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기후변화 외교로의 복귀?
2014년 9월 23일, 한국의 모든 언론은 당일 UN기후정상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UN외교 데뷔를 전했다.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는 집권 후 처음으로 국제연합(UN)이라는 다자회의 최고의 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외교적 입장을 밝혔다는 의미가 있지만, 국가적 차원으로는 지난 수년간 한국 정부가 중견국가(middle-power) 외교의 전형으로 다듬어 왔던 ‘녹색외교(Green Diplomacy)’의 실천의지를 국제 사회에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기조 연설을 통해 지난 해 12월 인천 송도에서 공식 출범한 녹색기후기금(Green Climate Fund, GCF)에 1억 달러에 달하는 기여를 약속하면서 기후변화 국제협력 분야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공언한 것이다. 이 금액은 4천만 달러의 신탁기금 및 900만 달러의 사무국 운영경비 지원 등 녹색기후기금 사무국의 한국 유치를 위해 약속했던 금액의 배에 달하는 것으로, 그 동안 고삐를 놓쳤던 기후변화 대응 국제협력에서의 외교적 리더십, 즉 녹색외교를 통한 국제적 리더십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녹색외교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을 공유하는 중견국가로서 아무도 이끌려 하지 않아 힘의 공백이 있었던 기후변화 협력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생각이 비슷했던(‘like-minded’) 국가들, 즉 멕시코, 인도네시아, 호주, 터키 등의 국가들과 더불어 G-8 중심의 국제질서를 G-20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로 변화시키려는 계기를 제공했을 만큼,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견국가 외교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견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녹색외교를 통해 국제질서 형성에서의 변방국가가 아닌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안겨주기도 했다.1 그러나 우리의 녹색외교가 강력한 국가적 역량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협력 분야에서 공헌 및 선도력 행사라는 외교정책으로서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기후변화 대응 국제협력 분야에서 지도력과 영향력 향상은 국내에서의 강력한 기후변화 대응 정책의 수립과 집행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한 국가의 국제적 명성은 물론 국제협력에서의 외교적 영향력은 그 국가의 국내외적 정책에서의 일관성 없이는 얻기 힘들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선거로 선출되는 최고정책결정자의 지위는 국내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경향을 지니게 되고, 이러한 정치적 고려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이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다. 국내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선한 정책 결정으로 인해 외교적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는 패러독스(paradox)가 존재하는 것이다.2 아쉽게도 현 박근혜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의 추진은 바로 전형적인 동일한 이슈에 대한 국내외 정책 간의 패러독스를 보여주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에서 이를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여, 민간 주도의 기술개발과 온실가스 감축을 도모하고, 자국의 역량과 여건에 부응하는 기여”를 약속했던 이번 UN기후정상회의에서의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리더십과는 달리, 국내 정책 결정에서는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 정책의 추진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기후변화 대응 국내정책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탄소배출권거래제도(Emission Trading Scheme, ETS)의 시행을 앞두고 결정된 정부의 <국가배출권할당계획>의 내용은 국제사회에 대해 공언하고 약속했던 정책지향점과는 매우 상충하는 것으로, 국내외 정책 간의 불일치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기후변화 대응 국내외 정책 간의 패러독스는 녹색외교를 펼침에 있어 그 리더십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게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기후변화 대응 국제협력 분야에서 대한민국이 쌓아왔던 모범적인 중견국가로서의 글로벌 리더십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공언과 일치하는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 국내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본 글에서는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 국제협력 외교와 국내 정책 추진으로 쌓아왔던 정책적 유산의 의미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하여, 기후변화 대응 핵심정책으로서 ETS의 도입 의미를 재고함으로써 제도 도입의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한 1차 계획연도(2015~2017) 이후, 2차 계획연도(2018~2020)의 시행계획 마련에서는 반드시 ETS가 지닌 본래의 도입 취지 및 제도의 목적, 그리고 중장기적 경제효과가 더욱 고려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본래 계획보다 완화된 ETS의 시행에 따라 온실가스 감축효과나 녹색 신기술 및 신사업의 수요가 감소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를 보완하는 동시에 창조경제 아젠다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녹색기술의 육성 및 지원 정책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기후변화 대응 정책 유산(legacy)으로서의 탄소배출권거래제도
지난 몇 년간, 국제사회는 한국을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저탄소 사회를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모범적인 국가로 인정해왔다.3 이러한 국제적 평가는 실제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주도하에 <글로벌녹색성장기구(Global Green Growth Institute, GGGI)>라는 국제기구를 창립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와 G20, OECD 등 국제협력을 도모하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이끌어가는 국제회의체에서 의제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나라의 녹색외교 및 관련 분야 국제협력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가 매우 긍정적이었음은 독일, 스위스 등과 같은 선진국들과의 경쟁 속에서도 앞으로 기후변화 관련 분야의 세계은행 역할을 담당할 <녹색기후기금> 사무국을 유치할 수 있었던 사실에서도 증명되었다. 녹색기후기금 사무국의 한국 유치는 전 지구적 기후변화 대응 재원의 마련과 운영에 한국이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며, 국내외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우리나라 녹색외교의 결실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결코 외교적인 전략이나 정책만의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즉, 강력한 국내적 제도적 기반과 정책추진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기후변화 관련 정책의지와 지도력이 국제사회에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0년대 말의 한국의 강력한 기후변화 정책은 <국가중기온실가스감축목표>(2009)를 통해 발표되었던 2020년 배출전망치(Business As Usual, BAU)4 대비 30% 감축이라는 목표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과거, 정부의 강력한 기후변화정책은 단지 정부만의 정책의지뿐 만이 아니라 국회나 여론 등의 지지를 통해 법제화되고 제도화됨으로써 더욱 큰 추동력을 얻어 실현될 수 있었다. 정부의 정책의지와 더불어 국회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대계라는 점에서 여ㆍ야의 정치적 대립 없이 일련의 입법들을 통해 한국 기후변화정책의 제도화를 도모함으로써 범국가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강력한 국내 정책적, 제도적 기반은 국제사회로부터 기후변화 대응에 임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기후변화 정책의 제도화는 여ㆍ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정된 일련의 입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입법은 기후변화 대응 기본법인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의 제정이었다.5 이 기본법의 제정 이전 우리나라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에너지 혹은 산업 정책 등의 관련법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 금융, 산업, 기술, 국토, 환경, 국민의식과 행동 전분야에 걸친 통합법적인 접근이 필요했고,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총괄적인 기후변화 정책의 중추법으로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가적 노력의 모범이 되었다. 이 기본법의 제정에 따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에너지, 환경, 산업정책 등을 조율하는 대통령 직속기구가 발족하였고, 이 기구를 통해 녹색성장 분야에 대한 GDP 2% 투자와 같은 국내정책은 물론 기후변화 대응 국제개발협력을 지원하는 동아시아기후파트너십(East Asia Climate Partnership, EACP) 등과 같은 다부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한 정책들도 성공적으로 조율되고 추진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의 적극적 의지를 보여주었던 입법은 소위 <탄소배출권거래법>으로 약칭되는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관한 법률>의 제정이었다. 국제적으로 새로운 기후변화 체제에 대한 구축 논의가 진행되면서, 온실가스 다배출 국가인 우리나라에 대한 국제적 압력은 가중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에너지원단위, 온실가스 증가속도 등을 감안할 때 에너지 다소비ㆍ탄소에너지의존형 경제의 구조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ETS의 국가적 도입과 국제적 연계에 가장 앞장섰던 27개 EU국가들의 탄소관세 등을 통한 탄소배출 비용의 무기화 가능성도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미래국가경쟁력 도모에 필연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때, ETS 의 도입은 “기후변화 대응을 부담이 아닌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UN기후정상회의 기조연설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긴 논의과정을 통해 2012년 ETS의 도입을 결정하고 준비하게 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 탄소 다배출국가로서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ETS는 목표관리제도나 탄소세와 같은 직접적인 규제보다 감축비용이 적고 효과적이며, 시장 친화적인 방법이다.6 비록 산업계와 기업들은 ETS가 기업부담을 가져와 나아가서는 국가경쟁력에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시행 중인 온실가스ㆍ에너지목표관리제도(Target Management Scheme, TMS)보다 온실가스 감축비용을 44~68% 정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7
둘째로, 선진국의 경기회복 시 예상되는 ‘탄소무기화’에 대응하여, 현재의 에너지 소비 및 탄소배출이 높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 녹색경쟁력을 선제적으로 갖추는 한편, 기업들의 탄소배출 저감 및 에너지 효율화 노력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수요가 신기술개발 등으로 이어져 앞으로 우리 경제를 이끌 신성장동력 창출을 도모하려는 산업전략과도 연계되어 있다. 실제로 2008년 1월 EU 집행위는 ETS를 재검토하면서, EU의 제조업이 환경보호정책과 환경규제가 없어서 환경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국가들로 이전되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EU 역내 시설에 적용되는 온실가스 감축규제로 역내 생산자가 경쟁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서 ‘탄소관세(carbon tariff)’ 혹은 ‘국경세(border tax)’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국가 간의 무역에서 범지구적 차원의 탄소배출 억제비용에 대한 공동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탄소포함메커니즘(carbon inclusion mechanism)’이 제도화되어, 앞으로의 무역관계에서 국가의 탄소배출이 지금과는 다르게 비용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수입품에 대한 탄소관세 도입이 ‘녹색보호주의(Green Protectionism)’로 전개된다면 한국과 같이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8
EU ETS의 시행에서, 탄소가격의 하락을 지적하며 ETS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닌 유럽재정위기 등에 따른 EU 전반의 경기 하락 및 자체유동자금 확보를 위한 업체들의 배출권 다량 매각에 기인하는 것으로, EU는 3기에 이른 ETS 제도의 시행에 있어 제도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들고 있지는 않다. 단지 운용의 측면에서, 2014~2016년의 배출권 할당량을 당해 경매에 부치지 않고 2019~2020년 시기로 ‘후기이행(Back-loading)’하여 경기회복 후 생산증대에 따른 탄소배출 확대에 대비하면서 현재의 배출권 과잉유동성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EU가 ETS제도 자체에 대한 의심이나 수정보다는 적절한 제도운용의 조절을 통해서 현재의 배출권 가격 하락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이 제도의 1차적 목적은 배출권 가격의 유지가 아닌 온실가스배출 감축과 지속가능한 성장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출권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배출권 거래량의 증가와 감축기술 투자 확대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1990년 이후 EU의 GDP가 40% 성장하는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은 16% 감소하여 산업혁명 이후 불가능하게 여겨질 수 있던 경제성장과 온실가스 배출의 탈동조화(decoupling)를 가져와 친환경적인 경제성장을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9 EU가 보여준 경험은 제도적 실패를 이유로 ETS 자체의 목적과 성격이 재고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단지 2000년대 말 미국의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에서 비롯된 국제적인 경기침체가 ‘환경비용’ 혹은 ‘탄소가격’이 국가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탄소포함메커니즘’의 현실화를 한동안 연기시켜 주었을 뿐으로, 경기회복 시 EU를 중심으로 다시 이슈화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마지막으로, ETS의 도입은 비단 국내 경제와 산업정책뿐만이 아닌 우리의 외교적 역량 강화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2011년 COP17에서 한 국제사회의 합의(‘Durban Platform’)에 따라서 2015년에 결정되는 포스트-교토체제(Post-Kyoto System)에서는 모든 당사국이 일정 정도의 의무를 부과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기후변화 체제의 기획, 확정을 앞두고 선진국과 개도국은 여전히 현저한 입장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제환경에서 우리나라가 선도적으로 국가단위의 ETS의 도입을 결정한 것은, 신국제질서의 형성에 미리 대응하여 우리의 온실가스 감축 의지를 선제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선진국들에 의해 국가감축의무가 규정되는 것을 막고 개도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기후변화 국제협력의 신질서 구축에 중견국가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외교를 주도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기도 하다. 특히 2013년 COP19에서 주목받았듯이, 기후변화 국제협력의 신질서 구축에서 ‘자국주도적 결정에 의한 공헌(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 INDCs)’이 더욱 의미를 갖게 되어,10 자국 내에서의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노력 없이 외교적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자국의 입장을 반영하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산업계를 중심으로 ETS의 도입이 기업 부담으로 인한 한국 경제의 경쟁력 약화를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제도 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ETS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탄소세나 여타의 직접규제 방식보다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적고, 기업들의 자율적 감축 의지를 높이는 동시에 제반 관련 녹색기술과 녹색산업들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시장과 수요를 이끌게 된다.11 또한 시행 준비 중인 한국의 ETS는 무역집약도와 탄소집약도 등을 고려한 국내 산업의 지원대책을 포함하고 있으며, 온실가스 감축설비 설치, 관련 기술개발 등의 사업에 대해서 금융ㆍ세제지원, 보조금 등을 지원하고, 특히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을 우선 지원하는 등의 우리나라 기업과 산업들의 경쟁력을 동반 성장시킬 방안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ETS가 단순히 환경보호만을 위한 환경규제가 아니라, 녹색기술 개발 지원을 도모하여 신성장산업 육성을 지원하고 산업경쟁력 선진화와 에너지 소비효율성 제고하는 등 기후변화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산업계의 전반적인 체질개선을 도모하는 포괄적인 정책이라는 점에서 2012년 국회나 국민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차 계획연도 <국가배출권할당계획> 확정의 의미와 문제점
9월 23일의 UN기후정상회의를 통해, 그 동안 쌓아왔던 녹색외교의 리더십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그러나 그 이전인 9월 11일에 정부가 확정한 <국가배출권할당계획>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았던 기존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의 근간에서 크게 후퇴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국내외적 정책 지향점에 매우 모순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12 <탄소배출권거래법>에 따라 2015년 1월 ETS의 시행을 앞두고, <국가배출권할당계획>에 대한 정부의 결정은 그 파급효과로 볼 때 기후변화 정책 아젠다에 대한 정부의 기본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이 제도의 도입 취지에 미치지 못하는 정부의 할당계획 결정은 기후변화 대응 정책 아젠다들의 정책우선순위가 과거에 비해 매우 낮아진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확정한 할당 배출허용량은 2017년까지 16억 8,700만 톤(Korean Allowance Unit, KAU)13으로, 지난 5월 환경부에서 제출했던 원안보다 5,800만 톤이 늘었다. 이는 당초 탄소배출권거래제 적용 대상 기업들이 감축해야 했던 양의 48%에 달하는 것으로 모든 업종에서 목표감축률이 10% 완화된 것이고, 간접배출 및 발전분야에 대한 감축부담은 추가로 완화할 예정이다. 탄소배출권거래 관련 투자에 부담을 지닌 산업계가 적극적으로 요구했던 배출량전망치(BAU)에 대한 재산정 요구도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배출량 초과 시 과징금도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톤당 최대 10만 원, 적정가격 3만 원 수준에서 기준가격 1만 원으로 설정되었다. 이는 곧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국내정책의 결정체로 여겨졌던 ETS가 기업의 부담으로 인정되면서 대폭 완화된 조치로서, 한국의 ETS는 실질적인 탄소배출 억제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으로 후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국 예정대로 2015년에 제도를 시행한다는 정책 일관성을 국내외에 알리는 것 외에, 실질적인 온실가스 감축 효과나 우리나라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의지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게 하는 정부의 결정이었다.
UN기후정상회의 기조연설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서 ‘기술과 시장의 중심역할’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에너지 신산업 육성’의 필요에 대한 강조이다. 정부의 핵심 정책 아젠다인 ‘창조경제 육성’은 녹색기술에 기반을 둔 신성장산업의 육성이라는 과거 정부의 녹색성장정책의 핵심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14 이러한 정책의 연속성, 특히 과학기술 및 산업 정책에서의 장기적인 정책적 일관성은 총체적인 국가경쟁력 관점에서뿐만이 아니라, 관련 산업과 기업이 미래를 안정되게 예측하고 투자를 할 수 있게 하여 보다 큰 정책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 산업이나 관련 녹색기술과 같은 대규모의 안정된 투자가 필요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한 과학기술 및 산업 육성의 경우, 새로운 신기술 개발이라는 공급 측면뿐만이 아닌 필요에 의한 수요 측면도 고려해 주어야 관련 시장이 형성되어 보다 가속력 있게 발전되고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ETS는 지금까지 탄소에너지 기반의 기술과 산업에 의존해 왔던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은 물론, 탄소가격을 상쇄할 수 있는 기술과 제품의 수요를 촉진해 보다 큰 부가가치를 지닌 녹색기술의 산업화를 선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완화된 ETS의 운용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수요의 창출을 통해 녹색기술의 발전과 녹색산업의 성장을 도모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회복이라는 선결과제로 인해 퇴행한 1차 계획연도(2015~2017) 이후, 2차 계획연도의 국가배출권할당계획 수립 시에는 온실가스 감축은 물론 녹색 신성장산업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ETS의 도입 취지에 상응하는 정책적 의지를 담아야 할 것이며, 이는 바로 이번 UN기후정상회의에서 강조했던 “기후변화 대응을 부담이 아닌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맺는 말: ‘부담이 아닌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
내치(內治)와 외치(外治)는 동색(同色)이어야만 한다. 국내외 정책 간의 패러독스를 극복할 때, 그 국가의 외교력과 글로벌 리더십이 고양될 수 있다. 많은 국가가 국제적 리더십을 지니기 위해 각기의 아젠다를 지니고 외교 무대에 등장하지만, 외교적 리더십이나 진정성은 국내정책과 일관되게 연계되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이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이슈에서 중견국가로서의 모범적인 외교력과 국제적 공헌에 대해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고, 또한 실제로 기후변화 대응 국제협력의 무대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표명하는 외교적 입장과 국내에서의 관련 정책 추진에 일관성을 지니며 그 진정성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 유사한 정책 및 국제협력 아젠다로서 중국의 ‘녹색발전(Green Development)’이나 일본의 ‘저탄소사회(Low Carbon Society)’ 등이 아닌 대한민국의 ‘녹색성장(Green Growth)’이 세계은행이나 OECD의 공식적인 아젠다 및 협력 주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젠다의 독창성보다도 국내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보여주었던 진정성에, 국제사회가 우리의 노력과 정책적 의지를 더욱 크게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범국가적 차원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정책의 그 추진 방향이 5년이라는 유한한 임기를 지니고 있는 정권에 따라 일관되지 못할 경우, 많은 연관산업의 기업 및 종사자들이나 관련 정책담당자들에게 서로 다른 신호를 주게 됨으로써 국정운영에서도 갈등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 미래를 예측하고 선도하여 기업들이나 산업계에 올바른 투자와 기술개발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적어도 정책효과가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분야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후변화 대응과 같이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와 관련된 정책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산업경쟁력이나 기업 부담, 그리고 물가상승으로의 전가 등을 고려하여 본래의 제도 도입 취지에 못 미치는 ETS의 시행을 결정한 것은 침체된 경제의 회복이라는 보다 큰 정부의 아젠다 설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록 1차 계획연도 기간 중의 제도시행이 그 제도의 도입 취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ETS가 온실가스 배출 억제를 위한 완화정책(mitigation policy)의 전부가 아니기에 ETS에서의 일보(一步) 후퇴에는 반드시 다른 녹색정책들의 이보(二步) 전진이 필요하다. 즉,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아젠다의 달성을 위한 추진 정책으로 기후변화 대응 녹색기술과 녹색산업 진흥을 위한 보다 과감한 지원으로 R&D를 이끌고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더욱 정책적 지원과 집중이 있어야만 한다. 만약 강력한 ETS의 시행을 통해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수요를 창출할 수 없게 되었다면, 반드시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녹색기술 및 녹색산업 진흥 정책과 신재생에너지 개발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녹색성장 아젠다에 기초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기업의 투자가 2차전지나 태양열 발전소재 등의 연관 산업에서 괄목할 만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음을 상기하여, 정부의 창조경제 아젠다가 미래 신성장동력을 위한 기업의 투자와 연결될 수 있도록 충분한 정책적 지원과 배려로 구현되어야 할 시점이다.
국제사회에서의 국가적 위상과 외교적 역량은 관련된 국내의 정책적 기반과 정책추진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외교무대에서의 한 국가의 외교적 진정성과 리더십이 그 국가의 국내 정책적 기반과 정책추진의 성과 없이 얻어질 수는 없다. “기후변화 대응을 부담이 아닌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자신감 넘치는 제언은 국제사회뿐만이 아니라 국내 기업과 국민들에게도 동시에 전달되어야 하는 것으로, 정부는 정책적 의지를 지니고 선도적으로 발상의 전환을 실천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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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외교와 아울러 녹색기술 및 신재생에너지 관련 신성장동력 분야의 투자가 긍정적인 결과들을 낳으면서 대한민국의 녹색성장정책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정책 아젠다로 여겨지기도 했다. 지난 2013년 1월의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녹색성장정책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한국리서치)의 설문결과(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에 의하면, 국민의 대다수(97.2%)가 녹색성장정책이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고 답하였으며, 응답자의 84%가 녹색성장정책이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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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D. Putnam. 1988. “Diplomacy and Domestic Politics: The Logic of Two-level Game.” International Organization, 42 (3): 427-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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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ust praise the Korean government and its President for offering green growth as a solution to the financial crisis (Achim Steiner, UNEP Executive Director of the UNEP, at the GGGS, May 2012)”; “Korea is becoming a role model of green growth policy, and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launching the OECD green growth strategy (Angel Gurria, OECD Secretary-General, at the OECD Council, May 2011); Korea has supported green growth not just with words, but in practice. Many developing countries are looking up to Korea as a role model and taking a keen interest in the changes that are happening in Korea (Rachel Kyte, Vice President of the World Bank, at the GGGS, May 2012).” For more information, see OECD. 2013. Putting Green Growth at the Heart of Development. Paris: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2012. “Achieving the “Low Carbon, Green Growth” Vision in Korea.” OECD Economics Department Working Paper No. 964. Paris: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World Bank. 2012. Inclusive Green Growth: The Pathway to Sustainable Development. Washington DC: World Bank; and BRIE. 2011. Green Growth: From Religion to Reality. Berkeley, Calif.: The Berkeley Roundtable on the International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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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란 현재 시점에서 전망한 목표연도의 배출량으로 전제조건(GDP, 인구, 유가, 산업구조 등)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의 온실가스 감축정책 추세가 미래에도 지속된다는 가정하에서 산정된 배출량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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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은 찬성140, 반대40, 기권1의 지지를 받으며 2009년 12월에 제정되었다. 아울러, 2011년 11월 <지능형전력망 구축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찬성 178, 기권1)>, 2012년 2월 <녹색건축물 조성지원법(찬성 220)>, 그리고 2012년 5월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관한 법률 (찬성 148, 기권 3)> 모두 국회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제정되어, 저탄소 기후변화 대응 관련 제도들은 그 도입에 있어 여ㆍ야로부터 정치적 합의를 얻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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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환경부는 ETS의 기대효과로 ①환경보호, ②감축비용 절감, ③온실가스 감축의 경제적 유연성 제고, ④저탄소기술 개발 촉진 등을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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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S의 온실가스 감축비용에 대해서 환경정책평가연구원은 44%, 삼성경제연구소는 60%, 에너지경제연구원은 68%의 감축비용을 온실가스에너지목표관리제(TMS)보다 절감할 수 있다고 발표한바 있다. 환경부/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2014. Emission Trading Scheme. Available at http://www.gir.go.kr. Accessed on September 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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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한 연구에 의하면, 주요 선진국에서 탄소관세를 실시할 경우 예상되는 한국 제조업 수출은 3.9%가 줄어들어, 수출 감소액은 43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분석된 바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기후변화협약, 한국기업에 위기인가 기회인가.” CEO Information No. 715. (2009.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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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국제 온실가스 규제 동향과 시사점.” 2011.7.6; EU 보도자료 (20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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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 2014. “Ex-Ante Clarification, Transparency, and Understanding of 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Mitigation Contributions.” WRI Working Paper. Washington DC: World Resources Institutes; ECOFYS. 2014. “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 under the UNFCCC.“ Discussion Paper No. CLIDE14935. Cologne, Germany: German Federal Enterprise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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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추산에 따르면 ETS가 실시될 경우 GDP 감소율은 0.05~0.26%, 물가상승률은 0.12~0.37%, 에너지 가격은 0.34~1.79%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직접규제로 온실가스 감축을 도모할 경우 GDP감소율은 0.18~0.61%, 물가상승률은 0.25~0.48%, 그리고 에너지가격은 0.82~1.88% 상승하여 경제에 훨씬 큰 부담을 주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후 9월의 정부의 기업부담 완화조치에 따라, 2015년 시행 예정인 ETS의 경제적 영향 추산은 그 부담이 대폭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 확정.” 기획재정부 보도자료. 2014년1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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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 9월2일, 2015년 1월부터 예정대로 ETS를 시행할 것임을 밝혔고, 이어서 9월11일 국무회의를 통해서 <국가배출권할당계획>을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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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란 배출권의 이력ㆍ통계관리, 해외 배출권과의 구분 등을 위해 마련한 우리나라 고유의 영문 배출권 명칭으로 1KAU를 온실가스 배출량 단위로 환산하며 1tCO2-eq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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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UN기후정상회의에 앞서 지난 여름 ○1태양전지, ○2연료전지, ○3바이오에너지, ○42차전지, ○5전력IT, 그리고 ○6이산화탄소포집과 처리장치(CCS)를 기후변화 대응기술 관련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6개 핵심기술을 선정하여 발표한 바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2020년에는 6대 기술분야에서 1천 200만t의 CO2 감축에 기여하는 동시에, 약 217조 원의 매출을 내 국가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