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3일 아침, 최대 뉴스는 리콴유 (Lee Kuan Yew) 전 싱가포르 총리의 사망이다. 그의 사망을 추모하는 싱가포르 국민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은 여러 생각을 했을 법하다. 리콴유가 싱가포르와 동남아, 나아가 세계에 남긴 유산이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까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국가 독립 1세대 지도자였다. 싱가포르가 1963년 영국으로부터 주권을 넘겨 받고, 같은 해 말레이시아와 합병하고, 1965년 결국 말레이시아와 결별하며 독립국가로 홀로 서는 모든 과정을 주도했던 정치 지도자가 리콴유다. 그는 또 1967년 아세안 (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설립 당시 함께 뜻을 모았던 아세안 1세대 지도자 중에서도 마지막 남은 이였다. 그의 사망을 끝으로 동남아 독립 국가 건설, 그리고 아세안 건설이라는 동남아 역사의 제 1장이 막을 내렸다.
그는 역사의 증인을 넘어 역사를 만든 사람이었다.
헨리 키신저 (Henry Kissinger)는 “일부 지도자들의 능력과 그들 국가의 힘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비대칭성 중 하나”라고 했다. 이 전형적인 예가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 키신저에 따르면 리콴유는 ‘작은 무대 위에 선 거인 ’ (A big man on a small stage)이었다.
리콴유는 ‘세력균형론’ (Balance of Power)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싱가포르라는 소국이 ‘말레이-인도네시안 (Malay-Indonesian) 인구로 구성된 무슬림’이 주를 이루는 주변 ‘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세력균형을 생존 방식으로 택했다. 싱가포르가 동남아 국가를 아세안이라는 하나의 지역협력체로 묶는 구상에 적극 참여하고 그 과정을 주도했던 것은 세력균형을 통해 싱가포르의 안전을 보장하려던 리콴유의 전략이었다.
나아가 그는 중국의 부상에 맞서 미국을 다시 동아시아로 끌어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Obama)가 아시아 중심 외교를 천명하기 이전의 일이다. 아세안 10개국 전체가 이런 리콴유의 전략에 따라 움직였다. 인구 600여만 명에 불과하며 동남아에서도 작은 나라 중 하나인 싱가포르가 동남아와 아태 지역 국제관계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던 것은 리콴유의 한 발 앞선 전략적 사고 덕분이다.
사람들은 리콴유라는 이름에서 싱가포르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떠올린다.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될 당시 싱가포르 인구는 400여 만 명에 불과했다. 자원과 생산기반은 거의 없었다.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싱가포르의 지상과제는 생존”이라며 ‘생존의 정치’(politics of survival)를 입에 달고 살았다. 민주주의 같은 정치 체제를 논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이제 싱가포르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5만5천 달러가 넘을 만큼 경제가 커졌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말라카 (Malacca) 해협에 자리잡아 일찌감치 자유무역이 발달했다는 ‘지경학적 장점’을 고려해도 싱가포르의 성장에서 국가 지도자, 특히 리콴유의 공헌은 절대적이다.
리콴유의 통치 아래 싱가포르는 자유무역 중심지에서 IT 위주의 제조업 기지로, 이어 첨단 바이오 산업 센터로, 국제적 금융의 허브로 변신을 거듭했다. 싱가포르의 경제구조와 사회구조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제이션 (globalization)의 교과서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경제 (open economy)로 꼽히는 것도 싱가포르다. 이 놀라운 성장이 부패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놀랍다. 투명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싱가포르의 공공행정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 반대 평가도 존재한다. 싱가포르는 ‘경제가 성장하면 민주주의는 성취된다’는 명제를 거부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독립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선거를 치러왔지만, 한번도 정권 교체는 없었다. 다당제를 언급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야당의 세력은 취약하다. 2011년 총선에서 야당은 전체 87석 중 ‘무려’ 6석이나 획득했다. 이 선거 결과는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야당이 이렇게 많은 의석을 얻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전인 2006년 선거에선 두 야당이 각각 한 석을 얻었을 뿐이다. 싱가포르의 선거는 늘 그래왔다. 선거제도를 통하거나, 명예훼손 소송을 통해 야당을 철저히 탄압하는 정치를 펼쳐왔다.
정부 여당은 “여당인 인민행동당이 집권하지 않았으면 종족간 평화도, 경제성장도 없다”, “자원도 없고, 인구도 국토도 작고, 무슬림에 둘러싸인 화교의 섬 싱가포르가 성장하고 생존하는데 있어 민주주의는 사치”라고 늘 말해왔다.
싱가포르가 경제적으로 성장한 이후 리콴유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를 외쳤다. “문화적, 역사적으로 서구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채택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권위를 존중하고, 공동체를 개인의 자유 앞에 놓는 아시아적 가치와 생활방식이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리콴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민주주의도, 권위주의도 아닌 싱가포르의 ‘애매한 정치체제’에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관측이 2011년 선거 이후 제기돼 왔다. 싱가포르 국민들이 지금 당장 정권교체를 바라고 있지는 않지만 현 집권 세력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2013년 필자가 만났던 싱가포르의 한 대학교수는 “싱가포르의 애매한 민주주의는 리콴유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좋든 싫든 국부로서 리콴유의 존재가 급격한 변화를 막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이 교수는 여기에 덧붙였다. “리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크게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아시아 네 마리 용 중에서 한국은 경제성장 이후 민주화를 택했다. 싱가포르는 더 높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를 유지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리콴유의 발전 전략을 모델 삼아 높은 경제성장과 일당지배체제를 지속하는 전략을 채택했고 아직까지 중국은 이 모델을 따르고 있다.
리콴유 사후 싱가포르의 정치는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 싱가포르의 독특한 모델이 유지가 될 것인지, 아니면 다소 늦긴 했지만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 들것인지 기로에 서있다. 향후 싱가포르의 진로는 그 모델을 따랐던 중국에게도 함의하는 바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