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세안 관계 수립 40주년이자 아세안 창립 50주년이 되는 2017년, 더 나아가 트럼프 정부 4년 동안 동남아-미국 관계는 상호 무관심으로 규정될 것이다. 냉전 종식 직후 미국이 동남아에서 철수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보다 길게 보면 동남아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은 냉전 종식 이후 20년간 지속되어왔다. 지난 8년간 오바마 정부의 대동남아 중시 정책이 오히려 일탈적인 경우다. 트럼프 정부의 동남아로부터 관심 철회는 일탈이 아닌 일상으로의 복귀에 가깝다. 외교, 경제, 군사적으로 트럼프 정부가 동남아•아세안을 중시해야 할 만한 큰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굳이 미국 신정부가 동남아 국가를 중시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이는 미-중 관계 때문이다. 이마저도 미-중 관계가 남중국해에서 악화되고 동남아 국가들의 전략적 중요성이 재인식 된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반면 트럼프 정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역 불균형 시정, 동맹 파트너로서 더 큰 부담을 동남아 국가에 요구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동남아 정책: Back to Normal?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로부터 1990년대까지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은 동남아를 냉전 수행의 도구로 보았다. 물론 이 기간 동남아 국가들도 일정 부분 미국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이후 1990년부터 2010년 정도까지 20여 년간 미국은 동남아로부터 떠나 있었다. 2011년 미국이 피봇(pivot) 정책을 선언한 이후, 보다 길게는 오바마 행정부가 등장한 이후 지난 8년간 미국의 대동남아 정책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었다. 미국의 신행정부는 다시 과거의 정책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행정부가 들어서면 상당기간 동안 동남아는 미국 대외정책에서 잊혀진 부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 정부의 피봇 정책 8년이 아시아 지역에 착시 현상을 일으키고 과도한 기대를 만들어냈다. 오바마의 동남아 중시 정책은 냉전 종식 직후부터 지속되어온 미국의 대동남아 정책에서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지난 8년간 오바마 정부는 냉전 이후 어떤 행정부보다 동남아에 큰 관심을 두었다. 오바마의 아시아 피봇 정책은 미국에게 아시아, 보다 좁게는 동남아가 매우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기간 중 미국은 중국의 대동남아 영향력 확장을 저지하고,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 동남아 국가들에 큰 공을 들였다. 아세안이 주도하는 지역의 다자회의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활동에 제동을 거는 군사작전들을 펼쳤다. 미얀마의 정치적 자유화를 가져왔고, 베트남과의 양자관계는 베트남전 이후 최고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런 오바마 정부의 대아세안 정책을 동남아 국가들은 크게 환영했다. 경제적으로 환태평양경제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을 통해 동남아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묶으려 했다. 동남아 개별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서도 큰 성과가 있었다.
분명 냉전기간 중 동남아, 아태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 방지라는 분명한 정책 목표를 가졌던 미국은 동남아를 공산주의 봉쇄의 한 축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권위주의 통치와 인권 탄압이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동남아 지역의 반공정권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다했다. 필리핀, 태국과의 군사동맹이 미국의 대동남아 정책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직접적으로 동맹은 아니지만 반공 입장을 가진 국가들, 즉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경제성장은 미국 시장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으로 인해 가능했다. 비록 패전으로 기록되었지만 남베트남을 지원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것도 이런 미국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미국으로부터 거의 대척점에 있는 지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지역은 냉전기간 중 끊임없는 미국의 관심 대상이었다.1
1990년대 냉전의 해체는 미국의 전략적 관심을 일순간에 변화시켰다.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 전략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이 왔다. 더욱이 미국은 만성적인 재정적자, 무역적자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더 이상 미국의 자원을 나누어 동남아 지역 국가들을 지원하거나 미국이 동남아 지역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동남아 탈출을 명확히 보여준 것은 필리핀에서 미군의 철수였다. 아세안 국가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빠져나간 자리에 생긴 힘의 공백을 다자 협력으로 메우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런 노력은 안보분야에서 아세안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으로 귀결되었다. 1997년 경제 위기를 계기로 생긴 아세안+3(ASEAN+3),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까지 지역 국가들의 자생적 다자협력 노력에 미국은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고 동남아 국가들도 크게 미국을 찾지 않았다.
911 이후 부시 행정부는 동남아를 테러와의 전쟁에서 제2전선(the second front)으로 설정했다.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의 테러 사건을 중동의 테러리즘과 연계한 인식이다. 1990년 초 냉전이 끝난 후 10년만에 미국이 다시 동남아로 돌아왔다. 부시 정부의 이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동남아 정책은 동남아 국가들의 이익을 반영하지 못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인식이 되면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가에서 큰 반발을 샀다.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큰 무슬림 국가로 불리는 인도네시아, 역시 인구의 60% 이상이 무슬림이고 집권 세력의 통치 정당성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나오는 말레이시아에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환영 받지 못했다.
TPP 사라진 자리에 무역 압력만 남아
지금 예상되는 트럼프 정부의 대외경제정책은 동남아 국가에게 심각한 도전이 된다. 피봇 정책 하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크게 기대했던 환태평양경제협정은 사라질 것이다. 대신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무역 압력이 늘어날 전망이다. 동남아 국가에 대한 무역 압력은 그동안 미국의 동남아 정책에서 전례 없던 일이다. 트럼프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주로 중국을 겨냥하여 미국이 대외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으며, 이는 곧 미국인의 일자리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무역정책은 분명 이전 오바마 정부에 비해서 공격적으로 무역 상대국을 압박하는 색채를 띨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 정부의 구체적 대동남아 무역, 경제정책은 두 가지 형태 즉, 미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는 국가에 대한 시장 개방 압력, 그리고 미국이 맺고 있는 자유무역 협정에 관한 재고로 나타날 것이다.
TPP와 함께 사라진 21세기 아시아 경제 질서
트럼프 정부는 TPP 비준안을 의회에 제출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따라 TPP는 무산될 것이 확실하다.2 트럼프는 선거 운동 기간 중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와 한미자유무역협정(Korea-US Free Trade Agreement: KORUSFTA) 등 양자 협정에 관해서 많은 언급을 했고, 이를 수정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기존 체결된 자유 무역협정 외에 또 많이 언급된 자유 무역협정이 TPP이다. TPP는 현재 가입한 12개 국가 중 적어도 6개 국가 이상이 비준을 해야 하고, 비준을 한 6개국의 GDP 합은 원 12개 국가 GDP 합 (27.64 조 달러)의 85%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2015년 미국의 GDP는 총 17조 달러로 전체 TPP 국가 GDP의 60%를 넘는다. 다시 말해 미국이 TPP를 비준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11개 국가들로서는 TPP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고 TPP는 무산된다.
그림1. TPP 12개국 GDP 합에서 각 국가가 차지하는 비율, 2015년
미국 정부 스스로 자주 강조했듯이 TPP는 단순히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다. 미국 정부의 표현을 빌자면 TPP는 매우 포괄적이고 수준 높은 경제협정으로 21세기 아태 지역의 경제질서를 규정하게 하려는 의도였다.3 이를 보다 전략적으로 해석하면 TPP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확장하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막고 아태 경제질서가 중국의 의도대로 재편되는 것을 막는 수단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형성해 온 경제질서는 물론이고 지역 전반의 질서를 다시 강화하려는 미국의 구상이다. 트럼프 정부의 TPP 포기는 단순히 하나의 지역 자유무역협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었던 기존의 경제질서를 강화하려는 시도의 포기이다. 나아가 경제질서를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질서가 중국의 의도대로 재편되는 것을 막을 수단을 포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TPP 포기와 그에 따른 TPP 협정 전체의 좌초는 동남아 국가, 특히 이미 TPP에 들어가 있는 국가들에게 크게 실망스러운 소식이다. 이미 TPP 협상에 들어가 있는 동남아 국가들은 TPP를 통해서 미국의 아시아 지역 관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전략적 계산을 하고 있었다. 동남아 지역 국가들은 특정 강대국의 배제가 아닌 미국이 주도하는 TPP와 사실상 중국의 경제력이 지배적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두 가지를 모두 실현시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경제적 이익을 얻어내는 한편, 어느 하나의 강대국이 지역 전체에 경제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을 막는 헤징(hedging) 전략이 TPP의 좌초로 인해 자질을 빚을 위기에 처해 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 보더라도 미국의 TPP 비준 실패는 많은 잠재적 경제 이익의 손실을 의미한다. 말레이시아는 TPP를 통해서 제조업 수출의 성장, 해외 투자의 유치 확대, TPP 회원국의 정부조달 시장 접근을 기대했다. 베트남과 싱가포르의 기대는 더욱 구체적이다. 베트남은 섬유, 의류 산업을 중심으로 미국과 일본 시장 접근 확대를 기대했다. 이미 베트남은 동남아 국가 중 미국과 무역에서 가장 큰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베트남의 제조업이 이들 시장에 접근할 기회가 증가하면 이 산업들에 대한 해외 투자가 따라 증가할 것이고 이는 베트남 경제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했다. 의류, 섬유 산업 등 제조업 발전에 따른 전, 후방 산업이 동반 성장하는 효과도 기대했다. 보다 근본적으로 베트남은 TPP를 통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국내 경제 개혁의 추동력을 얻으려 했다. TPP의 노동, 환경 기준을 구실로 많은 반대가 예상되는 국내 경제 개혁을 추진하려 했는데, TPP의 좌절로 국내 경제 개혁의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싱가포르는 직접 수출의 확대와 같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TPP의 성사에 따른 역내 무역 전반의 증가에 큰 기대를 했다. 역내 무역 증가는 덩달아 무역 관련된 서비스 수요의 증가를 의미하고 싱가포르는 이 부분에 막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TPP에 의해 아세안 각국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이는 간접적으로 싱가포르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외국 자본 진출이 제한되었던 동남아 국가의 TPP 기준에 따른 의료 시장 개방 등은 싱가포르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회 창출을 의미했다. 아세안 국가들의 경제 성장과 아세안 역내 무역 증가 역시 싱가포르의 항구 등 무역 관련 서비스에 대한 수요 증가를 의미했다. 미국의 TPP 포기에 따라서 동남아의 TPP 참여국들이 기대하던 경제적 이익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아세안과 무역 마찰 가능성
트럼프 정부하에서 동남아 국가들은 무역 역조 개선과 시장 개방 압력 하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선거 운동 기간 중 주로 중국을 겨냥해 대미 무역 흑자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불공정 무역으로 인해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손해를 보고 있으며, 이는 곧 미국인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가져온다는 주장이다. 불공적 무역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중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주의 등 다양한 정치, 외교, 군사 분야의 비판으로까지 확대된다.4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면 이런 불공정 무역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공약을 했고 이는 곧 무역 상대 국가에 대한 무역 압력, 시장개방 압박으로 이어질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도 트럼프의 불공정 무역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세안 10개국은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아세안은 미국의 네번째 큰 무역 상대로 연간 무역액은 2,160억 달러이고 미-아세안 무역은 미-일 무역을 앞지른다.5 같은 통계에 의하면 미-아세안 무역으로 인해 유지되는 미국 내 일자리는 총 37만개에 달한다. 2007년 통계에 의하면 아세안 입장에서 미국은 제2위의 무역 대상 국가였다. 2015년 통계에서 미국의 순위는 중국, 일본, EU에 이어 4위의 무역대상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6 2015년 기준으로 미국의 대 아세안 투자는 총 136억 달러로 EU, 일본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의 대 아세안 투자 82억 달러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 표면적으로 아세안과 미국의 경제 관계는 매우 긴밀하며 중요하다.
그림2. 주요 국가의 대아세안 직접 투자7
미-아세안 간의 긴밀한 무역, 투자 관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하에서 미-아세안 무역관계는 큰 잠재적 문제를 안고 있다. 미 상무부(Department of Commerce)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과 무역 관계를 가진 국가들 중에서 가장 큰 무역 흑자를 기록한 국가는 중국으로, 2015년 약 3,600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놀라운 점은 미국과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하는 국가 30위 안에 동남아 국가가 5개(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캄보디아)가 포함되며 필리핀도 33위를 차지한다. 아세안 회원국 10개 가운데 7개국(상기 6개국+라오스)이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보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이 기록하는 흑자는 총 870억 달러에 달한다. 이 7개국의 무역 흑자를 합하면 중국에 이어 제2위의 무역 흑자국이 된다.8
표1. 주요 국가의 대미 무역 흑자 규모, 단위: 백만 달러9
미국이 제4위의 무역 대상국(지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트럼프가 내세우는 대외경제정책 특성을 보면 무역압력이 충분히 예상된다.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 미국과 무역에서 많은 흑자를 내고 있는 주요 국가들을 대상으로 시장 개방, 무역 자유화 압력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정부보조금 삭제 요구, 외국 자본의 시장 진입을 막는 규제 철폐 요구, 정부 조달 개방 및 자유화, 반덤핑 관세 부과, 환율 조작 시정 요구 등 다양한 압력이 가능하다.10 이런 압력은 아세안 10개국 중 대미 무역 흑자가 큰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 집중될 것이다. 특히 개별 국가의 경우 가장 많은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여전히 공산당 일당 통치하의 국가 주도 경제 성격을 크게 띠는 베트남이 첫 번째 압력 대상이 될 것이다.11
동맹과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관심도 사라질 위기
트럼프 행정부의 동남아 정책에서 가장 예측이 어려운 부분은 동맹 문제와 군사적 관여 문제이다. 동맹 중시의 공화당 외교정책 전통, 트럼프의 군사력에 대한 강조는 동남아 국가 입장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반면 동맹 파트너의 책임과 부담, 미국의 이익을 강조하는 트럼프의 성향은 동맹과 군사적 관여에 부정적 신호를 보내고 있다. TPP와 같은 지역무역자유협정이 없어도, 미국의 대동남아 다자적 관여가 약해도 미국과 동남아 국가의 양자 관계는 유지된다. 냉전 종식부터 오바마 정부 이전까지 미국과 동남아 관계가 그랬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도 동맹과 군사적 관여는 유지되어왔다. 지금처럼 중국으로부터 오는 안보 위협과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미국-동남아 간 동맹과 군사적 관여 부분에서 관계가 벌어지게 된다면 미국과 동남아 국가들은 서로 완전히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양자 동맹관계의 약화
트럼프 당선자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동맹국들의 안보를 미국이 책임지는 것이 부당함을 주장했다. 동맹국들이 자신들의 안보 문제에 더 큰 부담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트럼프의 주장을 확대하면 트럼프 행정부하에서 미국과 동맹 관계는 근본적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반면 보다 전통적인 공화당 주류의 외교 안보 정책은 주로 동맹 위주로 전개되어 왔다. 동맹이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이었다. 이 두 가지 방향은 서로 모순된다. 여기서 하나의 타협점이 도출된다. 미국의 안보 이익에 긴급한 동맹 관계는 동맹국에 부담을 더 지우는 선에서 유지되지만, 긴급하지 않은 동맹의 경우 버려질 가능성이 높다. 동남아의 동맹국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동남아에서 미국은 필리핀, 태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남중국해 문제, 중국의 아태 지역 영향력 확장이란 변수를 생각하지 않으면 필리핀, 태국과의 동맹은 긴급하지 않다. 이 두 국가와 미국의 동맹관계는 최근 몇 년간 불협화음을 만들어왔다. 태국은 2014년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하에 있다.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비난에 직면한 후 동맹 관계를 포함해 미국과 태국 양자 관계는 좋지 않은 상태다. 필리핀은 직전 아키노 정부하에서 남중국해 영토 분쟁으로 인해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지난 2016년 6월 말 두테르테 정부가 들어 오면서 양자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나타난 인권 문제를 거론한 미국에 대해 두테르테 대통령이 불만을 터뜨리며 악화된 관계는 미국과 동맹 단절이라는 언급까지 나오는 상황에 이르렀다.12
트럼프 당선자는 특별히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다. 선거 운동 기간 중 민주주의나 인권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태국의 군사정부, 필리핀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양자 관계는 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맹 문제는 다르다. 다른 지역 다른 국가와의 동맹과 동남아 국가와의 동맹은 성격이 다르다. 다른 국가와의 동맹에서는 동맹국들이 일정 부분 군사적•재정적으로 동맹 유지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반면 필리핀, 태국과의 동맹은 취약한 경제력과 더 취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상호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닌 미국이 동맹국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관계에 가깝다. 동맹국의 역할과 재정부담을 더 기대하는 트럼프로서는 필리핀, 태국과 동맹관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남중국해 문제를 미국이 중국과 어떻게 풀어가는가에 따라서 미국-필리핀, 미국-태국 동맹은 동맹으로서 의미를 거의 상실할 것이다.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군사적 개입 감소
미국과 동남아 동맹 국가의 관계, 그리고 보다 넓게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적 관여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의 남중국해 문제 개입이다. 미국에게 남중국해 문제의 핵심은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를 중요한 안보 문제로 생각한다면 미국의 대동남아 군사적 관여, 그리고 동맹-군사협력 파트너와 긴밀한 관계 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를 미국의 직접 이익과 상관없는 아시아 지역의 국지적 문제로 인식한다면 동맹관계와 미국의 군사적 관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정부하에서 미국의 남중국해 문제 대응, 보다 넓게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관여는 세 가지 특징 즉, 역외 균형(off-shore balancing), 반응적(reactive) 관여, 그리고 새로운 미-중 관계 설정으로 요약될 것이다.
트럼프 정부하에서 군에 부여되는 중요성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군에 투입되는 예산도 늘어날 전망이다. 아시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군과 군사력에 대한 강조가 남중국해 문제나 지역 안보 문제에 미국이 보다 강한 정책을 취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미국의 안보 이익을 보다 좁게 규정하고, 미국의 이익, 미국이 감당해야 할 비용 문제를 앞세운다면 미국의 대아시아 안보, 군사적 관여는 역외 균형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오바마 정부하에서 대아시아 군사적 관여가 강화되었다. 호주, 싱가포르, 필리핀, 베트남 등에서 눈에 띄는 이니셔티브들이 있었다.13 이런 강화된 군사적 관여에도 불구하고 지역 국가들은 오바마 정부의 대아태지역 안보 관여, 특히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개입이 불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역외 균형을 강조한다면 이런 군사협력들이 유명무실해지거나 약해질 것이고 미국의 군사적 관여는 매우 취약해질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안보 문제 관여나 남중국해 문제 관여는 보다 반응적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관여가 반응적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은 아시아 안보 문제나 남중국해 문제에 늘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안보 사안, 분쟁이 생길 경우 이런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만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 반응적 성격은 역외 균형 정책과 짝을 이룬다. 미국이 역외 균형 전략을 선택한다면 모든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즉각 반응할 수 없다. 중요한 분쟁 사안에만 선택적으로 개입하게 될 것이다. 역외에서 중요한 사안에 선택적으로 개입할 때 그 효과는 분명 감소한다. 지리적 거리로 인해 군사적 대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살라미 전술(salami tactic)을 통제하기에 효과적이지 않다. 반응적 역외 균형 전략이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지역국가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상적 대응 및 1차 저지선을 동남아 국가들이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동맹 관련 정책을 볼 때, 그리고 약해진 아태 지역 군사적 관여를 감안하면 동남아 국가들의 협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적 관여와 남중국해 문제 대응의 세 번째 변수는 트럼프 정부하에서 미-중 관계다. 한 가지 확실한 정책 방향이 있다. 선거 운동 기간 중 트럼프의 발언들을 놓고 볼 때 미국과 중국 사이 불공정 무역 등 경제적 갈등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무역 적자 등 경제적 문제에 관해 미국과 중국 간 일정한 협상이 진행된다면 중국의 경제적 양보 대신 반대급부로 지역에서 중국의 헤게모니가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양보를 대가로 중국이 제시했던 신형대국관계, 혹은 아태 지역을 중국의 영향권과 미국의 영향권으로 양분하는 타협이 가능하다. 이 경우 남중국해는 중국의 핵심 이익으로 포함되고 미국은 남중국해 문제에서 거의 손을 떼게 될 것이다. 설사 경제적으로 중국과 미국 사이에 타협이 되지 않고 갈등과 긴장 관계가 계속된다는 전제로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에 지속 개입하더라도 분명 역외 균형 전략, 반응적 전략으로 이전과 같은 군사적 관여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이 불충분 하지만 역외 균형, 반응적 전략으로 지속적으로 남중국해 문제에 개입하고 군사적 관여를 강하게 유지한다 해도 동남아 국가들 입장에서 근본적인 의문은 남는다. 미국은 남중국해 문제에서 항행의 자유를 넘어 영토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해왔다. 오바마 행정부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 일정한 관여를 하던 기간에도 만약 중국이 필리핀의 영토적 이해를 침해하는 경우 미국이 동맹인 필리핀을 지켜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최대치와 동남아 국가들이 바라는 미국의 관여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 트럼프 정부하에서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를 한다고 해도 동남아 국가들과 중국 사이의 영토 문제는 별개로 남을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
협력 여지가 있는 테러와의 전쟁
동맹, 남중국해와 군사적 관여에 이은 세 번째 이슈는 테러와의 전쟁이다. 앞선 두 분야와 달리 테러와의 전쟁은 트럼프가 선거 운동 기간에도 여러 번 강조한 부분이고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이슈이다. 동맹이나 남중국해 문제와 달리 미국 신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동남아 국가는 긴밀한 협력 대상이 될 수 있다. 911 직후 부시 행정부에서 이미 동남아를 테러와의 전쟁에서 두 번째 전선으로 선포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남아로 테러와의 전쟁을 확대한다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필리핀 등이 적극 협력 대상이 되고 동남아 국가와 군사적 협력이 긴밀해 질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동남아 국가들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적극적 협력을 꺼린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 시절 동남아 국가와 대테러 협력을 확대하려고 했으나 테러와의 전쟁이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인식되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면서 큰 효과가 없었다. 무슬림 인구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군사적으로 긴밀히 협력할 여지는 매우 작다. 국내 정치적 부담을 지면서 미국과 협력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중에서 예외는 필리핀이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도 이미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상태이므로 만약 트럼프 정부가 동남아로 테러와의 전쟁을 확대한다면 필리핀이 협력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두테르테가 미국과의 군사적 협력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는데, 이런 발언을 어떻게 뒤집느냐 하는 것이다.
아태 다자 무대에서 철수하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하에서 아태 혹은 동남아 정책 가운데 경제와 군사를 제외하면 지역 개념, 다자협력 그리고 가치의 문제가 남는다. 이런 부분들이 트럼프 정부하에서 중요한 아시아 외교정책 요소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아시아, 아시아-태평양, 인도-퍼시픽 처럼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고 정책을 펼 때 기본이 되는 것이 지역 개념 혹은 지역 인식이다. 지역 개념은 다자협력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함께 트럼프 정부하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잊혀진 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중국과 지정학적 경쟁을 고려하지 않는 방향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이 형성될 경우 지역개념과 다자협력은 더욱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 등을 포함한 가치의 문제도 트럼프 정부 외교정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희미해지는 지역 개념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에서 아시아, 동남아 등 지역을 단위로 상정한 총체적 외교정책은 사라질 것이다. 특히 이전 오바마 정부와 비교해 트럼프 정부에서 지역 개념과 정책이 실종되는 상황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지역 개념을 상정했다. 하나는 오마바 정부의 대아시아 정책 핵심인 아시아 피봇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퍼시픽이라는 새로운 지역 개념이다. 오바마 정부는 아시아 피봇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군사, 경제, 외교적 전략들을 망라하여 종합적인 대아시아 정책을 구상했다. 피봇 정책의 성패와 상관없이 피봇 정책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미국이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한다는 인상을 주었고 지역 국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인도-퍼시픽이라는 인도와 인도양을 포함한 새로운 지정학적 개념은 경제적으로 인도를 연결하는 동시에 서쪽으로 펼쳐 나가는 중국의 지정학적 야심을 제어하기 위한 개념으로 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 등 지역 강대국들과 연대하는 전략이 핵심이었다.14
이런 시도들은 트럼프 정부하에서 사라질 것이다. 현재 드러난 트럼프 개인의 외교정책 성향, 그리고 공화당의 전통적 외교정책 성향상 ‘아시아’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외교정책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지역을 단위로 하는 정책은 대부분 동맹 국가에 대한 외교정책 혹은 양자 외교정책으로 대체될 것이다. 더 나아가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아시아 지역 안보 책임을 아시아 지역 국가로 돌리고 비용이 드는 미국의 개입을 최소화 할 것이다. 미국의 이익과 관련이 있는 아시아 지역의 경제 문제나 안보 문제에 대해서 아시아 단위 혹은 아태 단위에서 판단하기 보다는 개별 사안들을 고립된 사안으로 보고, 종합 처방이나 정책을 가져가는 대신 특정 사안별로 개별적 대응을 할 것이다.
중국의 확장을 막는 인도-퍼시픽 개념도 약해지거나 실종될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정부하에서 인도-퍼시픽은 중국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지역의 개발도상국들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포괄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대응하는 개념이었다. 트럼프 정부의 대중국 정책이 미국의 직접 경제 이익에 국한된다면 중국의 영향력 확장 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TPP를 통한 중국적 경제질서의 확장 저지는 이미 포기한 상태이다. 아시아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증가는 미국에게 큰 전략적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중요한 동맹 국가를 제외한 다른 지역 국가들이 방기(abandon) 되고 중국이 서남아, 중앙아 지역의 개발도상국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국은 큰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다자주의에 대한 무관심과 아세안의 딜레마
트럼프 정부하에서 일반적인 다자주의,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다자주의에 대한 강조는 더 이상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미국의 다자주의에 대한 관심 감소는 무엇보다 지역 다자협의체 및 포럼 참석, 그리고 참석자의 정부 내 지위에 의해서 입증될 것이다. 트럼프 개인은 물론이고 공화당의 전통적 외교정책에서 다자주의가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트럼프 정부 하에서 아시아 지역 다자회의 참여 수준은 기껏해야 부시 정부에서 아시아 지역 다자 틀에 참여하는 수준을 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외교는 동맹중심의 양자 외교 전통이 보다 중요하다.
오바마 정부는 아시아 지역의 다자협력체에 큰 관심을 보였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세안안보포럼, 동아시아정상회의, 아세안국방장관회의플러스(ASEAN Defense Ministers’ Meeting Plus: ADMM+) 등에 대통령, 국무장관, 그리고 국방장관이 빠지지 않고 참여해왔다. 미국은 2010년 아세안우호협력조약(ASEAN 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ASEAN TAC)에 서명을 하고 EAS 회원국 자격을 획득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동남아 국가들의 TAC 서명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동남아 지역에서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TAC의 조항 때문에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정부의 피봇 정책, 다자협력 중시라는 외교정책 노선은 아시아 국가와 다자적 관여를 위해 기존 관성을 깼다. 이런 미국의 지역 다자주의에 대한 적극적 참여는 많은 아시아 국가, 특히 아시아 지역 다자협력을 주도하는 아세안 국가들에게 크게 환영 받았다.
트럼프 정부 들어서 아시아 지역의 다자협력에 대한 관심이 감소하고, 다자 협의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아세안 국가들에게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지역 다자 기구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경우 이런 다자 기구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여기에 참여하는 지역 국가들의 의지도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약소국의 모임인 아세안이 지역 국제 관계에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 아세안이 지역에서 큰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강대국들의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지지, 강대국들의 다자협력 참여였다. 아세안은 오랫동안 아시아 다자 기구의 핵심은 아세안이라고 주장해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지역 다자협력에서 아세안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을 주장했으며, 강대국들의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지지를 얻어 냈다. 트럼프 정부하에서 이런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지지는 사라지거나 극도로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역 다자협력에 대해 미국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은 중국에게는 역설적으로 좋은 기회가 된다. 1997년 시작된 동아시아 지역협력 초기 미국은 지역협력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EAS 출범 이후 미국이 배제된 아시아 지역 다자 협력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지속 증가했고 미국은 점차 지역협력에서 증가하는 중국의 영향력을 우려하게 되었다. 미국이 TAC에 서명을 하고 EAS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지역 다자 기구에서 중국의 배타적 영향력을 경계하고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이 지역 다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해도 일본, 인도 등이 중국에 대한 균형자 역할을 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지역 다자협력에서 중국이 보다 큰 발언권을 가지고 주도하는 것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는 지역 다자협력체에서 중국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크게 증대될 수도 있다.
가치가 배제된 실용주의 외교정책
마지막으로 트럼프 정부하에서 민주주의, 인권 등 가치 문제는 외교정책의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외교정책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 등 가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다른 국가와 양자 관계가 불편해지더라도 그에 상관없이 가치 문제는 일관되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자는 선거 운동 기간 중 국내 정책이나 대외정책을 막론하고 가치의 문제를 언급한 적이 별로 없다. 이런 태도는 그의 외교정책에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트럼프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해 매우 실용적인 외교정책을 펴더라도 이는 가치를 배제한 실용주의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미국이 대외정책에서 가치를 배제한 방향으로 나간다면 동남아의 몇몇 개별 국가와 미국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가치를 배제한 실용주의가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는 미얀마이다. 오랫동안 군사독재하에 있었던 미얀마는 2011년, 즉 미국의 피봇 정책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 군정을 끝내고 자유화의 길로 들어섰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미얀마의 정치적 변화는 동남아시아 지역 국가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관여 정책에서 가장 큰 성공으로 꼽힌다.15 오바마 정부는 미얀마의 자유화 유지, 민주화로의 진행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경제적 지원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가치를 배제한 실용주의 방향으로 나간다고 가정하면 미얀마의 안정적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 수도 있다. 미얀마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원 감소는 이제 막 시작한 미얀마 민간정부의 민주화 실험에 큰 시련이 될 전망이다.
반대로 민주주의, 인권 등 가치 문제로 인해 오바마 정부의 미국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던 국가들에게 트럼프의 가치를 배제한 실용주의는 관계 개선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필리핀 에서는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 이후 마약과의 전쟁에서 벌어진 비사법적 살인 등이 큰 인권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필리핀의 마약과 전쟁에 우려 섞인 목소리를 자주 내왔고 이는 두테르테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 간의 불편한 관계로 이어져 양국 동맹까지 위험한 지경에 달했다. 이런 얼어붙은 양자 관계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두테르테의 정책에 지지를 보내거나 최소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가 다시 개선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국 역시 2014년 쿠데타 이후 지속적으로 군정에 있고, 2016년 개정된 헌법이 비민주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군정의 지속으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태국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미-태국 동맹관계가 약화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치를 배제한 실용주의 노선은 태국의 군정이나 비민주적 방향으로 개정된 헌법에 대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이에 따라 태국과 미국 사이 관계 개선도 예상된다.
트럼프가 지운 피봇의 공백에 확산되는 중국 영향력
트럼프 정부하에서 미국의 대 동남아 정책은 분명 이전 오바마 정부에 비해서 크게 약화될 것이다. 그에 따라 동남아와 아세안은 미국 외교정책에서 매우 주변적 이슈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경제적으로는 TPP는 이미 포기된 것이나 다름 없고 동남아에 대한 무역 압박이 예상된다. 동맹 관계도 그리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미국의 군사적 관여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개입 역시 역외 균형, 반응적 전략으로 최소한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관심을 가진 테러와의 전쟁은 오히려 동남아에서 역효과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지역에 대한 종합적 정책은 사라질 것이고 미국의 아시아 지역 다자협력 참여 약화로 아세안의 전략적 중요성도 감소될 것이다. 가치가 배제된 실용주의 외교 노선이 동남아 지역에 적용될 것이며 이에 따라 개별 국가와 미국 사이 양자 관계도 조정이 불가피 하다.
이런 모든 정책 방향은 지난 8년간 오바마의 피봇 정책의 흔적이 거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지워질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탈냉전 이후 약 20년간 미국의 대 동남아, 아세안 방면 무관심이 다시 돌아오는 복고를 경험하게 된다. 지난 8년간 오바마의 피봇 정책은 아시아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기대를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이런 정점에서 갑작스러운 아시아에 대한 관심 추락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 것이고 많은 외교적, 전략적 혼선을 가져올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 입장에서는 지난 8년간 피봇 정책하에서 아시아 지역에 투입된 엄청난 외교적, 군사적, 전략적 투자가 낭비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이후 미국이 다시 아시아 지역에 진입할 때 투자해야 하는 비용은 더욱 많아지고 진입장벽은 더욱 높을 수도 있다.
이런 미국의 대동남아, 아세안 정책 변화는 중국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중국은 2009년 이후 남중국해에서 자기 주장을 강화하면서 동남아 방면에서 많은 신뢰를 잃었다. 1990년대 초부터 동남아 국가와 20여 년간 쌓아온 신뢰가 남중국해에서 자기주장 강화, 그리고 미국의 피봇 정책 앞에서 상당 부분 상실되었다. 중국은 트럼프 정부 출범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압력이라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반면 동남아, 남중국해 방면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확대할 수 있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경제적 압박을 동남아 국가들도 유사하게 받을 것이다. 동남아 국가와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협력에서 미국의 관여가 약화된 틈을 타서 중국의 입지를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아세안과 동남아를 놓고 벌어지는 미-중 경쟁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려 한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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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shington DC의 정확한 대척점은 호주 서남부 해양지점으로 동남아 지역과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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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Stephen Dinan. 2016. “Donald Trump to withdraw U.S. from Asian trade pact on his first day in office” The Washington Times. November 21, 2016. (http://www.washingtontimes.com/news/2016/nov/21/donald-trump-withdraw-us-trans-pacific-partne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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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USTR Letter to Congress on Intention to Enter Negotiations for the Trans-Pacific Partnership Agreement (https://ustr.gov/sites/default/files/uploads/agreements/morocco/pdfs/TPP%20Congressional%20Notificatio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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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lexander Gray and Peter Navarro. 2016. “Donald Trump’s Peace Through Strength Vision for the Asia-Pacific” Foreign Policy. November 7, 2016. (http://foreignpolicy.com/2016/11/07/donald-trumps-peace-through-strength-vision-for-the-asia-pacif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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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White House. 2015. “Fact sheet: US-ASEAN Economic Engagement” November 21, 2015. (https://www.whitehouse.gov/the-press-office/2015/11/21/fact-sheet-us-asean-economic-eng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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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ASEAN Secretariat. 2016. ASEAN Economic Community Chartbook 2016. (http://asean.org/storage/2012/05/13Content-AEC-Chartbook-20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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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ASEAN Secretariat. 2016. “Top ten sources of foreign direct Investment Inflows in ASEAN” (http://asean.org/storage/2015/09/Table-27_oct2016.pdf)
- 8.Global Patters of US Merchandise Trade, TradeStats Express by International Trade Administration, US Department of Commerce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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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Global Patters of US Merchandise Trade, TradeStats Express by International Trade Administration, US Department of Commerce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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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편 TPP에서 미국이 탈퇴하는 것이 실제로 미국 중산층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미국이 TPP에 가입하는 것이 잃어버린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다시 말해 동남아 개발도상국들의 환경, 노동 기준이 강화되면 저임금, 저비용이라는 동남아 국가들의 장점이 사라지고 미국에서 생산하는 것과 동남아에서 생산하는 것의 생산비용 차이가 줄어들어 미국의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서는 Alan Samuels. 2016. “TPP’s Death Won’t Help the American Middle Class” The Atlantic. November 15, 2016. (http://www.theatlantic.com/business/archive/2016/11/tpps-death-wont-help-the-american-middle-class/507683/)을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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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대미 무역 흑자가 큰 동남아 국가들(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이 미국의 피봇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협력 파트너였고, 베트남을 제외하고 최근 중국과 급속히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입장에서 베트남은 남중국해 문제를 다루는 데 가장 중요한 전략적 협력 상대인 동시에 가장 큰 무역 적자를 보고 있는 국가이다. 경제 문제와 남중국해 안보 문제 사이에 딜레마가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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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mily Rauhala. 2016. “Philippines’ Duterte called for a ‘separation’ from U.S. He is now backtracking” The Washington Post. October 21, 2016.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rldviews/wp/2016/10/21/the-backtracking-begins-duterte-ally-softens-philippines-separation-fro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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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오바마 정부하에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호주에 해병대를 순환 배치하고 미 군용 항공기의 방문도 증가시켰다. 군사 동맹이 아닌 싱가포르에 해군 지원 센터(Navy Regional Center Singapore: NRCS)를 만들고, 군사적으로 소원했던 필리핀과 2014년 확대방위협력협정 (Enhanced Defense Cooperation Agreement: EDCA)을 체결했다. 베트남에 무기수출 금지를 폐지하고 고위급 군사교류를 확대하는 등 베트남과 군사협력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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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재현.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No. 20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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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Kurt Campbell. 2016. The Pivot: The Future of American Statecraft in Asia. Twelve: New York. Pp. 13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