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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11일,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Rodrigo Duterte)는 필리핀과 미국 사이 방문군협정 (Visiting Forces Agreement, VFA)을 종료하겠다고 선언했다.1 곧 이어 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관은 필리핀 정부로부터 VFA 종료를 통고받았다고 확인했다.2 1998년에 체결된VFA는 통보 시점으로부터 180일간 양측의 입장 변화가 없으면 종료된다. 이런 필리핀 정부의 통고에 대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면서 “솔직히 말하면 [VFA 폐기 문제에 대해] 그리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3

필리핀은 태국과 함께 동남아의 유일한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국가다. 2014년 태국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 이후 미국과 태국의 관계가 불편하게 변했다. 이로 인해 태국이 점차 중국 쪽으로 경사된다는 평가도 많았다.4 두테르테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거침없는 언사로 인해 널뛰기를 하던 필리핀-미국 동맹 관계도 VFA 폐기 선언으로 인해 변곡점을 맞을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중 하나인 동남아, 아세안 지역에서 가지고 있는 군사동맹이 모두 좋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는 상황이다.

이 사안에서 일차적 관심사는 정말 VFA가 폐기될 것인가이다. 이 질문은 향후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에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양자 동맹을 넘어서 VFA 폐기와 필리핀-미국 군사동맹의 약화는 지역적 안보 문제에 대한 함의도 있다.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에서 남중국해에 면해 있으며, 중국과의 해양∙영토 분쟁 당사국인 필리핀의 지정학적 위치가 가진 함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협력은 미국의 인도-퍼시픽 전략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군사적인 측면의 함의 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미국,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도 있다.

 

필리핀-미국간 VFA는 무엇인가?

 
필리핀과 미국 사이 체결된 VFA는 기본적으로 필리핀에 들어오고 나가는 미군의 지위를 규정한 협정이다. 이 협정은 1998년 양국 정부간 서명되고 1999년 필리핀 상원의 비준동의를 받음으로써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VFA는 필리핀을 방문하거나 주둔하는 미군과 그에 동반된 민간 인력의 출입국 및 이동에 관한 규정, 형사 관할권에 관한 규정, 항공기를 포함한 제반 미군 장비의 출입에 관한 규정, 그리고 이 협정의 지속과 종료에 관한 규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5 이 협정이 폐기될 경우 미군의 필리핀 주둔, 필리핀 내에서 미국과 합동 훈련 등의 군사협력을 위해 방문하는 미군의 법적 지위가 모호해진다.

VFA는 또한 미국과 필리핀 사이 군사협력 관계를 규정하는 3대 축의 하나이다. 미국과 필리핀의 동맹을 규정하는 가장 오래되고 핵심인 축은 미국과 필리핀 사이 1951년에 체결된 상호방위조약 (Mutual Defense Treaty, MDT)이다. 이 조약을 근거로 필리핀과 미국은 군사동맹의 지위를 갖게 된다. 여타 상호방위조약과 마찬가지로 이 조약 역시 조약 일방에 대한 무력공격은 타방에 대한 무력공격과 동일하게 간주된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6 MDT, VFA와 더불어 세 축 중 가장 최근인 2014년에 만들어진 확대국방협력협정 (Enhanced Defense Cooperation Agreement, EDCA) 역시 필리핀에서 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인데 특별히 이 협정은 필리핀에 미군이 주둔하고 필리핀군 기지를 사용하며, 주둔 관련된 시설 (막사, 창고 등)을 설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 세가지 협정 중 MDT와 VFA는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필리핀 상원의 비준동의를 받아야 한다. 반면 EDCA는 이 협정이 VFA를 이행 (implement)하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상원의 비준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 행정부 협정이라는 것이 필리핀 대법원의 판단이다.7 따라서 협정 체결의 난이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MDT와 VFA가 EDCA보다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EDCA는 VFA를 이행하는 구체사항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VFA가 종료된다면 VFA에서 규정한 미군의 순환배치, 주둔, 방문을 전제로 한 EDCA는 형해화 되거나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

 

VFA 폐기 문제는 왜 등장했나?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필리핀-미국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나타냈다. 2016년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필리핀은 중국이나 러시아와 보다 가깝게 지내야 한다면서 미국과 군사, 경제협력을 재고하고, 미국과의 연합훈련인 발리카탄 (Balikatan) 훈련을 중단하겠다고 했다.8 이런 미국에 대한 두테르테의 비판적 발언은 미국이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이 가져온 인권침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서 더욱 수위를 높여갔다. 같은 해 연말에는 미국과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하면서 당시 오바마 대통령에게 “go to hell”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9

2017년에서 2018년 사이 미국과 필리핀 관계는 다소 회복되는 듯했다. 2017년 중순부터 필리핀 민다나오섬 마라위 (Marawi)에서 시작된 이슬람 집단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필리핀에 적지 않은 지원을 했다. 군사장비 외에 1,400만불을 마라위 사태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지원하는데 지출했고, 250여명으로 구성된 미국 군사고문단이 사태 진압에 투입된 필리핀 군에 자문과 훈련을 제공했다.10 이런 연장선상에서 두테르테의 미국에 대한 시각은 바뀌는 듯했다. 2018년 4월 필리핀 “용사의 날” (Day of Valor) 연설에서 두테르테는 “오늘날까지 미국은 우리의 강력한 군사, 경제 동맹” (To this day, America has remained our strong military and economic ally)이라고 하기도 했다.11

이런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8년까지 좋은 분위기 속에 필리핀과 미국 사이 군사협력의 확대, 발리카탄 연합훈련의 확대 등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미국 상원에서 시작된 필리핀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는 두테르테의 미국에 대한 시각을 취임 초로 돌려 놓았다. 2019년 4월 미 상원에서 필리핀 상원의원 Leila De Lima의 석방과 마약과의 전쟁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결의안 142호가 제안되었고, 2020년 1월 8일자로 통과되었다.12 이 결의안 통과 이후 결의안에 앞장섰던 미 상원 일부 의원들은 필리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적 자유 침해에 대한 우려를 담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13

이런 배경 속에 두테르테 대통령의 VFA 폐기 선언의 직접적인 원인은 2020년 1월 22일 두테르테 대통령의 측근인 상원의원 로날도 로사 (Ronaldo “Bato” dela Rosa)의 미국 비자가 취소된 것이다. 로사는 전임 경찰청장으로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추진한 마약과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마약과의 전쟁은 그 수행과정에서 초법적 살인이 자행되는 등 국제적으로 큰 인권문제 관련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로사 상원의원의 비자 취소는 일부 상원의원이 2020년 세출안 (appropriation bill)에 Global Magnisky Human Rights Act를 근거로 끼워 넣은 (rider provision) 조항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14 이에 두테르테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미국의 결정을 비난하면서 군사협력을 중단하겠다는 의미를 밝히며 모든 고위관료들의 미국 방문을 금지했다.15 며칠 후 두테르테 대통령은 VFA 종료를 통보했다.

 

필리핀-미국 동맹의 형성과 위기, 그리고 회복

 
이런 최근 필리핀-미국 군사동맹의 위기를 뒤로 하고 이 일련의 움직임들이 갖는 의미를 보다 큰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 필리핀과 미국 군사동맹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는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바에서 일어난 스페인 통치에 대한 반란을 지원하면서 스페인과 전쟁에 돌입한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당시 스페인 통치 하에 있던 필리핀으로 확장했다. 미국은 1896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통치에 대한 필리핀 내 반란을 지원하면서 개입했다. 스페인과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필리핀의 처리방안을 놓고 직접 통치와 독립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16 결국 미국은 1946년까지 필리핀을 직접 통치했다.

냉전이 막 시작되던 1951년 필리핀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Philippines and the US)를 체결하고 군사동맹 관계를 시작했다. 이후 냉전 질서 속에서 미국과 필리핀 사이 군사동맹은 큰 이견없이 지속되었다. 이런 동맹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은 냉전이 끝난 1991년이었다.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Lozon) 섬 클라크(Clark) 공군기지와 수빅(Sibic)항이 피나투보(Pinatubo) 화산 폭발로 큰 피해를 입은데다 미군 기지 사용 재협상에서 사용료를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당시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 행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필리핀 상원의 투표로 1991년 미군 철수가 결정되었고 미군은 1992년까지 모두 필리핀에서 철수했다.17

미국과 필리핀 사이 협상 난항은 좁게는 기지 사용료 문제였으나, 보다 큰 관점에서는 냉전의 종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냉전이 끝난 시점에서 미국은 큰 돈을 들여가며 필리핀에 군사기지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도 크게 망설이지 않고 쉽게 미군 철수를 결정했다. 1992년 필리핀에서 미군의 철수는 크게 보면 아시아에서 냉전이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필리핀과 미국 관계에서 이 사건은 1951년 군사동맹이 맺어진 이후 최대의 위기였다.

이런 위기로부터 동맹 관계가 회복된 것은 1998년 미국과 필리핀 간 VFA가 체결되면서 다. 코라손 아키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피델 라모스 (Fidel V. Ramos)다. 그는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인사다. 그는 미군 기지 철수로 약화된 미국과 동맹 관계의 발전을 꾀했다. 라모스 재임기간 협상된 VFA는 그가 퇴임한 직후 후임 대통령인 조셉 에스트라다 (Joseph Estrada) 임기중 최종 서명되었다.18 이로써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동맹 관계는 거의 1991년~1992년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14년에는 필리핀과 미국 간 EDCA가 체결되어 VFA를 더 구체화한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2014년 EDCA 체결 당시 필리핀 대통령인 베니뇨 아키노 (Benigno Aquino)는 1991~92년 사이 필리핀 상원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군사기지 협정을 연장하려 했던 코라손 아키노 (Corazon Aquino)의 아들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강경했던 대통령으로 중국의 9단선 문제를 국제중재재판으로 끌고 갔던 인물이다. 이로서 필리핀 내 미군의 주둔과 순환배치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법적 근거를 가지게 되고 기지의 설치를 제외하고는 1991년 수준으로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협력은 회복되었다.

 

필리핀과 미국 사이 군사협력 현황

 
EDCA 체결 후 3축에 기반한 필리핀-미국 동맹은 상당히 활성화되었다. 현재 필리핀과 미국 사이에는 연 250~300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규모의 연합 훈련을 포함 각종 교육, 군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발리카탄 (Balikatan) 연합 훈련인데, 매년 약 10일간 연인원 8,000명이 참여하는 훈련이다. 최근에는 이 훈련에 호주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2015년부터 실시된 살락니브 (Salaknib) 훈련은 발리카탄 훈련을 준비하는 성격으로 양측에서 육군 중심으로 1,7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2019년 5월 양국은 2020년에 군사협력, 합동훈련을 더 확대하자는 합의도 도출했다.19

이 외에 특별히 종교적 극단주의에 의한 테러리즘에 대비한 양국 사이 군사협력도 활발하다. 미국은 2002년부터 2015년까지 Operation of Enduring Freedom이라는 타이틀 하에 필리핀에서 지속적으로 대테러작전을 지원했다. 여기는 연간 500~600명에 달하는 미국 특수부대 인원이 참여했다. 양국은 테러리즘에 대비한 군사작전 외에 민간 영역에 대한 구호까지 포함한 보다 넓은 차원에서 필리핀군, 미 국방부, 그리고 USAID까지 참여하는 Operation Pacific Eagle – Philippines을 실시해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7년 Marawi 사태 때는 250여명의 미군 자문단이 주둔해 필리핀 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1992년 필리핀에서 미군이 철수한 이후 현재까지 과거와 같은 미군 주둔, 기지 설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1998년 VFA, 2014년 EDCA에 기반해 미국은 꾸준하게 필리핀내 미군의 순환배치를 해왔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EDCA 체결이후 미군은 필리핀에 5개 기지에 순환 배치를 하고 있다. 이중 4개는 공항 시설이고 나머지 1개는 육군 시설이다.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에 두개가 있고, 나머지는 각각 남중국해를 겨냥한 팔라완 (Palawan) 섬, 테러리즘의 근거지가 되는 민다나오 (Mindanao) 섬, 그리고 지리적으로 필리핀의 중앙에 해당하는 세부 (Cebu) 섬에 각각 1개씩이다.

[표 1] 필리핀 내 미군이 순환배치를 하고 있는 기지20

표1_필리핀 내 미군이 순환배치를 하고 있는 기지

 

필리핀 입장에서 본 필리핀-미국의 군사협력의 미래

 
필리핀의 입장에서 VFA, 미국과의 군사협력, 그리고 전반적인 미국과의 관계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안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VFA 폐기 통보를 하기 직전 필리핀 외교장관인 테오도로 록신 (Teodoro Locsin)은 필리핀 상원 청문회에서 2016년부터 2019년 사이 미국은 필리핀에 5억 5천만 달러에 상당하는 안보 지원을 했다고 하면서 VFA 단절에 따라 군사관계 만이 아니라 필리핀과 미국의 경제관계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21 실제로 2018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은 일본에 이어 필리핀의 제 2의 수출시장 (97억 달러)이자 제 4위의 수입국 (83억 달러)으로 연간 무역액이 180억 달러에 이른다.22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는 약 4백만명의 필리핀 시민권자와 필리핀계 미국인들이 살고 있으며, 이중 필리핀 통계에 의한 필리핀 시민은 3백만명이 넘는다.23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2018년 미국에서 필리핀으로 송금한 액수만해도 10억 달러가 넘어 전체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송금한 액수의 35%를 차지한다.24

무엇보다 VFA 종료는 필리핀의 안보에 큰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VFA가 종료되고 VFA 이행의 구체 사항을 규정했던 EDCA가 형해화 하면 미국과 필리핀 동맹은 1951년에 맺은 아주 추상적인 동맹 조약에 기반한 상태로 남게 된다. 이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군사협력, 훈련, 연습, 그리고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군사지원 등은 VFA 종료와 EDCA의 유명무실화로 불가능하게 된다. 더욱이 필리핀은 남중국해 남사군도에서 중국의 영유권 주장과 실질적 주권 침해를 마주하고 있다. 필리핀의 군사력으로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저지하기는 어렵다. VFA 폐기로 미군의 순환배치, 미군에 의한 항행의 자유 작전 (Freedom of Navigation Operations, FONOPs) 등이 불가능해지면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독자적으로 남중국해 영유권을 지키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실제로 두테르테 대통령의 VFA 종료 의지가 현실이 될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조약의 종료가 최종 확정되기까지 남은 180일은 거의 6개월에 달하는 긴 시간이다. 이 긴 시간 사이에 어떤 상황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이후 그의 미국에 대한 시각은 극과 극을 달려왔다. 취임 초반, 즉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임기가 겹치는 기간 동안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곧 동맹이 끝나고 미국과 군사협력을 중단할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2016년에 미국과 필리핀 사이 군사협력은 예정된 대로 모두 진행되었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 외에 필리핀 정부가 실질적으로 군사협력을 중단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는 거의 없었다고 알려졌다.25

한편 2017년 마라위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한 작전시 미국의 지원은 마약과의 전쟁에 이어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진행하던 두테르테 대통령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로 부터 2018년까지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서 이전과 같은 거친 발언이나 돌발적 행동 대신 미국과의 협력 관계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불과 1년만에 두테르테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의 미국에 대한 달라진 태도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시기와도 겹친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말 아시아 순방중 필리핀에 들러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이 거둔 성과를 높이 산 바 있다.26 두테르테의 VFA 파기 협정은 2019년 초반까지 잘 유지되던 필리핀-미국 관계 속에 갑작스럽게 불거진 것이다. 지난 4~5년간 두테르테 대통령의 대미 인식이 롤러코스터를 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VFA 종료 통고가 번복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국 입장에서 본 필리핀과의 협력

 
미국 측의 인식과 계산은 필리핀과 크게 다를 수 있다. 필리핀 입장에서는 미국으로 부터 받는 지원, 미국과 경제 관계 등이 필리핀의 이익에 중요하다. 반면 미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 안보 정책,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미칠 영향이 무엇보다 크다. 필리핀과의 군사협력에서 미국은 필리핀 군사력의 도움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 필리핀의 군사력이 미국에게 의미 있는 도움이 되기에는 크게 모자라기 때문이다. 반면 필리핀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는 미국의 아시아 전진배치에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남중국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저지하려 한다. FONOPs를 비롯해 남중국해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에 필리핀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미국이 남중국해에 접근하고 군사작전을 펴려고 할 때 동남아,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이를 지원할 만한 다른 후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 국가가 호주와 싱가포르다. 그러나 호주는 남중국해로부터 지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이 덜하다. 싱가포르의 경우 도시국가로 협소하기 때문에 미군 작전의 물리적 거점이 되기에 한계를 가진다. 그에 비해서 필리핀의 경우 지리적 단점이나 공간적 협소함을 극복할 수 있는 매우 좋은 후보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오키나와 공군기지와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시아 (Diego Garcia) 미군 기지를 잇는 중간의 급유지로 필리핀 공군기지가 활용될 수 있다.27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협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악화된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아세안이라는 필리핀을 포함한 집합체와 협력 관계 강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아세안은 지리적으로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지리적으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의 영향력이 잠재적으로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국가들이기도 하다. 미-중 전략경쟁에서 아세안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은 아세안에 포함된 10개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나아가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지리적으로 충돌하는 지점 역시 동남아시아, 아세안 지역이다.

2018년 중국이 처음으로 아세안 국가들과 합동 군사훈련을 한데 이어 2019년에는 미국이 처음으로 동남아 국가들과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했다.28 여기서도 미국과 중국의 경쟁 관계가 펼쳐진다. 아세안은 어느 한 국가라도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 의사결정이 되지 않는 협의와 합의라는 의사결정 방식에 기반한다. 아세안 내에서 필리핀이 거부한다면 아세안과 미국 사이 합동 훈련, 국방협력, 전반적인 협력은 어렵다. 유사한 예가 있다. 2019년 동아시아정상회의 (East Asia Summit, EAS)에 불참한 트럼프 대통령은 급히 2020년 1월 동남아 정상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29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런 보도가 나간 지 3일만에 트럼프의 초청을 거절했다.30 2월말 트럼프 행정부는 코로나 19 사태를 이유로 계획된 아세안-미국 정상회의를 연기했다.31 정상회의가 개최된다 해도 10개국이 모두 모이지 않은 상태로는 그 효과를 충분히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리핀과의 군사협력 약화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군사적 차원만이 아니라 이 전략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크다. 미 국방부의 인도-퍼시픽 보고서는 2019년 한 해 미국과 필리핀은 280 차례의 양자 군사협력을 진행했고, 미국의 인도-태평양사령부 (US Indo-Pacific Command, USINDOPACOM) 관할에 속하는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양자 훈련을 하고 있는 국가로 필리핀을 꼽았다.32 양자 훈련을 넘어 필리핀이 VFA를 폐기하고 미국과 군사협력 관계가 약화된다면 이는 곧 동남아 혹은 더 넓게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서 가지는 확신 (confidence)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VFA 폐기와 필리핀-미국 군사협력의 약화의 원인이 어느 쪽에 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역 국가들의 전략적 판단은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 이런 차원에서 필리핀과 미국 사이 군사협력의 약화는 지역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확신을 감소시킬 만한 충분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두테르테 대통령의 VFA 폐기 통보가 실제로 필리핀과 미국간 VFA 종료로 이어질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두테르테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시각이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였다는 점을 볼 때 결정을 번복할 여지는 있다. 물론 미국 측에서도 국방부 측에서 VFA의 종료를 막기 위한 노력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두가지 변수를 더하고 180일이라는 종료 확정까지 남은 시간을 더하면 아직 변화의 여지는 충분하다. 역사적으로도 필리핀과 미국 사이 동맹이 위기에 처했던 적은 1951년 동맹이 맺어진 이후 1992년 필리핀에서 미군 철군 이후 1998년 VFA가 체결되기까지 6년 정도의 기간에 불과하다.

반면 실제로 VFA의 종료, 이에 따른 EDCA의 유명무실화가 가져올 파장은 작지 않다. 필리핀 입장에서는 큰 경제적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미국과 관계 악화는 큰 손해다. 무엇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는 입장에서 미국 외에는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지원해줄 세력이 마땅치 않다. 미국으로서도 VFA 폐기, EDCA의 유명무실화는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필리핀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큰 타격이 될 것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요한 퍼즐을 잃어버리는 셈이다. 필리핀에 대한 접근을 상실함에 따라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눈에 미국에 대한 신뢰도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Philstar. 2020. “Palace: Deterte orders termination of Visiting Forces Agreement” Philstar. February 11.
  • 2. Christina Marie Ramos. 2020. “US Embassy sees ‘significant implications on’ PH-US alliance over VFA termination” Inquirer. 11 February.
  • 3. Pia Lee Brago. 2020. “Trump ‘fine’ with VFA termination” Philstar. February 14.
  • 4. Ian Storey. 2019. “Thailand’s Military Relations with China: Moving from Strength to Strength” ISEAS Perspective. 27 May. No. 2019-43.
  • 5. 필리핀과 미국간 VFA의 정식 명칭은 필리핀을 방문하는 미군 대우에 관한 필리핀 공화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간 협정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and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regarding the Treatment of United States Armed Forces Visiting the Philippines)이다.
  • 6. 필리핀-미국 상호방위조약 원문은 “an armed attack on either of the Parties is deemed to include an armed attack on the metropolitan territory of either of the Parties, or on the island territories under its jurisdiction in the Pacific Ocean, its armed forces, public vessels or aircraft in the Pacific.”
  • 7. Aaron Jed Rabena. 2020. “Philippines-US Alliance Under Duterte: Unravelling?” RSIS Commentary. 11 February. No. 025.
  • 8. VOA. 2016. “Duterte: Next US-Philippines Military Exercise Will be the Last” VOA. September 28.
  • 9. Buena Bernal and Holly Yan. 2016. “Philippines’s President says he’ll ‘break up’ with US, tells Obama ‘go to hell’” CNN. October 4.
  • 10. Agence Frace Presse. 2017. “US played key role in helping AFP retake Marawi: envoy” ABS-CBN News. October 26.
  • 11. Christina Mendez. 2018. “Duterte recognizes Philippines alliance with US, Japan” Philstar. April 10.
  • 12. Liela De Lima는 필리핀의 인권 운동가이자 상원의원이다. 두테르테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고, 정부에 의해서 마약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체포, 구금되어 있는 상태다. 상원결의안 142호는 https://www.congress.gov/116/bills/sres142/BILLS-116sres142ats.pdf를 참고할 것.
  • 13. Sofia Tomacruz. 2020. “U.S. senators to Duterte: Human rights violations must end” Rappler. 10 January.
  • 14. Magnisky Human Rights Act는 원래 2012년 러시아 회계사인 Sergei Magnisky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러시아 당국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2016년부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인권 침해를 저지른 사람들의 재산을 동결하고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확대되어 적용되고 있다.
  • 15. Neil Jerome Morales and Karen Lema. 2020. “Philippines’ Duterte threatens to end military deal with the United States” Reuter. January 24.
  • 16. Nicholas Tarling. 2010. Southeast Asia and the Great Powers. Routledge: London. pp. 137-140.
  • 17. 1991년 루손 (Luzon) 섬의 피나투보 (Pinatubo) 화산이 분출하면서 미군이 주둔했던 클라크 공군기지 (Clark Air Base)와 수빅항 (Subic port)이화산재에 뒤 덥혔다. 회복이 불가능했던 클라크 공군기지는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아 폐쇄되었고 수빅항은 원상복구 되었다. 피나투보 화산 분출은 필리핀과 미국 사이 군사기자 사용 재협상 시기와 맞물렸다. 행정부 간 협상은 기지 사용료를 제외하고 대강 마무리되어 “필리핀과 미국 간 우정, 평화, 협력 협정” (Treaty of Friendship, Peace and Cooperation between the Philippines and the United State)이 맺어졌다. 그러나 필리핀 상원은 기지 사용료 이견 등의 문제로 이 협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양국 정부는 재협상을 벌였으나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고, 당시 코라손 아키노 (Corazon Aquino) 필리핀 대통령은 1991년 말, 미군에게 1992년 말까지 철수를 하라는 통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 18. 라모스 대통령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사람으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1986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몰아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라모스 대통령은 마르코스 진영을 떠나 민주화운동 세력 쪽에 섰고 아키노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 19. Frances Mangosing. 2019. “Philippines, US Plan bigger joint army exercises in 2020” Inquirer. May 8.
  • 20. Andrew Tilghman. 2016. “The U.S. Military is moving into these 5 bases in the Philippines” Military Times. March 21과 The US Department of Defense. 2019. Indo-Pacific Strategy Report. p. 29.
  • 21. Jim Gomez. 2020. “Philippines notifies US of intent to end major security pact” Military Times. 11 February.
  • 22. 한-아세안센터. 2019. 『2018 한-아세안 통계집』 한-아세안센터. p. 85.
  • 23. U.S. Department of State. “U.S. Relations with the Philippines” (https://www.state.gov/u-s-relations-with-the-philippines/)와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Republic of the Philippines. “Distribution on Filipinos Overseas” (https://dfa.gov.ph/distribution-of-filipinos-overseas) 참조.
  • 24. Bianca Cuaresma. 2019. “US still the no. 1 remittance source for the Philippines” Business Mirror. February 18.
  • 25. ABS-CBN News. 2016. “Duterte: 2016 PH-US military exercises will be the last” ABS-CBN News. September 29.
  • 26. Martin Petty. 2017. “U.S., Philippines ties back on track as Trump, Duterte make up and bond” Reuters. November 14.
  • 27. Manny Mogato. 2019. “Despite Duterte rhetoric, US military gains forward based in PH” Rappler. January 31.
  • 28. Lee Jeong-ho. 2019. “Asean steers between two powers with joint US military exercise in the South China Sea” South China Morning Post. 7 September.
  • 29. Inquirer. 2020. “Trump invites Asean leaders, including Duterte, to summit in US” Inquirer. January 20.
  • 30. Sofia Tomacruz. 2020. “Duterte rejects Trump’s invite to attend special U.S.-ASEAN summit” Rappler. January 23.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 외에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Mahathir Mohamed) 총리 역시 불참할 선언했다.
  • 31. Bangkok Post. 2020. “US-Asean summit postponed on virus fear” Bangkok Post. 29 February.
  • 32. The US Department of Defense. 2019. Indo-Pacific Strategy Report.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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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이재현

지역연구센터 ; 출판홍보실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2012년까지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다. 현재 한국동남아학회 부회장, 해양경찰청의 자문위원이고,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최근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적 공간의 등장(2015), 북한과 동남아시아(2017), 신남방정책이 아세안에서 성공하려면(2018),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신남방정책의 역할(2018), 한국과 아세안의 전략적 공통분모와 신남방정책(2019), 비정형성과 비공식성의 아세안 의사결정(2019), 피벗: 미국 아시아전략의 미래 (2020, 역서), G-Zero 시대 글로벌, 지역 질서와 중견국(2020), “Southeast Asian Perspectives of the United States and China: A SWOT Analysis”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