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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6일 발표한 ‘워싱턴 선언’을 통해 한국과 미국은 확장 억제 조치의 일환으로 미 전략핵잠수함(SSBN)의 한국 기항을 포함한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regular visibility)”을 증진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한 인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글에서 “미 오하이오급 잠수함은 핵무기 접수를 금지한 비핵화 공동선언 때문에 핵을 탑재하고 우리 항구에 기항할 수 없다”고 하며 ‘워싱턴 선언’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북한이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된 직후부터 핵 개발을 계속함으로써 이 선언을 위반하였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이 선언을 사문화(死文化)하였다는 점을 애써 외면한 지극히 편향된 것이다.

북핵 위협이 날로 증가하여 우리로서는 국가비상사태라도 선포해야 할 상황인데도 우리 정부에 비핵화 공동선언을 준수하라고 하면서 제대로 된 대응 조치를 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것이 상식에 맞는지 걱정이다. 북한은 헌법에 “핵보유국” 지위를 명기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임의적 선제 사용 가능성을 규정한 핵무력정책법까지 제정했으며, ‘화산 31′이라는 신형 핵탄두까지 선보였는데, 이런 북한의 행동은 앞으로도 비핵화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정부는 형해화되고 실질적 의미를 잃어버린 선언에 집착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국제적인 위상에서 북한과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고,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국제적 차원의 합의를 준수하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비핵화 공동 선언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그 이행과 준수를 요구하는 근거가 되고 있으며, 이를 파기하면 국제사회가 우리도 핵무장을 할 것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국제사회가 착각하게 했고, 북한에 핵무기를 만들 시간을 벌어 주었다. 북한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가져야 한다면서 아직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금과옥조처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인질이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인질범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아 남북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달성하려 한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북한의 체제 안전에 위협이기 때문에 한국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북한의 오래된 목표이고 정책이다.

비핵화 공동선언은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북한 비핵화를 견인하지 못했고 오히려 우리의 선택지를 축소하였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여 북한이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면 우리도 똑같이 핵무기로 대응할 것이라는 “한국판 상호확증파괴전략(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을 실현해야 한다. 앞으로 한미 간 협의를 거쳐 도입될 확장 억제 방안들의 효율적 이행을 방해하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파기하는 것이 타당하고, 이것이 “비정상의 정상화”이기도 하다.

정부는 비핵화 공동선언의 의미를 퇴색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 순간에도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북한 정권이므로 우리도 더 이상 비핵화 공동선언을 일방적으로 준수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리는 동시에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를 포함하여 우리의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모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통일부가 발간한 ‘2023 통일 백서’는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비핵화의 대상이 북한이어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 차제에 북한 비핵화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우리의 대응을 제한하고 있는 비핵화 공동선언의 족쇄를 벗어던져야 한다. 그동안 새로운 확장 억제 조치의 도입에 소극적이었던 미국도 최근 적극적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보고서나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전술핵 재배치 등 가시적이고 증강된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마당에 우리가 비핵화 공동선언이 유효하다고 하면 앞으로 도입될 한미 간 확장 억제 조치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인질이 오히려 인질범을 옹호하는 “한국판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오늘의 안보 현실에 걸맞은 북핵 대응을 위해서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파기가 그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나라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는 정부라면 최소한의 자위적 조치마저 남북 합의 위반이라는 억지 주장이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본 글은 5월 22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About Experts

최강
최강

원장

최강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이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외교원에서 기획부장과 외교안보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동 연구원에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미주연구부장을 지냈다. 또한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아태안보협력이사회 한국위원회 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한국국방연구원에서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제군축연구실장,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국방현안팀장 및 한국국방연구 저널 편집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기획부 부장으로서 국가 안보정책 실무를 다루었으며, 4자회담 당시 한국 대표 사절단으로도 참여한 바 있다. 1959년생으로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고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구분야는 군비통제, 위기관리, 북한군사, 다자안보협력, 핵확산방지, 한미동맹 그리고 남북관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