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시작부터 뜨거웠다. 1월 5일 새해 첫 주를 마치려는 금요일 오후부터 북한은 도발을 감행했다. 시작은 해안포 사격이었다. 2023년 11월 23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9·19 군사 합의 파기를 주장한 이후 첫 포병 사격이었다. 장산곶과 등산곶 일대에서 발사된 약 200여 발의 포탄은 남하해 NLL 북방 해상완충구역 인근에 떨어졌다. 즉 북한은 9·19 군사 합의의 파기를 주장한 것에 더하여 파기를 확인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해상 포격 도발로 시작한 한 해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서해 5도 지역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리고 일선 부대에 해상 사격 훈련을 재개하도록 지시했다. 우리도 대응 성격의 해상 사격을 실시했으며, 적이 발사한 200발보다 많은 400발을 발사하면서, 북한의 행위로 인해 해상 완충 구역이 없어졌음과 어떠한 도발에도 항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이튿날인 1월 6일, 북한은 총참모부 보도 자료 형식으로 포 47문을 동원하여 192발을 발사했다면서, 해상 실탄 사격이 백령도와 연평도에 간접적인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또 60발의 포사격을 실시했는데, 우리 군은 적 사격 방향이 남쪽이 아니라 서쪽임을 확인하고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은 매우 의외의 반응을 보였는데, 심지어 김여정까지 나섰다.
이들은 포사격을 하지 않고 포성을 모방한 폭약을 터뜨리는 기만작전을 벌였는데, 남조선 군대가 속아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우리 군을 ‘눈 뜬 소경’이라고 격하한 뒤 차라리 ‘청후각이 발달된 개에게 안보를 맡기는 것이 열 배는 더 낫다’라고 답했다. 국가 당국자라고는 믿기 어려운 광녀 같은 김여정의 천박한 발언을 두고 우리 국방부도 수준 낮은 심리전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도발 3일째인 1월 7일에는 연평도 북방에서 90발 이상을 발사하면서 사격을 했다. 이번에도 북한은 감히 남쪽으로 포구를 돌리지 못했다.
이러한 포사격과 대응은 일견 커다란 사건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의 의도는 분명하다. 우선 주말을 노려 우리 국민의 불안을 높이고 언제든 공격이 가능함을 협박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특히 주말을 겨냥한 북한의 도발과 위기 조성은 계속될 것이다. 둘째, 가짜 정보를 흘려 우리 군의 대북 탐지 역량을 확인하는 것이 목표다. 김여정의 천박한 발언도 사실 우리 군이 자기들 포탄의 궤적까지 탐지했는지 떠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셋째, 우리 정부와 군대 그리고 국민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시도다.
왜 북한은 전쟁을 말하는가
이러한 북한의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와 국제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기존의 도발과는 결을 달리한다. 우선 북한의 정책적 변화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2023년 12월 26일부터 5일간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한 해를 돌해보고 다음 해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 이 회의에서 우리 안보에 매우 치명적인 내용이 논의됐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북한이 2024년 ‘새로운 투쟁’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투쟁에서 주목할 점은 김정은의 남북 관계 규정이다.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즉 ‘전쟁 중에 있는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하며, ‘남반부 전 령토를 평정’할 것을 암시했다. 즉 남침을 얘기하면서 전쟁의 내러티브(narrative·서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해가 바뀐 2024년 전쟁 서사(敍事)는 공식화되었다. 우리로 치면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 10차 회의(2024년 1월 15일)에서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이자 ‘불변의 주적’으로 지칭하면서 ‘공화국 민족 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겠다고 공언했다. 한발 더 나아가 김정은은 ‘핵 무력’의 ‘제2의 사명’, 즉 전쟁 승리를 위해 전술핵무기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언급하며 핵 협박까지 나갔다.
북한의 의도는 무엇인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김정은의 최근 언동은 북한 전략 기조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이 전쟁, 그것도 핵전쟁의 서사를 펼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더 이상 통일 전선 전술에 기대지 않고 이제 핵전쟁 위협을 활용한 강압을 내세우고 있다. ‘김씨 왕정’의 유지는 바뀌지 않는 북한의 최상위 국가 목표이며, 이를 위해서 북한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따라서 정권 유지에 필요하다면 충분히 전쟁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은 6·25 전쟁 직전에 동맹은커녕 제대로 된 국방력조차 갖추지 못한 최빈국이 아니다. 오히려 재래 전력에서 현저히 질적 우위에 있으며, 미국의 든든한 동맹국으로 국제사회에서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 성장해 왔다. 특히 워싱턴선언으로 한미 양국은 이제 핵 기반의 동맹으로 점차 이전하여 핵 협의 그룹을 갖추고 미국 전략 자산을 한반도에 상시 수준으로 배치하여 핵 억제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목표는 미국 차기 정권과 빅딜
따라서 북한의 전쟁 서사를 실제 개전의 명분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전쟁을 원한다면 전쟁 의도를 감추고 기습을 준비하는 법이다. 이처럼 노골적인 전쟁 협박은 오히려 우리와 미국의 국가 지도부와 국민 그리고 북한 주민의 심리와 인지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인지전(cognitive warfare) 시도로 보아야 한다. 목표는 정권 유지이며, 더욱 세부적으로는 미국 차기 정부와 핵 협상을 통한 현재 핵무장의 공고화다.
북한의 전쟁 서사는 그간의 벼랑 끝 전략과 결을 같이한다. 북한은 위기를 최대로 높여왔을 때마다 협상의 기회라는 보상을 받아 왔다. 1994년 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북한 타격까지 검토했지만, 결국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 포기에 대한 보상 기회를 부여받았다. 2003년 NPT 재탈퇴로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북한은 6자 회담이라는 또 다른 협상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2017년 6차 핵실험과 화성-15 ICBM 시험발사까지 성공하자 도널드 트럼프는 ‘화염과 분노’라는 강경 대응 수사만을 반복하다가, 결국 미·북 협상 국면으로 전환했다.
2024년은 4월에 대한민국의 총선이, 11월에는 미국의 대선이 있는 해다. 북한의 전쟁 서사는 진보 정치권에 도움이 안 될 것이기에 자제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 북한은 한국의 진보와 보수 정치권을 한통속으로 본다. 따라서 총선 시기에 맞춘 전쟁 위협으로 대한민국의 국론이 분열되면 그만이다. 총선 시기까지 전쟁 위기를 끌어올리고 여름까지 한국 정부와 국민을 소진시키는 것까지가 상반기의 전략이 될 것이다.
지금 미국의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주 경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공화당 대권 주자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트럼프 차기 정권이 들어선다면 북한은 또 다른 협상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선 캠프에서도 북한과 핵 재협상에 관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미국 대선을 전후하여 7차 핵실험으로 ‘화산-31’ 핵탄두를 검증한 후, 현재 보유한 핵 물질로 100여 발 이상의 전술 핵탄두를 양산하여 보유하면 된다. 북한이 위기를 올리면 올릴수록 차기 정권의 핵 협상과 북한 핵 동결은 더욱 합리성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북한은 전쟁 위기를 크게 만들수록 더욱 큰 성과를 얻게 되는 구조다.
따라서 우리 정부의 대응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특히 미 차기 정부가 북한의 어설픈 핵 협박과 비핵화가 아닌 핵 보유 협상에 끌려가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 북핵의 위험성이 높아진다면, 오히려 한미 핵 확장 억제 수준을 현재의 핵 합의 그룹에서 상향시켜, 미 전술핵 재배치나 핵 공유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 결국 북한의 전쟁 위협에 흔들리지 않는 안보 체제를 갖추는 것은 물론, 한국과 미국의 안보 이익을 정렬하여 공통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외교 안보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 본 글은 이코노미조선 526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