의 분산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는 공산당 1당 독재로 체제가 유지되므로, 공산당을 중심으로 국가, 사회, 개인이 질서 있게 움직여야 한다고 본다. 또한 미국과 중국 간 가치의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표현의 자유인데, 미국이 표현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필수요소로 보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다수의 이익과 사회질서를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가치가 제대로 구현되고 가치를 중심으로 연대가 만들어지려면 민주적 제도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적 제도는 포퓰리즘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고,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처럼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특정 집단에 의한 권력의 독점으로 변형될 수 있다. 일본의 예를 보자. 일본도 자유선거가 보장되어 있지만, 자민당의 독주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11 동아시아 정치를 오랫동안 연구한 로버트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 버클리 대학 교수는 일본의 정치를 자민당이 독주하는 가운데 몇몇 약체 야당이 이를 견제하는 ‘1.5당 체제(1.5 Party System)’라고 하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야말로 일본의 진짜 ‘야당’이라고 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미국 마저도 일본 여당에 합류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국내정치가 자민당의 오랜 독주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진다면 이러한 현상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세계적 거버넌스를 둘러싼 가치 전쟁은 新냉전의 특성인 동시에 앞으로도 격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냉전이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와 공산독재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간의 대결이었다면 新냉전은 겉으로는 가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노골적인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세계이며, 이는 국제적인 거버넌스가 붕괴된 대혼란 시대의 위험을 지니고 있다.
불분명한 세력권
국가이익과 거버넌스를 둘러싼 각축이 과거의 냉전과 구별되는 新냉전의 특징인 만큼, 양측의 세력권, 즉 블록 역시 과거에 비해 훨씬 유동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COVID-19 상황은 상당 부분 기존의 세계화·정보화 흐름에 대한 역행 현상을 유도하였다. 각 국가들의 출입국 통제나 정보공유의 제한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백신 개발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나 마스크 등 방역 장비의 확보 경쟁은 세계화·정보화의 흐름을 완전히 무위로 돌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조가 지속되는 한 두 블록이 완전히 다른 생활권과 세력권을 형성, 상호 간 교류가 극히 제한되었던 舊냉전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新냉전 시대는 상대방 세력권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engagement)와 팽창(expansion)이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국가이익과 자기 주도 거버넌스에 대한 협력이 전제된다면 국가 간 협력과 경쟁의 관계가 언제든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세력 팽창의 경쟁은 중국의 ‘일대일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 구상 등을 통해 나타난 바가 있다. 세력권이 고정적이지 않기에, 新냉전 시대에 주도국을 중심으로 한 블록의 존재 역시 세 가지로 대별될 것이다. 1) 안보나 군사 영역과 같이 과거 이미 구별되어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 장벽이 강화될 분야, 2) ‘거버넌스’와 연관되어 앞으로도 완전히 블록 형성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분야, 3) 5G·AI 등과 같이 전체적으로는 연계되면서도 일부 핵심기술이나 플랫폼에서는 블록 형성이 이루어질 분야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3)의 분야에 있어 미국과 중국 모두 상대방의 기술이나 여론 우위를 무산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작은 세력권을 만들기 위한 경쟁을 더욱 본격화하게 될 것이다.
진영과 동맹의 응집력 약화
세력권이 불분명해지고, 이로 인한 국가들 간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이미 연구원의 2020년 정세전망에서도 ‘하이브리드 지정학’ 개념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이는 바로 과거 냉전과 같은 블록의 응집력이 新냉전하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한 분야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영역에 속했다가, 다른 분야에서는 反미국과 反서방 가치를 표방하는 세력과의 협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 과거 냉전 시대에는 진영을 넘어선 적국과의 협력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권이 결국은 방기(abandonment)나 과거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과 같은 직접적 개입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양대 강대국이 모두 확실한 주도력이나 신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국가들의 이러한 선택의 폭이 오히려 넓어질 수 있다. 즉, ‘줄서기’ 딜레마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상황과 분야에 따른 자유로운 블록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단, 국력이 제약된 국가들에게는 생존에 대한 우려가 더 커질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의 선택지는 어느 국가의 입장에도 쉽게 동조하지 않는 ‘각자도생’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때론 ‘다자주의’를 촉진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전방위적 경쟁영역과 새로운 군비경쟁
新냉전의 분위기는 2021년에 지속·강화되는 모습을 보일 것이고, 각 국가들은 이러한 新냉전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2020년에 新냉전은 이미 무역전쟁, 기술패권, 지정학적 경쟁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역시 과거 냉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비록 3차 세계대전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정치·경제적 세력권이 분명하던 과거의 냉전 시대에서 블록 간 대립은 상대방을 압도하거나 혹은 좌절시킬 수 있는 군사력의 확보 경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경쟁의 영역은 단순히 군사력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전방위적 경쟁은 민간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며, 때로는 세계적인 공급망(global supply chain) 재조정이라는 결과와도 연결될 것이다. 국가들은 이제 정책 결정을 하는 데 있어 단순히 정부의 영역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영역에서의 방기와 연루를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군사적인 분야에서 이러한 전방위적 경쟁은 새로운 무한 군비경쟁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과거 냉전 시대에는 재래식 군비경쟁과 핵 군비경쟁이 동시에 발생한 후, 핵 능력의 확장으로 인한 ‘공포의 균형’이 세계적인 전쟁을 방지하고 군비통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반면, 新냉전하에서 주요 국가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핵무기 이외의 압도적 수단을 개발·확보함으로써 상대방의 추격(catch-up)을 방지하거나 가상적국의 우월성을 상쇄(offset)하려 할 것이다. 무인화·로봇화는 물론이고, 극초음속 무기(hypersonic weapon), 우주전력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는 각 국가들의 군비 부담과 상당 기간의 무한 군비경쟁을 불러올 것이다. 또한, 동맹이나 우방국들을 네트워크화하여 상호 간의 연계성과 운용성을 제고하기 위한 시도 역시 강화될 것이다. 이는 미중 전략경쟁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되는 가능성을 높일 위험이 있다.
표 1. 舊냉전과 新냉전 개념의 비교
■ 2021년 전망
앞에서 제시된 新냉전의 특성은 2021년에 들어 더욱 가시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2020년의 COVID-19 확산 책임 논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은 서로가 진심으로 공존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유일한 공존의 전제는 상대방의 변환 혹은 순응이라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로 인해 2021년 미국과 중국의 전방위적 경쟁과 새로운 군사력 건설, 反미와 反서방의 가치를 지향하는 국가들의 영향력 확대 시도, 그리고 여타 국가들의 다양한 선택지와 분야와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이라는 특성은 더욱 가시화될 것이다.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함께, 트럼프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미국 주도력 회복을 지향할 것이지만, 중국에 대한 전략경쟁의 기본방향을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파리협정(Paris Agreement) 복귀 등 트럼프 행정부가 스스로 포기했던 세계질서에의 관여 정책을 부활시키는 한편, “민주주의 정상회의”와 같은 형태로 가치 전쟁을 오히려 격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국제적인 규칙, 규범, 제도의 기능 회복을 앞세운 미국의 대중국 공세는 5G, AI 등과 같은 과학기술과 정보안전 분야에서도 그대로 지속될 것이며, 反중국 연대를 형성하기 위한 ‘쿼드’, ‘쿼드 플러스’ 등의 다자협력 주창 움직임은 오히려 더욱 뚜렷해질 수 있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중국의 협력자라는 인식하에 새로운 전략무기감축 협상의 개시와 군비경쟁의 시현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이에 대해 시진핑 1인의 권력 강화와 애국주의 정치교육의 확대로 대응하려 할 것이다. ‘쌍순환’ 경제 전략과 과학기술의 자립자강에 중점을 둔 ‘14.5 규획’을12 실시하면서 내수 확대와 경제구조의 질적 성장을 도모할 뿐 아니라, 독자적인 기술플랫폼의 형성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러한 경쟁의 와중에서 대만, 홍콩, 신장, 남중국해 문제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서 바이든 행정부와의 갈등과 충돌은 더욱 빈번해질 것이다. 중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을 견제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경제적 상호의존성과 비전통적 안보에 대한 협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동맹인 한국, 일본을 공략하려 할 것이고,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경제적 압박을 카드로 빼들 수도 있다.
러시아는 이러한 중국의 대미 전략경쟁 움직임에 동조하면서도, 트럼프 행정부 시대의 미국 대외정책으로 인해 지역 질서가 격변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지속적으로 도모할 것이다. 이미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미국과 新냉전에 돌입해 있다고 인식하는 러시아로서는 미중 경쟁의 틈새를 공략하는 대외전략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2021년 중 최대의 이벤트라 할 수 있는 도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외교력을 집중할 것이다. 이는 ‘원칙’과 ‘실리’에 기반하여 미일 동맹의 큰 틀 아래 주변국들과의 ‘선별적 연대’와 ‘적대적 공존’으로 나타날 것이다. 특히, 점증하는 중국의 위협과 미중 전략경쟁의 격화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동맹국인 미국과 함께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양면 외교를 펼칠 것이다.
EU 국가들의 2021년의 선택 역시 주목된다. 전반적으로 EU 국가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 복원 움직임을 환영하면서도 각론을 놓고서는 미국과 차이를 보일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중 간 기술경쟁의 중심에 있는 ‘화웨이’ 제재인데, 이에 대해서는 EU 주요 국가의 입장이 미국과 다소 다르며, 이러한 이견은 2021년에도 쉽게 조정되지 않을 것이다. NATO의 유지를 놓고도 미국과 EU는 다른 입장을 보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바이든 당선자도 각 NATO 회원국에 GDP 대비 2% 수준의 방위비 증액을 요구할 것이다. 이는 미국이 EU와 동맹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합집산을 보여주는 新냉전의 특징이 다시 한번 드러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안보상 NATO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동안 중동 문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협력했던 터키의 ‘마이 웨이’ 행보 역시 지속될 것이다.
중동 지역에서는 미중 경쟁 대신 미러 경쟁이 두드러질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기간 미국의 방기와 러시아의 부상으로 중동에서는 기존 체제 유지와 새로운 질서 구축이 혼재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新고립주의, 거래식 동맹관으로 인한 중동 내 미국 동맹국들의 상흔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와 중국 역시 이미 확보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동맹이나 우방국의 이합집산이 계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연대 관계를 형성해 온 러시아, 중국, 이란의 반미 연대는 지역 영향력 유지라는 공통이익하에 결속을 계속할 것이며,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성이 붙은 이 복합적 이합집산의 추세를 되돌리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전망은 여전히 암울하다.
동남아 국가들은 2021년 동남아와 거리를 좁혀 중국을 견제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에 보다 높은 수준의 전략적, 경제적 관여, 미국의 적극적 지역 다자회의 참여 등의 목록을 담은 청구서를 내밀 것이다. 이런 아세안의 대응이 미국 쪽으로 중심 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의 경제적 지원, COVID-19 대응 지원에 열린 자세를 취하는 전략으로 대응할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이 서로 쟁탈을 벌이는 新냉전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이러한 자세를 2021년에도 지속하려 할 것이다. 이는 新냉전하에서 아세안 나름의 생존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혼돈이 가져온 新냉전의 다양한 현상들이 있지만, 2021년 정세전망은 ‘과학기술 경쟁’과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2021년에 미중 간 과학기술 경쟁은 지속될 것이며, 플랫폼 확장과 데이터 확보를 위해 디지털 패권을 장악하려는 노력은 2021년과 향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이미 진행되어 오기는 했지만 반도체, 우주기술, 양자 컴퓨팅 등이 새로운 전장(戰場)으로 부각될 수 있으며, 과학기술의 활용을 둘러싸고 세계적인 커플링과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의 혼재 현상이 윤곽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새로운 냉전에서 이념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만큼, 질서의 주도국이 한 국가의 자유민주주의의 촉진이나 회복에 도움을 줄 가능성은 줄어든 것이 新냉전의 현실이다. 오히려 정보화의 어두운 일면인 대중 선동정치와 포퓰리즘, 그리고 불확실한 정보의 범람은 자유민주주의의 후퇴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미중 간 가치와 이익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에서도 2021년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는 오히려 두드러질 수 있으며, 권위주의의 상대적 부상 역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우파 포퓰리즘의 약진, 신생 민주 국가들의 권위주의화 등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낼 것이다.
동맹의 복구,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 다자주의와 협력 등을 대외정책의 화두로 내세운 바이든 행정부가 무너지는 국제질서와 규범, 국제기구의 형해화를 방지하여 국제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미국 혼자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세력,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 등이 모두 중요한데 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리비아 내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국제기구의 형해화와 국제질서의 붕괴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슈마다 철저한 개별이익 계산에 따라 입장을 정하고 움직이는 경향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혼란과 불안은 심화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혼돈의 시대인 新냉전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로 인해 우리의 안보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북한 핵문제는 강 건너 불이 아닌 우리 발등의 불이다. 이에 대응하고 북한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동맹국들의 협력, UN의 지원, 주변국들의 협조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북한 편에 서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우리를 진심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고, 동맹의 복원을 외치는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미국 우선주의’를 탈피하여 NPT 체제를 굳건히 하고 비핵화를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인지 확신하기가 쉽지 않다. ‘중국몽’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협조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역사문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일본이 얼마나 우리에게 협력할지 도 의문이다. 각국이 신뢰나 가치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철저한 개별 국가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국제기구가 형해화되며, 국제질서가 파괴되고, 동맹의 균열이 우려되는 위험한 혼돈의 세계 속에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혼돈 시대 속에서 더욱 엄중해진 우리의 안보 상황은 2021년 우리에게 더 큰 경각심을 요구할 것이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1992년 9월 IAEA는 북한이 신고한 재처리 플루토늄의 양과 사찰을 통해 추정된 양 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북한에 대해 해명과 특별사찰 수용을 요구했다. 북한은 특별사찰을 거부하고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핵 1차 위기가 시작되었다. “Chronology of U.S.-North Korean Nuclear and Missile Diplomacy,” Arms Control Association, last modified Jul, 2020, accessed Dec 21, 2020.
- 2. “Trump on China: ‘We could cut off the whole relationship’,” Fox Business, May 14, 2020.
- 3. 2019년 11월 터키는 리비아 서부 정권과 동(東)지중해를 놓고 양국 간 해양경계를 획정하는 양해각서에 합의했다. 이 양해각서는 동지중해에 오로지 약 18.6해리에 이르는 직선 하나만을 설정했다. 단지 직선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직선 하나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200해리에 이르는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에 대한 해양 권원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양해각서에 근거하여 터키는 그리스의 반발을 무시하며 동지중해에서 호위함을 동원해 탐사 활동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2020년 8월 12일에는 동지중해에서 그리스의 호위함과 터키의 호위함이 부딪히는 ‘사고’도 발생했다. 같은 NATO 회원국인 터키와 그리스가 서로 간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는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에도 UN은 이 해양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는 독자적으로 터키와 리비아 서부 정권 간 2019년 양해각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2020년 8월 6일 이집트와 동지중해를 놓고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획정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대해 터키는 동맹인 그리스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 4. 2020년 9월 27일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놓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교전이 다시 발생했다. 국제법상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이나 아르메니아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이미 1992년부터 분쟁 상태에 있었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각각 독립을 쟁취했으나 1992년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위치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의회는 독립공화국 창설을 선포한 후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분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주도로 국제사회는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왔으나 터키는 민족적, 종교적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프랑스는 아르메니아 출신 이민집단이 정착한 유럽 내 최대 국가가 프랑스이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는 등 그 이면에는 국가들 간 분열만이 증명되었다. 결국 2020년 교전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무력으로 분쟁 지역 대부분을 수복했고, 2020년 11월 9일 체결된 평화협정을 통해 러시아는 아르메니아군의 철수와 함께 향후 5년 동안 평화유지군을 배치하기로 했다. 1992년부터 이어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의 무력사용을 통한 승전으로 해결된 것이다. 결국 UN을 위시한 국제기구의 무력함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 5.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대표가 합의한 9.19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
- 6.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대이란 제재의 핵심은 자국 내 이란의 자산을 동결하고 이란의 국제금융거래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 7. 2020년 12월 7일 자,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에 따르면 2020년 1월부터 9월 사이 북한은 약 4백10만 톤의 석탄을 중국에 불법 수출하여 약 3억3천만 불에서 4억1천만 불 정도의 외화를 벌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은 약 2만 명에 달하는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여 UN의 제재를 위반하는 것으로 보도하였다. “Covert Chinese Trade with North Korea Moves into the Open,” The Wall Street Journal, December 7, 2020.
- 8. “Armed Cars, Robots and Coal: North Korea Defies U.S. by Evading Sanction,” The New York Times, March 10, 2020.
- 9. 2012년 중국 공산당은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으로 공정, 경업(직업정신), 성신(성실과 신용)을 포함한 12가지 가치를 제시·채택하였다. 이후 2013년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배양과 실천에 관한 의견(关于培育和践行社会主义核心价值观的意见)>을 발표, 해당 가치의 교육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 10. 중국은 평화공존 5원칙을 대외정책 핵심기조로 삼았다. 평화공존 5원칙은 영토주권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상호불간섭, 평등호혜 및 평화공존이며, 이는 1953년 12월, 인도 측과의 협상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중국 정부를 대표해 처음 제시했다.
- 11. 2020년 12월 현재, 일본 자유민주당은 중의원 283석,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중의원 29석을 가지고 있어서 연립여당의 총 의석 수는 312석이고, 이는 정원 465석의 약 67%이다. 가장 큰 야당연합인 입헌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은 중의원 113을 가지고 있어서 정원의 24%, 연립여당의 3분의 1 수준이다.
- 12. “14.5 규획”은 2020년 10월의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9기 5중전회)에서 심의된 중국의 제1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